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17 주일 설교(시편 강해 23)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시 22:1-31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우리는 지금 무신론이 상식이요 교양인 것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0년 전부터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무신론은 급기야 2009년 초 영국 런던에서 대중버스에 [THERE I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란 도발적인 광고가 붙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광고가 이상한 것은 왜 하나님 때문에 삶을 즐기지 못한다고 했을까? 도대체 무슨 즐거움을 말하는가? 궁금합니다. 하여튼 무신론이 대세인 시대를 살면서 꼭 읽어 보도록 추천해 드리고 싶은 책이 하나 출간되었습니다.
랜디 알콘이 쓴 [악의 문제 바로 알기]입니다.
이 책 속에 바트 어만이란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회심하였고, YFC 활동도 하였고,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에 다녔고 휘튼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약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엉터리임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바트 어만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랜디 알콘은 이 처럼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세상에 불의한 일이 많이 일어나며 죄없는 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데 있음을 지적합니다. 바트 어만 처럼 하나님을 믿던 그리스도인들 조차 이런 고난을 당하면‘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휘청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악과 고난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면 오히려 하나님을 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고난은 참 신비한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여부는 고난을 당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성령님이 마음에 계신 사람과 성령님이 계시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 다릅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너무나 고통스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고통을 정리하면 세 가지 입니다.
하나는 고난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나 의심이 될 정도라는 것입니다.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둘째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2절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겪어 본 사람은 다 알지만 고통 보다 더 힘든 것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잘 믿는다고 소문이 났는데, 고난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6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다윗이 고통으로 탄식하면서도 계속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탄식하는 것 같다가 다시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다시 찬양하고 결국은 찬양으로 마칩니다.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다윗과 함께 하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시편 22편을 읽을 때, 생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겪으셨던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밤이 맟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7-8절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14절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
다윗의 이 표현은 실제가 아니라 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대로 다 겪으셨습니다.
15절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16절 …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 예수님이 그대로 겪으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고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고난 당하는 것을 잊으신 것도,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계속하여 찬송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신 성령님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8-11절에 분명히 언급해 주셨습니다.
(새번역) 벧전 1:8-1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 구원을 자세히 살피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누구에게 또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그들이 연구할 때에,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영이 그리스도에게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드러내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님께서 다윗에게 역사하셔서 고난 중에도 찬송하게 하신 것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의 11살 된 누이까지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엄청난 시련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어떻게가 아니라 누구로 인해 그 시련을 견뎠는지 물어야죠."
그렇습니다. 성령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트 어만과 같은 무신론자들은 이유없는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믿는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병이 듭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중상과 모략을 당해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지난 1,900년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매년2만명 이상의 크리스천이 처형되고 수백만명이 감옥에서 갇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갑니다. 고난 중에 오히려 더욱 믿음이 커지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함께 하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1977년 중국 공산당이 공식으로 대담한 선언을 하였습니다.‘우리는 종교가 미신이고 혁명을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중국에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늙었다. 이제 그들은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 기독교는 끝날 것이다.’그런데 오늘날 중국의 기독교인은 매일 2만5천명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 힘들어할 때,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십니다.
다윗도 안타까와 하면서도 주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11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9절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금요성령집회 후 안수기도 시간에 한 남자 성도가 왔습니다. 기도 카드에 “불의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죽음 가운데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그 때 왜 저를 온전히 지켜주시지 않으셨는지, 원망의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해주세요. 기쁨과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세요.”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정말 간절히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할 때,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사랑하는 딸을 먼저 천국에 보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일년 반 뒤 쯤인 듯하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갑자기 죽은 딸이 생각나서 한없이 울었었다. 그 날은 종일 울었고 그 주간은 매일 울었었다. 그 날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단다. ‘마음이 괴롭지. 네 딸이 잊혀지지 않지?’ ‘네, 하나님.’ ‘이제 내 마음을 알겠니?’ 당황하였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 ‘나도 십자가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단다.’ 이 목사님은 그제서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고 했습니다.
사람들은“하나님은 왜 악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 대답이 십자가입니다.
존 스토트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본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불상 앞에 서니 경외감이 들더랍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세상의 번뇌에 대하여 초연한 표정을 지은 부처상을 보면서 불현듯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였답니다. 외롭고 뒤틀리고 처절한 고문을 당하신 분,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옷은 찢어지고 사지는 비틀어지고, 이마에는 가시가 찔러 피가 흐르고, 입술은 말라 갈증을 견딜 수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을 알면 무엇이 복인지, 저주인지 달리 보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부귀영화 다 누리다가 이 세상 떠나게 될 때 가서야 지옥 문이 내려다 보이니까 안 죽으려고 악을 쓰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고생했어도 천당 문이 환히 열리고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광화문 광장 큰 빌딩에 장석주 시인의 시 하나가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도 태풍을 맞고 천둥, 벼락을 맞고, 서리를 맞고 땡볕을 맞으면서 맺어진다면 천국 백성인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존 패튼(John G. Paton)선교사는 남태평양 뉴 헤브리디스 군도에서 사역했습니다. 그가 갔던 곳은 25년 전, 원주민들이 그곳에 처음으로 찾아간 두 선교사가 해변에 상륙한 지 15분 만에 방망이로 쳐죽이고 요리해 먹었던 곳입니다. 그 후 25년 동안 아무도 그 군도를 찾지 않았었는데, 유망한 젊은 스코틀랜드 목사 패튼이 그곳을 가기로 결심을 했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이 무모한 짓이라고 말렸습니다. 그 중에 디킨스라는 노신사가 그를 불 때마다 ‘식인종들이야, 식인종들한테 먹힐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참다 못한 패튼 목사는 ‘디킨슨씨 저보다 나이가 몇 년 더 많으시죠? 그러니까 저보다 더 빨리 무덤에 누우실 것입니다. 그러면 디키스씨의 몸은 벌레들에게 먹힐 것 아닙니까? 잘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높이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식인종들에게 먹히든 벌레들에게 먹히든 무슨 상관인가요?. 어차피 최후 심판의 날 내 몸이 부활하신 우리 구세주처럼 깨끗하게 부활할텐데 말이예요.’ 패튼은 뉴 헤브리디스 군도에서 43년을 살며 온갖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내와 자녀를 땅에 묻었고 무서운 질병과 난파, 친구들과 개심자들의 배신, 동료들의 순교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군도 전체가 변화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잊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고통 속 에서 부르짖는 신음소리를 듣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까?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당키가 어렵습니까? 그럴수록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미국 코스타에서 김요한선교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터키 선교사로 있을 때, 전도하다가 경찰에 여러 번, 붙잡혀 끌려가서 고문을 너무 혹독하게 당하여 기억력 상실 증상까지 생기신 분입니다. 어느 날, 전도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끌려가는데 다시 고문을 당할 생각을 하니 솔직히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 때, 히브리서 12장 2-3절 말씀이 생각나더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통곡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후 영국에서 잠시 터키인 교회 담임을 하게 되었는데, 영국인 목사가 자기를 소개하는데, 감옥에 여러 번 투옥되고 고문당했던 일을 굳이 소개하더랍니다. 전과자라는 느낌이 들어 속으로 불쾌하였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 터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경찰서나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문과 비참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고통을 자기들 못지 않게 겪은 목사가 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정말 덩치가 산만한 터키 남자 성도가 상담하다가 터키에서 고문당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찢겨지던 때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은 아시지요?” 였답니다. 그러면 해줄 말은 단 하나였답니다. “제가 알지요.” “저도 다 알아요.” 그러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터키에서 겪었던 끔찍한 고문에 대하여 이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성령님으로 충만한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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