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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박해 예화모음 19편

by 【고동엽】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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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해가 되는 기독교
 
16세기에 보헤미아의 고관 오아킴.노이하우스는 신교를 박해 하려 황제의 허가를 얻으려고 여러 무사를 대동하고서, 비엔 나로 가던 도중, 다늅강을 건너가다가 다리가 파상되어 떨어 졌다.

그는 수중에 빠져 표류하였는데, 어부의 손에 의해 구 출되었으나, 드디어 사망했다 (혹시 이렇게 죽지 않는 경우 라도 박해자는 마음의 고민,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으런수떡냄 대한 박해는 자기 해로움이 될 뿐인 것이다.) 

 

 

 
 
 

 

 

주 따르는 자에게 고난
 
주 따르는 자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이 따르곤 한다.
초기 기독교의 신자였던 로마의 조신 베드로(사도 베드로가 아님)에게도 이것이 있었다.베드로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 아누스 황제 앞에서 신신에게 공물을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하여, 의복을 찢기고, 높은 곳 에 달아올린바 된후, 전신에 무수한 매를 맞았다.


그래도 그는 변심하지하지 않자, 하문하던 사람도, 이번에는 초에 소금을 혼합하여, 이것을 몸의 찢어진 부분 부분에 부어 넣 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문에도 견디었다.
이번에는 화 로와 불을 가지고 와서, 그의 살점을 마치 구어 먹기 위하여 오려 내는 듯 조금씩 떼어서 불에 던졌다.
고통을 더 오래도 록 주기위하여 박해자들은 조금씩 조금씩 오려 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뜻을 굳게 지켜, 자기의 생명을 주위 해 드리고, 고문에 승리했다.
무참한 고난을 이겨낸 것이다.
주를 따르는 자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고난이 따르는 것이다

 

 

 
 
 

 

 

기독교와 박해
 
초기의 기독교는 42명의 로마황제의 박해를 잇달아 받고, 또 받았다.
 어떤 황제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부은 후 불 지른 바 되어, 사람의 몸이 마치 장작과도 같이 탔다.
디오클레티 아누스황제는 가장 참혹한 박해를 시도한 자로서, 기독 신자 를 밀초 대용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공공연하게 예배할 수없어, 동굴에 들어가, 비밀로 예배했다
그곳을 카다콤이라고 하는데, 로마시의 지하에는 카타콤이라 고 하는 곳이 30이나 있어, 지하 400마일가량 동굴로 계속되 어 있다. 그곳에 400만명의 해골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기 독 신자는 법률을 무시하고, 비밀 결사를 했으며, 황제를 예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42대의 왕에게 끊임없이 박해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핍박하는 왕이, 오히려 핍박받고 있는 신자로부터 축복의 기도를 받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박해는 로마에 있어서 310년이나 계속되었다.
러나 박해 로서는 기독교를 어찌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실로 박해나, 그 어떤 것에 어찌되지도 않을 뿐더러, 최후의 승리를 보고야 마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는 고난
 
독실한 신앙인에게는 옛부터 고난이 크게 있었다.교회사의 시조로 알려지는 에유세비오스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그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테바이(더베)의 순교자들이 받은 고난과 형벌은, 아무리 설명한대도 다 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들은 갈구리로가 아니라 조개껍질로 살을 도려 낸바되어 살해되었다.


여인들은 한 다리를 꺾이고, 옷을 벗기운 후, 알몸 그대로 높은 곳에 달리워 구경거리로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러 만든 도 구, 즉 나무가지 중 가장 센 것들을 한꺼번에 휘게하여, 그 하나 하나에 손 발을 결박한 후, 그것을 일시에 놓음으로써, 반동으로 손발이 찢어져 죽도록 된 신자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수일간, 또는 잠시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년에 걸 쳐 행해졌다. 하루에 10인 이상, 20인 이상, 또는 30인 이하 나 되는 날 없이, 60인, 100인의 남자들이 각양 형벌의 언도 를 받고, 아내와 어린이들과 함께 하루 동안에 피살되곤 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있어서는, 선고가 신자들에 게 내려지기가 무섭게 다른 신자들이 재판관앞으로 달려나가 자기도 그리스도인임을 용감한 태도로 고백했다.
그리고 기 쁨으로써 최후의 죽음의 선고를 받아 들였다`가 그것이다.실 로 독신자에게는 고난이 언제나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누가 참을 수 있는가?
 
우리는 대개 고난을 당할 그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어느 순교자가 바로 내일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내일 형장 에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자기는 그 불길을 뜨거움을 견 디며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아무리 질문해도 자신이 생기 지 않았다.
그는 타오르는 촛불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몇 초를 견
견디지 못하고 그는 손을 떼고 말았다.



 `나는 아마 내일 예수님을 부인할지도 몰라` 그는 자신이 없어 주님앞에 간절히 메달렸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는 주님을 찬양하며 불길 속에서 순교를 당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이여 당신은 미리 고난을 겁낼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주
님을 기쁘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걸어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대성공이 있기 전에
 
큰 성공이 있기 전에 먼저 큰 박해가 있는 법이다.
종교 개 혁 시대에도 개혁자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불리웠을 때에 그의 교적들은 그를 죽일 계획을 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후에도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교황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주례하고 그를 집사로 삼음으로써, 교권과 정치권의 친밀을 이루어, 루터를 죽이려 했다.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파렐은 종교 개혁을 위하여 다 니는 가운데, 그의 교적들은 그를 루터파의 개라고 능욕하며 항상 모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대적들이 있었으나, 종교 개혁은 필경 성공하였다. 종교 개혁에 있어서 반대자들의 조롱은 한 동한 끝나지 아니하여, 지리하고 안타까왔으나 그 것도 끝나는 날이 있었던 것이다. 
 

 

 
 
 

 

 

독실한 신앙가에 따르는
 
영국의 신학자로서,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위클리프는, 옥스 포드 대학에서 배우고 모교의 교수 또는 영국 왕의 궁정사제가 되자, 교황의 압박에 항의하여, 영국의 정치적 및 종교적독립을 이룩하기에 힘썼다.그는 성경은 신앙과 구원에 관한
최고의 권위라는 것을 확신하고, 교회의 개혁에 진력했다.

스스로 통속적인 말로 복음을 설교하고, 또 성경의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그 영역을 계획했다.(1378). 이것은 라틴어 에서의 중역이기는 했으나, 영어 발달사에 큰 공헌이 되었으 며, [롤러즈 :성경의 사람이란 뜻]라고 불리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 이와 동시에 그는 종교가의 악덕 을 책하고, 참된 복음을 풀어 말한 백 수십편의 저술을 했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활동은 당시 교계의 미움을 사게되어, 런 던의 사교에 의해 여러번 교회 법정에 출두하도록 호출되었 는데, 국왕 에드워드 3세 및 그 아들의 비호로 겨우 난을 면 하였다.
그러나 교회 당국자들은 그가 죽은 후까지도 미워 하였으니, 죽은 24년 후 그의 번역한 성경, 그리고 그가 저 술한 것은 모두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44년후에는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뼈를 꺼내 불태운 후, 그 재를 그가 살던 집이 있는 동네 가까이에 흐르고 있는 강물 속에 던져 버리고야 말았다. 실로 경건하게, 그리고 주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 있는 것은 안팎의 핍박인 것이다. 

 

 

 

 
 
 

 

 

때때로 오해받아 받은
 
초대 크리스찬들은 불신자들에 의해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이방인들은 [튜에스테스의 향연과 오이디푸스의 골육상잔의 죄]를 신자에게 씌워(돌려), 박해를 했던 것이다.

튜에스테 스는 뮤케나이왕 아트레우스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아내 아 에로페또는 아이트라와 내통하여 왕위의 상징인 황금양을 빼 앗었기 때문에, 형의 분노를 사게 되고, 형은 튜에스테스의 아들을 죽여 식탁위에 놓음으로써 이야기는 생겨나게 되었는 바, 로마황제는 신자에게 이와같은 일을 한다는 터무니 없는 죄를 씌워 벌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 에 나오는 왕의 이름인데,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서 그 어 머니와 결혼하는 불륜의 일을 했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런 죄를 씌운 것은 남녀가 함께 모여 예배했기 때문이었다
신자에게는 언제나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성경은 미리 말해주 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 죽은 기독교
 
로마에서 기독교를 박해한 임군들과 관원들 30명은 모두 다 불행한 죽음을 했다.
그들 중 세 사람이 자살하였고, 다섯 사람이 자기와 친근한 자들로 말미암아 암살당했으며, 하나 는 눈이 뽑히었고, 하나는 소경이 되었으며, 또 하나는 목매 어 죽임을 당했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다 불행하게 죽었다.
 (주님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는 깨어지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을 이기지 못하는
 
감리교피의 창시자인 영국의 웨슬리목사는 박사는 신앙을 멸 시할 수는 있어도 이기지 못한다고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에
기록한바 있다.

 `1768년 1월 11일 (월요일)-이번 주간은 여가를 이용하여, 우드로우씨의 [스코틀런드 교회 수난사]를 읽었다.
박해는 신앙을 능욕하는 일이 있으나, 사실은 어떠 한 예외도 허락하는 일 없이, 신앙의 승리는 명백하고, 부동 의 것이다`가 그것이다.

실로 로마의 박해도, 스코틀랜드나 홀런드 및 프랑스의 박해 도, 그리고 일본의 박해도, 기독교 신앙에 이기지는 못했다. 

 

 

 
 
 

 

 

신앙자세
 
<불안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최효섭>
아프리카에서 한때는 많은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비밀로 해야
되었다. 그 당시 아프리카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암호인사가 있었는데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숲속에 들어가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암호인사는 `당신은 박해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숲속 교회당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하는
말을 대신한 것이다.



이 암호인사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생활의 비결을 배운다.
우리들도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질문을 언제나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야겠다. 

 

 

 
 
 

 

 

예매히 받은 박해
 
주후 166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 리우스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리스 도교는 국가에 유해한 것이라하여 핍박했을 뿐 아니라, 그해 에 도처에 대역병이 유행했는데, 그것 마저 그리스도인의 죄 로 돌려 핍박의 이유로 삼았던 것이다. 실로 애매한 박해를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초기에 뿐 아니라, 그 후 에도, 현재에도, 아니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때때로 있는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애매히 핍박을 받는다고 이상히 여길 것은 없는 것이다.
 주님이 애매히 받으셨고, 그 제자들 도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셨으니까. 

 

 

 
 
 

 

 

박해의 낱말뜻
 
1. 히브리어
라다프 - 뒤쫓다, 추적하다, 쫓아가다, 박해하다, 학대하다.
사탐 - 미워하다, 증오하다, -에게 악의를 품다, 반대하다, 대항하다.
짜라르 - 초조하게하다, 괴롭히다, 고민시키다, 제한하다.

2. 헬라어
디오그모스 - 핍박 디오코 - 핍박하다, 빼앗다.
에크디오코 - 핍박하다, 쫓아내다.
라크티조오 - 핍박하는, 발길질하는.


*** 박해에 대한 성구 ***

1. 왜 성도가 박해를 받는가?
요15:18 -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
행14:22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려움이 많으므로
갈4:29 - 성령으로 따라 난 자이기 때문
딤후3:12 - 경건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
벧전4:12 -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벧전4:19 -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2. 박해 받을 때 성도의 태도
시119:161 -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경외해야 함
요16:33 - 담대할 것
행5:41 - 합당한 일로 생각하라
고후4:8 - 낙심하지 말 것
살후1:4 - 인내와 믿음으로 대할 것

:10 - 오래 참아야 함
벧전2:19 - 하나님을 생각해야 함
벧전4:16 - 고난을 부끄러워 아니함
약1:2 - 온전히 기뻐해야 함

3. 박해를 받는 자의 기쁨
마5:11 - 복이 있음
마10:22 - 구원을 얻음
눅6:23 - 상이 큼
롬8:18 - 영광을 누리게 됨
롬8:17 -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됨
히11:35 - 좋은 부활을 얻음
벧전1:7 -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됨
벧전4:14 -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 

 

 

 
 
 

 

 

카타콤
 
로마의 카타콤은 그리스도인의 박해의 유적이다.그것은 27 개의 굴로서 굴 속이 무수히 나뉘고 그 전 연장은 실로 500 마일에 미친다고 한다.
 이곳에는 약 500만명의 그리스도인의 시체가 장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말한 백부장의 시체 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 굴벽에는 갖가지 마크가 새겨져 있는데 물고기 모양이나 닻의 모양등이 보인다.


이러한 유형은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박해에 견디고 고난 중에서 도 희망과 환희를 가지고 죽어 갔는지 이야기해 주고 있다. 

 

 

 
 
 

 

 

처음 믿는 자에게 따르는
 
일본의 유명한 박애가이며, 사회 사업가인 가가와 도요히꼬 는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박해를 받았다고 그 의 저서 [하나님에 의한 해방 44페이지]에 밝혔다. `나는 첩 의 자식이다.
 내 형은 선조로부터의 피를 받아 방탕으로 몸 을 망쳤다. 무려 몇 명이나 첩이 있었다는 것이다...나는 성 경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불결한 생각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은, 마음 가운데 이미 간음한 것이다(막5:6)`라고 기록되있었다.
 나는 예수교를 믿으면서는 - 일본의 가정이 순결 해지기 위해, 형과는 다른 길을 걸으려고 결심했다...


나는 14세의 여름 7월에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런 데 나를 돌보아 주던 삼촌은, 고액 납세자로서, 유복한 생활 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교에는 대 반대자로, 서양의 종교는 안된다고 하여, 내가 밤에 교회에 가 있는 때에도, 아홉시만 되면, 대문을 잠그고 나를 들여주지 않았다.`라고.
이것은 비단 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처음 믿는 신자에 게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자주 있는 일이다.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는 기원 후 65년경 바울과 베드로를 처형하고 뿐만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죽였습 니다.
로마시에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 게 전가시켜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리아의 반란을 초 래했고, 원로원과 근위대에게까지 버림받아 자살로 인생을 끝냈읍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박해와 순교는 그들이 우상과 황제 앞에 무릎을 숭배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이것때문에 수천만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했으며, 동물의 가죽을 꿰메어 이은 옷을 입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맹수들에게 뜯어먹히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나운
황소의 뿔에 받혀 죽고, 어떤 이들은 사방으로 이끄는 말아아에 묶여 몸이
산산조각 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불에 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황제들중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너무나도 미워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아주 지워버리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밧줄에 매어 달아 온 거리를 끌고 다니게 했으며 모든 뼈
마디가 빠질 때까지 그들의 다리를 잡아 당기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몰수 당했으며 높은 곳에서 강제로 떨어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에 만일 우상을 섬기는 것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당장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순교자가 된다는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는 핍박이 가장 심한 때에도 사람들은 계속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고난받으면서도 평안과 인내로
이겨나가는 것을 보고서 구원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선한
생활을 보고 구원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듣고서 감동을 받아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평양박해와 기독교인 살해비지
 
초기 한국의 교인들이 핍박을 당한데 있어서는 기독교신앙과 고래의 조
상숭배 관습과의 상충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기독
교인들은 비밀히 세례를 받고나서 가족들에게도 잘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제사를 거부하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
나곤 하였다. 선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신분이 드러나면 생명의 위험마저
뒤따를 것을 염려하여 중국으로 피난시켜 공부하게 하자는 안도 대두 되
었다. (E.A.Lawrance,Missions in Korea,The Gospel in All Lands for
Gune, 1887, p274)
주민들로부터 전도인들이 매를 맞거나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은 자주
발생하였다. 기독교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서양풍에 물든 사람이요 한국
인의 얼을 잃은 자라 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보다더 부당한 박해는 무조건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권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또는 일종의 착취의 방법으로 기독교인을 괴롭히는 행동이었다.
1894년 4월 7일 평양에서 장로교의 한석진과 감리교의 김창식의 두 전도
인이 투옥되는 봉변이 발생하였다.그날은 바로 수요일이었다.



삼일기도회
를 드리고 있는 포교들이 들어닥쳐 한석진,김창식,송린서,최치량,신상호,
우지룡 등 여러사람을 결박하여 잡아갔다.민병석,평안감사는 [하늘을 향
하여 주먹질을 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한석진
전도인은 반대로 평안감사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그의 비행을 꾸짖었다.
민 감사는 대노격분하여 한석진을 사형에 처하라고 엄명하였다. (마펫 선
교사의 한국 선교 50주년기념식 연설문 내용)


사태의 위급을 느낀 마펫 목사와 홀(W.G.Hall) 선교사는 급거 상경하여
영.미 양국 공사를 통해 외아문에 교섭하여 석방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
기는 하였다. 그러나 민 감사는 이에 강경히 불응하였다. 미국공사는 고
종 국왕에게 직접 구명을 아뢰었다.


고종은 [내가 허락하는 것을 그대가 어찌 금하는가] 라는 어명을 감사
에게 내려 한석진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 사건이 있은후 평
양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중앙정부의 옹호를 받은 결과가 되어 전도의 문
은 널리 개방되었다.


1900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터질뻔하였다. 그 내용인즉 서울에 전차가 부설되었는데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장원경 이용익이 전차가 운행 되면 한국의 재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시민들에게 타지못하게명 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미국인이 고종 국왕에게 사정을 주달하여 두사 람은 크게 꾸중을 들었다.
원한을 품은 두 사람은 박멸을 계획하여 12월 1일에 모든 선교사와 기 독교인을 일제히 살해하라는 비지를 각도에 시달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해주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이 절박한 소식을 알게 되어 즉각 소식을 라틴어로 에비슨(D.R. Avison) 선교사에게 알려주었다.
알렌은 지체하지 않고 고종을 알현 하였으며, 이에 국왕께서는 외인과교 도들을 일체가해해서는 안된다고 칙전을 사방에 급발하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혹화를 아슬아슬하게 면할수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교회에 대한 박해사건은 장소와 시일을 달리하여 계속적으로 일어나기 는 하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의 국부적인 문제이었고 전체적인 문제로 등 장하지는 아니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유언
 
1938년부터 일본은 한국교회의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자기네들의 신 인 천조대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를 반대하는 주의 종들과 교인들은 속속 검거투옥 되었다.

그 중에 제일인자가 평양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님이었다.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
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 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 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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