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치 예화모음 17편

by 【고동엽】 2023. 4. 7.

 

목록가기
 
 

 

 

 

그리스도인의 사치
 
사치가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99.6.21 자 타임지는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의 장문의 논문을 게재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너무 일찍 경제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 주요 강조점이었다. 최근에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던 사람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천만원 대의 호랑이 무뉘 밍크 코트를 입었다니, 사주었다니, 대납을 요구했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치라는 어리석음의 대열에 그리스도인들도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현실이다.사실이다. 그러면 "사치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모순임을 증명해 보자.

1. 사치의 심리
사치는 일종의 보상심리이다. 내적인 공허감과 무의미감의 보상으로써 외적인 사치를 추구한다. 고급 의류의 50% 이상은 유흥가의 여성에게로 팔린다는 통계가 있다. 자신의 천박과 무가치함을 보석과 고급 옷으로 위장하려는 것이다. 이들의 심리나 사치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동일하다. 사치란 내적 수치감에 대한 위장인 것이다.

2. 사치 문화
사치 문화는 목적 상실의 문화이다. 푯대가 없는 사람이 가는 마지막 길이 사치인 것이다. 보통 목욕탕 문화와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 망조가 깃든다고 한다. 로마에는 8종류의 목욕탕이 있었고, 많은 음식을 맛보기 위해 먹은 것을 토하게 만드는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사치 문화가 횡행한다는 말은 그 사회에 희망이 없고, 목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 다시 말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엄청난 소망에 휩싸인다는 말이다. 성령의 사람은 세속의 사치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사치하는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소망을 어찌 양립할 수 있겠는가? 사치하는 자, 그는 소망이 없는 목적 상실의 방황자일 뿐이다.

3. 그리스도인 문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뚜렷한 목적이 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존재들"이다(빌3:14).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사치 문화가 아니라 "단순한 삶"(simple life)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체중을 줄여야 일할 수 있다. 성2도의 목표는 "성장"이지 "비만"이 아니다.

4.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리스도인은 목적없이 방황하는 세상사람들과 같이 사치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한 삶을 통해 일하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맡은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사치에는 심판이 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5)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의 범죄가 사치였음을 잊지말자! 사치에는 심판이 있다.
수천만원 대의 밍크 코트 입고, 회개의 기도를 하겠다고 기도원에 

 

 

 
 
 

 

 

절약하라
 
잠20:13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貧窮)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

'존 모레'(영국부호)가 밤에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왔습니다.그는 두 개의 촛불 중 하나를 급히 껐습니다. 할머니는 학교를 위해 기부금을 얻고자 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색해서 초가 타게 될까봐 불을 끄는 사람이 돈을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학교재정상황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선뜻 "할 수 있는데까지 돕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얼마를 도와주시겠습니까?" 하자 조금후"5만$로 할까요"했습니다. 그 액수는 당시에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 왔을 때 촛불 하나를 끄는 것을 보고 기대치 못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존모레는 "이런 촛불 하나의 절약이 5만$을 기증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고 답했습니다. 참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물질을 가지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검소하게 살면서 물질을 의로운 곳에 선용하는 복 있는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화 사치 결혼
 
고전 14:40

지난해 10월 결혼한 K(29.서울사당동)씨는 결혼을 앞두고 예단 때문에 며칠 동안 고심했다. K씨의 부모도 처음 치르는 혼례여서 어느 정도를 해야 하는지 친지들에게 물어 보아야 했다. “
요즘엔 대개 현금으로 보낸다는 귀뜀이었어요. 하지만 얼마를 보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시댁에서도 신경을 쓰는 눈치고 친정 체면도 있고 해서 부족하지 않게 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고민 끝에 K씨가 결정한 예단금액은 전체 걸혼비용 7,000만원의 17% 정도인 1,200만원. 예단비용이 늘어 전체 결혼비용도 많아졌다.


얼마후 시댁에서도 700만원을 보내 왔다. “요즘은 대개 남자와 여자 집안이 5대3 비율로 예단금액을 정한다고 해요. 같은 해 결혼한 친구들 보다 많은 지출을 했지만 시어머니 밍크코트를 빠뜨려 결국 싫은 소리를 듣고 말았어요.”

최근 저축추진 중앙위원회가 결혼한지 1년 미만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혼비용 지출실태 및 의식조사’ 결과는 결혼비용을 둘러싼 예비 부부들의 고민을 잘 보여 주었다. 전체의 50.5%가 ‘결혼비용이 가계에 부담이 됐다’고 응답했고 ‘당초보다 초과지출 했다’는 사람도 42%에 달했다.



또 부족한 비용마련을 위해 돈을 빌린 사람도 15.3%나 됐다. 초과지출 이유로는 23.5%가 ‘준비과정에서의 욕심’, 8.8%가 ‘주위의 이목 및 사회적 관습’을 들어 3명중 1명이 비합리적 요인의 초과지출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혼수부족이 결혼 후 갈등을 일으킨다는 인식도 혼수과소비의 한 원인으로 나타났다. 혼수문제로 심적갈등을 겪거나 불편함을 느낀 사람도 전체의 36.9%나 됐다.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중의 하나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적당하게 하고 빚을지지 않는 범위내에서 해야한다. 그리고 남의 이목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치는 죄이다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데"

신발 6천 켤레를 하루에 한 번씩 신으려면 약 17년이 걸립니다. 1주일에 한번씩 신으면 1백20년이 걸립니다.

 마르코스의 궁전에서 발견된 이멜다의 구두는 인간의 허영과 사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한 양장점에서 보내온 청구서에는 옷 여섯벌에 11만달러가 적혀 있었습니다.


도가 지나치면 사람은 눈멀고 어리석게 됩니다.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알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습니다.


공직을 돈 버는 자리로 생각하면 그것은 국가의 불행입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채는 어찌할까.
 검소한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도 검소한 삶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치가 극에 달한 여자
 
아르헨티나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들을 무조건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람들이 좋은 것을 살 때마다 그녀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텔레비젼을 구입하고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집 사람에게 지붕 위에 있는, 저 나무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장 텔레비젼을 사고 싶은 욕구가 충동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빚이 산더미 같으니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소."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또 다른 이웃이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설치 했습니다. 이제 주위에 텔레비젼이 없는 집은 그녀의 집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리접으로 가서 안테나만 사서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텔레비젼 수상기는 사지 못했습니다. 수상기는 없었지만 안테나만 꽂아도 그녀의 마음은 좀 가라앉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텔레비젼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著<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中에서-


안테나는 신앙 생활의 외적인 것들입니다. 즉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측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아무리 엄격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수상기 없는 안테나 교인일 뿐입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계명을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우리는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까? 
 

 

 

 

 
 
 

 

 

일본 여성의 사치
 
자신의 몸치장에 일본 여성만큼 공을 들이는 여성은 없을 정도다.
일본 여자들은 치장에 돈을 참으로 많이 쓴다. 여자들의 장신구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현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들고 있는 백은 루이비통에 시계는 롤렉스 아니면 샤넬, 카르티에다.물론 일본인들이 루이비통 헨드백이라면 사족을 못쓰고,또 돼먹지 못한 프랑스 점원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줄을 서서 그런 물건들을 사는 일본인들을 볼수 있지만 정말로 일본인들의 일류 상품을 향한 열정은 사람을 당혹케 할 정도라고 한다. 해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일본에 들르는 루이비통 본사의 부사장은 전 세계 루이비통 가방의 65%가 바로 일본 시장에서 팔리고 있음을 밝힌바가 있다.


그런 물건들을 구입하는 여자들이 대단한 부잣집 따님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보통 직장의 여자 사무원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참으로 기이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달치 월급쯤 되는 롤렉스 시계를 차고 세린느 스카프를 두르고 반달치 월급은 되고도 남는 루이비통 헨드백을 들고 다닌다. 아마도 세계의 명품을 한 자리에서 모조리 볼 수 있는 장소는 일본의 백화점과 면세점 또는 일본의 지하철일 것이다.


그 아가씨들은 한달에 2만 엔씩 48개월 할부로 산다고 한다. 물론 화장품도 백화점 카드를 이용해 몇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 월급이 모조리 월부와 카드 대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치장 비용으로 나가버린다.
멋내는 돈을 버느라고 한달 내내 또 고생을 한다. 그러  일본 아가씨들의 차림새는 그들이 그토록 얽메여 있는 루이비통 헨드백처럼 모두 같은 스타일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몸에 착 달라붙은 보디 콘셔스 라인의 미니 스커트,그리고 하이힐.일본의 거리에서 하루종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아가씨들이다.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옷만 다를 뿐 하고 다니는 차림새는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비싸게 주고 샀다는 자기 만족과 그 비싼 물건을 몸에 휘감으로서 만족하고 멋쟁이 대열에 끼었다고 생각하는 일본 여성만의 독특한 멋내기다.
명품을 몸에 지니고 귀족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고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귀족과 같은 품위와 고상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 멋내는 것을 보면 속은 다 낡고 구멍난 속옷을 입었을 망정 겉만 화려하고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요즘 형형 색색 에쁜 모양의 속옷 선전이 텔레비젼에서 자주 나오는가 보다. 속부터 멋쟁이가 되라고....... 

 

 

 

 
 
 

 

 

허영
 
제이콤이라는 작가가 쓴 [원숭이 손]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영국인 노동자가 여러 해 동안 인도에서 일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동안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이상한 물건을 하나 사왔습니다. 그것은 마술사의 주술이 걸려 있는 [원숭이의 손] 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원숭이의 손]을 잡고 자기의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국인 노동자는 이것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한 후 [원숭이 손]을 붙잡고 첫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200파운드의 돈을 다오.”
얼마 안 돼서 낮선 사람이 찾아와서 200파운드의 돈을 주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 돈이 무슨 돈입니까?”


“당신 아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끼어 죽었기에 부의금을 가져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원숭이 손]을 붙잡고
“제발. 내 아들을 돌려주시오”라고 애걸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처참한 유령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고통하는 아들의 유령을 본 그는 마침내 세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 아들을 편히 쉬게 해주시오.”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영국인 노동자, 그는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술사의 주술이 걸린 [원숭이 손]같은 허영과 과욕에 사로잡혀 헤어나올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 손]을 통하여 물질과 명예와 향락, 인기와 장수하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술 걸린 원숭이의 손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술걸린 원숭이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입니다. 

 

 

 

 
 
 

 

 

현시점(現時點)을 모르는 사람들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1911-)씨의 동시(童詩)에 [넉 점 반]이라는 직품이 있다.시계가 귀하던 시절 시간과 동심에 얽힌 이야기를 詩的으로 엮어본 아름다운 글이다.

" 아가가 아가가 가겟집에 가서
할아버지,할아버지
지금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거미 거동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넉 점 반.
아기는 분꽃 따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깍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시의성(時宜性)을 알지 못한 꼬마의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들어 있는 시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시의성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시계는 저녁이 되어도 넉 점 반으로 착각하고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불행은 우리가 살고 았는 현 시점을 바로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 도데체 사치하고 방탕할 때인가?
정신없이 흥청망청할 때인가 말이다. 잘난 사람들의 목소리만 커질 뿐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제는 성직자들가지 현시점을 바로 알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죄를 짓기에 급급하니 예수게서 언제 오실지 사뭇 긴장감이 감돈다.

 

 

 

 

 
 
 

 

 

로마의 역사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 (잠 30:8)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 로마는 안정된 상태에서 문화를 꽃피웠지만, 동시에 이 시대는 사치가 극에 달한 향락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인이 아침에 화장하는 시간이 3시간이었고, 시중드는 하인만도 여섯 명이 넘었답니다.
피부의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팩이 발명된 것도 이때이고, 우유로 목욕을 하기 위해 여행에 젖소떼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이 시절에는 존재했습니다.
 미용식, 미용체조, 일광욕, 마사지 등을 가르치는 전문가가 있었고, 비단으로 된 속옷이 사용되었습니다.


 귀부인들 중에는 값비싼 보석을 몸에 달고 다니다가 황제에게 추방 당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상류층 저택에는 큰 정원과 40개 이상의 방이 있었고, 집에는 수백 명의 하인이 있었고, 침대에 올라갈 때에도 두 명의 하인이 필요했답니다.
그 이유는 구두를 동시에 벗겨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로마 상류층의 사치입니다. 이토록 부유했던 로마가 지금은 사람들이 길에 다니는 것도 두려워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소매치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집시들이 너무 많아서 단속조차 어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그들의 뱃속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결과입니다.
우리 나라를 보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무릎이 꿇어집니다. 이제 IMF를 극복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사치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로마의 역사를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치 선진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그런데 과소비지수는 높아만 간다.보도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해외에 나갔다가 2백만원을 호가하는 양주를 들여와 비난을 받고 있다.
국민적 대각성이 시급하다. 자각(自覺)과 자정(自淨)을 잃은 공동체는 망한다.


 지난 11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은 서울발 보도를 통해 한국인의 소비성향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한국인들은 이제 월풀 냉장고를 찾고 맥도널드 햄버거 맛에 익숙해 있으며 리바이스 청바지를 즐겨 입고 에스테로더 화장품을 애용하며 포드 승용차를 타고 있다』 

 

 

 

 

 
 
 

 

 

호화 사치병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청빈한 생활을 계속했는데, "모든 쾌락과 모든 사치를 물리치라"는 것이 그의 생활 신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말과 마차를 팔고, 장식품과 귀금속을 다 처리했으며, 음식은 나무젓갈로 먹고, 식기는 토기를 썼습니다.

책도 신앙서적 외에는 전부 남에게 나눠 주고, 예배와 봉사, 구제, 은밀한 골방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는 주님의 수난을 생각함으로써 모든 호사스러운 일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따라야 할 것으로, 주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는 모든 크리스천은 사치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엡5:15-21)

사치와 낭비는 망국병입니다. 필요이상 분수를 뛰어넘는 소비는 패망을 가져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은 대부분 근검 절약하려고 애를 쓰지만 일부 돈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몸치장, 집장식에 물쓰듯 돈을 쓰고, 해외골프장, 유흥장을 돌아다니며 고급외제승용차를 타고, 수백 수천만 원짜리 향수니 양주니 옷 등을 구입하고, 퇴폐향락에 빠진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년 소득이 3만 불이 넘는 선진국의 국민들보다 더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많은 외채를 짊어지고 있고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이 있다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고가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외국에서 값비싼 사치품을 많은 외화를 주고 사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물건들을 무엇 때문에 구태여 외국에까지 가서 돈주고 구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호화사치, 과소비풍조는 정부의 책임도 큼니다.
 정치적 의도에서 우리의 위상을 터무니없이 부풀려 놓았습니다. 시장개방이다, 외환규제의 자유화다, 해외부동산 투자 자유화다 해서 헤픈 씀씀이를 조장한 것이 정부입니다. 정부 스스로 대내외적으로 씀씀이가 컸던 것도 일조가 됐습니다.


어쨌든 망국병인 호화사치, 과소비, 퇴폐향락은 자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자세가 올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국제 경쟁 사회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고립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치하는 자는 부자가 되어도 항상 부족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어찌 검소한 자의 가난하나마 여유있음만 하겠습니까?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며(잠19:10),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습니다.(잠11:16)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에 보면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이 등장인물로 나옵니다. 그는 타고난 신분과 막대한 재산으로 마음껏 유랑을 즐기는 전형적 러시아 귀족입니다. 많은 하인을 부리고, 사냥을 즐기며 모스크바의 호화스런 저택에서 흥겨운 파티로 여생을 보내는 노신사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입성이 임박해지자 여러 대의 마차에 각종 호화 가재 도구를 산더미 같이 싣고 피난을 가려 합니다.

 그러나 외동딸 나타샤의 간청에 그만 감동되어 모든 가구들을 내려 팽개치고, 거기에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부상한 군인들을 태웁니다. 이것은 귀족과 평민의 만남이며, 부자와 가난한 자의 한데 어우러짐입니다. 이처럼 가슴 뭉클한 동족 사랑과 인류애의 실천이야 말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톨스토이의 사상과 간절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이러한 외침에 러시아의 황실과 귀족들이 가슴을 치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치와 방종생활 때문에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짓눌리고 소외당했던 빈민계층들이 일단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자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여 혁명의 주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큰 죄악 중 아모스선지자가 지적한 것은 그들의 안일과 사치와 계급적인 빈부의 격차와 학대, 도덕적인 부패 등 이었고 이를 탄식하고 슬퍼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였으나, 사회전반에 사치향락과 뇌물거래가 확산되고 이기주의와 한탕주의가 만연됨으로 발전과 풍요의 과정 속에서 소리없이 봉사하고 헌신한 계층과 신음하는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 무책임 풍조와 함께 사치와 향락을 일 삼을 때 그 결과가 어찌되겠습니까? 행복을 사치한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햇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1-5),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6:25)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그가 마음에 말히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계18:7-10) 

 

 

 

 
 
 

 

 

과소비 독소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안하고 살 수 없다.그러나 과소비는 생활을 망치는 독소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허영이 가득하고 돈을 마구 쓰는 제자 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사실여부를 물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라며 건방진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제논은 엄한 목소리로 야단 쳤다.


『그러면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에 소금을 마구 집어넣어도 된다는 말인가?』 

 

 

 

 
 
 

 

 

향락과 파멸
 
막가는 사회의 자화상인가.
「막가파」의 극악한 살인은 물질과 향락의 가치를 광신하는 현대의 추악한 단면을 보여준다.
술 소비량이 연간 2조원에 달하는 「막가는 구조」가 『화끈하게 살다가 멋있게 죽겠다』는 「흉기들의 서식지」를 만들어 주었다.
향락이라는 사교에 대한 광신은 파멸을 낳는다.
그 전에 우리 사회는 불의에서 돌이켜야 한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예레미야17:11) 

 

 

 

 
 
 

 

 

터키 황제 궁의 보석
 
13세기 때 전 유럽을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던 터키는 불가사의한 국가였다.오늘날 터키의 옛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보스보라스 해협연안의 오사스러운 수많은 궁전들은 옛날의 부와 사치를 그대로 전해 준다.
전통적으로 터키 황제들은 전대의 황제가 기거했던 궁전을 다음대의 황제가 사용할 수 없었던 이유로 궁전들을 많이 지었다.

그 중 가장 호사스런 궁전은 술탄 아부스 루하미트 2세에 궁전으로 보스보라스 해협의 언덕에 있다.

이 궁전 정원에는 진기한 식물과 동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루하미트 황제를 재방했다. 페르시아의 왕은 보석으로 치장된 예복을 입고 터키 황제의 기를 꺾으려고 하였다.

터키 황제는 보석 옷을 입은 페르시아 왕을 별실로 안내하였다.

 그른 그곳으로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별실로 들어간 페르시아 왕은 그 자리에서 놀랐다.

실내가 온통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때마침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온 방안에 가득하여 자신의 어줍잖은 보석 예복은 상대가 되질 않는 것이었다.

 이후로 페르시아 왕은 터키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 보석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심각한 과소비
 
미 뉴스위크지는 한국인은 너무 일찍 부자(富者) 행사를 한다고 꼬집었다.
골프장이 급증하고 회를 먹어도 외국의 회를 먹고 차를 타도 외제차를 타며 해외 나들이 하는데 돈을 펑펑 쓰는데 외국 관광객의 2배나 쓴다고 보도하였다.
뉴스위크지는 한국인들이 쇼핑을 통해 강남의 한 백화점의 경우 한 개에 140만원인 어린이용 침대와 330만원짜리 외제 골프세트와 심지어 50만원짜리 팬티가 팔리고 있다고 하였다. 

 

 

 

 

 
 
 

 

 

금욕인가, 낭비인가?
 
어느 날 윕스네이드 동물원에서 젊은 사람들 몇이 간식을 뭘로 먹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아이스크림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나중에 설명을 듣고 알았지만, 우리가 돈의 청지기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돈을 적게 써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생각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방종이고 사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야.
 이 사람들이 돈을 쓰는 태도는 아직도 세상적이야. 이 부분의 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저렇게 눈이 멀어 잇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 물론 우리 중에는 이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그룹에는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돌아와, 성경 교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 나이 지긋한 성도가 있었다.

그 사람은 성직자들이 즐겨 쓰는 모자를 뒤로 돌려 쓰고는 종이에 묻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아주 즐겁게 그러면서도 품위에 전혀 손상이 가지 않게 핥아 먹고 있었다.
이 사람 역시 훈련이 안된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의 검소한 가정 생활과 어려운 경제 형편도 약간은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날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셨다는 사실을(딤전 6:17) 보여준 것이며,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한 것이다.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훈련만 너무 내세우다 보면 인색하여 지갑을 열 때, 아까워하고 잔돈까지 일일이 세면서 두 손을 펼 줄 모르는 마음이 옹졸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놀라우신 부요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후한 대접의 필요성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낭비와 허세에 빠져 남에게 베푼다는 미명하에 은근히 방종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수한 동기와 즐겁고 기쁜 마음을 주사, 우리로 남에게 줄 수 잇고 또 계속해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신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 때문이다(행 20:35). 

 

 

 

 

 
 
 

 

 

희대의 패륜아! 고려 제 28대 충혜왕(忠惠王)
 
(1315 ~ 1344, 재위기간 : 1330년 2월~1332년 2월, 1339년 3월 복위~1344년 1월 <6년 10개월>)



  忠肅王(1294년~1339년)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다.(31대 공민왕과는 친형제간 이다) 1328년 정월에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 2월 병약해지고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고려 제 28대 왕에 올랐으니 그때가 16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배전이나 주주 등 측근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즉위 후 6일 동안 사냥이나 씨름을 하며 노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를 뒤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몸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몰지각한 행동 때문에 그는 '발파(潑波, 무뢰한)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한번은 왕위에 오른 충혜왕이 연경에서 원나라 관서왕의 장녀 덕령공주와 결혼하고 귀국할 때, 황주에 이르러 원나라로 가는 부왕을 만났는데, 여기서 부왕 충숙왕에게 몽고식 배알(胡禮)을 했는데, '너는 부모가 다 고려 사람인데 너는 어째서 호례를 행하느냐? 게다가 너의 의관은 너무 사치스럽구나.갈아 입어라'라고 충숙왕이 꾸짖을 정도로 부왕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자주해서 했다. 본성이 경박하고 수렵이나 격구, 주색에 빠져 지내는 것을 좋아했던 충혜왕은 귀국 후에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유희나 사냥만을 일삼았고 마참내 그의 실정은 곧 원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원의 문종은 곧 충숙왕을 복위시키기로 결정하여 1332년 2월 장백상 등을 보내 충혜왕으로부터 국왕인을 회수하게 했다. 이로써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채 못 되어 폐위된 충혜왕은 다시 원나라로 건너가게 되었다.




  충숙왕은 복위된 뒤로도 1년 이상이나 연경에 더 머물다가 원나라의 재촉으로 새 왕비 경화공주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 뒤로 충숙왕은 6년간 더 왕위에 머물렀지만 전국을 유람하며 사냥한 일 외에는 별로 한 일도 없이 충숙 복위 8년(1339)3월에 세상을 떠났다. 충혜왕은 폐위되어 원나라로 건너간 뒤에도 여전히 군소배와 어울려 주색을 일삼다가 그만 승상인 빠이앤(백안)의 미움을 사 1336년 12월에 본국으로 송환되어 왔다. 왕실이나 국가 체면이 크게 손상된 일이었으나 충혜왕은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황음을 일삼고 난폭해져만 갔다.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을 항상 못마당하게 여기며 날건달이라고 불렀으나 죽음에 임박하자 장남인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통보를 받은 원나라 승상 백안 등은 충혜왕이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심양왕[瀋陽王.중국 원(元)나라가 고려 사람에게 준 봉작(封爵)]]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 때문에 고려는 1339년 3월 충숙왕 사후에도 몇 달 동안 왕이 없는 공위(空位)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충혜왕은 왕위에 오르자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는 역시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 영안궁으로 찾아가서 위로한답시고 연회를 마련한 뒤 술에 취한 척하고 궁궐에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침실을 덮쳤는데, 이 때 공주가 완강히 저항하자 수하들을 시켜 공주의 사지를 묶고 입은 막은 후 강간을 자행했다.
이 일은 나중에 원 왕실에 알려져 충혜왕 폐위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또한 수비 권씨는 강간을 당한 뒤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그 후에 죽었는데 아마도 자살 인 듯 싶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에 대한 강간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내시 유성의 처 인씨가 아름답다 하여 수하 구천우와 강윤충을 데리고 가서 유성에게 술을 먹이고 그 아내를 겁탈하였으며, 자신의 장인 홍탁의 후처 황씨와도 간음하였다. 그런데 충혜왕은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홍탁의 후처 황씨의 임질을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치료토록 하였다. 충혜왕이 이 같은 패륜 행위를 벌이고 있을 때는 아직 원나라로부터 그의 복위가 승인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중하기는 커녕 거의 매일같이 여자들과 어울려 난잡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다. 한때 충숙왕이 어느 선비 가문의 며느리로 있던 남씨라는 여자를 강간하고 노영서라는 심복에게 주었는데, 충혜왕 역시 그녀를 강간하고 노영서에게 돌려 주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같은 충혜왕의 패륜 행위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의주와 정주 고을 사람들은 나라가 소란하다며 짐을 꾸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해 11월에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상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승인하였다. 두린 일행은 개경에 도착하여 경화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냈는데, 이 때 충혜왕이 강간한 사실을 고하였자,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비롯하여, 홍빈, 한첩목아불화, 조운경, 황겸, 백문기, 왕백, 주주, 조영휘, 이안, 한승, 장거재, 배성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실권은 경화공주가 갖게 되어 , 자신을 강간하도록 방조한 찬성사 정천기를 정동성에 가두고 정동성의 관리들을 대폭 교체하였다.




  한편 원나라로 압송된 충혜왕은 1340년 3월에 형부에 갇혔고, 이 때 김인, 김류, 한종유, 홍빈, 이몽가, 이엄, 노영서, 안천길, 손수경, 윤원우, 남궁 신 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그해 3월에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인 출신 여자 기씨를 제 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는 기철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나라에서 돌아온 충혜왕은 이전과 다름없이 음행을 일삼음으로 정사를 어지럽혔다. 얼마나 음행을 좋아했던지 야간에 변장하여 주색을 즐기다가 불량배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였다. 1341년에는 왕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으로 하여금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데려오던 중에 그녀와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왕이 직접 두 사람을 때려죽였다. 또 그 해 11월에는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갔다가 그의 처 이씨를 강간하였으며, 그 며칠 뒤에는 자기가 때려 죽인 박이라적의 처를 역시 강간하였다. 이외에도 충혜왕은 임홍보의 시비와 간통했으며, 재상 배전이 원나라 사신으로 가고 없는 사이에 배전의 처와 그의 동생 금오의 처를 강간했다. 또 만호 전찬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고 귀양 보냈다. 이렇게 되자 거리의 불량배 3명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부 공보의 처를 강간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기록된 강간 사건만 해도 이와 같은데 기록되지 않은 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였을 것이다.




   충혜왕의 행동은 단순히 이러한 음탕한 행위에만 그치지 않았으며,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사냥과 수박희를 즐기는가 하면, 민가의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들을 강제부역에 동원하는 바람에 원성이 끊일 날이 없었다. 1343년 3월의 어느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횃불이 옮겨붙어 누각을 태운 일이 있고, 그 다음날에는 자신의 연회장을 만들기 위하여 민가 백여 채를 철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충혜왕은 삼현 지방에 새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몸소 공사 감독까지 하여 밤낮으로 독촉을 해댔다. 궁궐의 문을 놋으로 장식하기 위해 백관 이하 서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놋을 바치게 했으며 각 도에서 솥과 농기구를 마구 거두어들여 백성의 피해 또한 막심했다.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여 단청을 하였는데, 이 때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데 기한을 늦추면 그 벌로 몇 곱의 값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 하였다.




  충혜왕의 학정이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한 현효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충혜왕은 1343년 10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신축한 신궁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그 신궁 생활도 채 한 달도 가지 못했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기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과 대사령을 반포하라는 워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댔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 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있던 좌우사 낭장 김영후, 만호 강호례, 밀직부사 최안우, 응양군 김선장 등은 창에 맞았으며, 지평 노준경과 사병 두 명이 피살되었다.


  충혜왕이 압송된 뒤 기철, 홍빈, 채하중 등이 정사를 처결하며 은천옹주를 비롯한 충혜왕의 애첩 및 궁인 126명을 궁궐에서 추방하였다. 충혜왕이 끌려가자 고려에서는 언양군 김윤(김취려의 종손)으로 하여금 용서를 구하는 글을 중서성으로 보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마침내 원나라 순제는 1343년 12월에 충혜왕을 독충이 우글거리는 남만 땅 계양현으로 귀양보냈는데, 한사람의 시종도 없이 유배지로 향하다가 이듬해 1월 15일 악양현에서 급사했는데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때가 그의 나이가 30세였다. 그의 죽음이 고려에 알려지니 백성들은 기뻐했다고 한다. 충혜왕의 시신은 1344년 6월에 개경에 도착하였으며, 그 해 8월에 영릉에 장사 지냈다.






  충혜왕의 경제적인 부분은 그리 많치 않으나 살펴보면, 1331년(충혜왕 1) 종래 사용하던 은병(銀甁)의 사용을 금하고 5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도록 했으며, 5도에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했다가 폐지하기도 했다. 1342년에는 의성창(義成倉)·덕천고(德泉庫)·보흥고(寶興庫)의 포 4만 8,000필을 내어 시장에 점포를 열었다. 1343년에는 내고(內庫)의 물화를 원나라로 가지고 가서 판매하게 하는 등의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았으며,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보흥고에 속하게 하고 좋은 말로 내구(內廐)를 채우기도 했었다.

 

 

 
 
 

 

 

 

 

'〓주제별 설교〓 > 설교.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젼 예화모음 30편  (0) 2023.04.07
사망 예화모음 7편  (0) 2023.04.07
사회 예화모음  (0) 2023.04.07
상담 예화모음 31편  (0) 2023.04.07
상처 예화모음 4편  (0) 2023.04.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