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1 주일 설교
가정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올해 5월은 가정에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을 주제로 한 설교가 참 어렵습니다.
어떤 젊은 목사가 결혼하기 전에는 "자녀 양육의 법칙"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았을 때, 설교 제목을 "자녀 양육을 위한 제안"으로 바꾸었다.
자녀들이 자라 10대가 되자, 그는 더 이상 그 주제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는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가정의 변화를 가져올 주님의 말씀을 전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욱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죄만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짓게 만드는 옛 사람도 함께 지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놀라운 것은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데, 우리의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죄사함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났으니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놀라운 변화는 가정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가족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가정 안에서 좌절이 큽니다.
가정 밖에서는 잘합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려고 욕먹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잘 하는 것 이상으로,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잘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만큼,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자신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분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었다.’ 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교회에는 다니지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은 애매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안 죽었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안 죽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 알아도 진리를 결론삼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제부터 가족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변화되라고 요구하지 말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바로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분명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어느 남자 권사님께서 “나는 죽는데 그 자식들이 안 죽잖아요!”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진정 구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도 살고 가족도 다 살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 중심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단어라 할지라도 반복해서 20번만 외우면 자기 것이 됩니다. 그때 뒤에서 순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수.철수.철수.철수.
부부 행복의 원칙인 ‘순종 아내, 사랑 남편’도 자아가 죽지 않으면 더 심각한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서로 기대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이 문제 덩어리,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 자신을 정확히 보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내만 보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지 자신은 보지 않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는 우리 자신을 보는 거울입니다.
제게 가족이 없었다면 저는 저를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한번도“어머니 사랑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한 마디 못했을까? 후회스럽습니다
저는 아내에게도 “사랑한다.”말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기도하고, 연습하고, 결심하고 또 기도하고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겉으로만 온유한 자지 실제로는 얼마나 굳은 사람인지를 깨닫는 계기였습니다.
제 딸이 중학교 1학년 때,“아빠 나 다른 교회 다니면 안되요?”하여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가족들을 통하여 비로서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 자아는 근본적으로 죄덩어리요 이기적입니다.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하여 화가 날 때, '나는 이런 정도에 화를 내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불만일 때, '나는 이런 문제로 불평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화내고 불만을 자긴 내가 죽고 없으면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만족시켜 줘,” “나를 인정해 줘.” “나를 행복하게 해 줘.” 하는 여러분 자신이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더욱 여러분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서 우리는 “나는 죽었습니다.” 하는 것이 복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죽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노력으로 죽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고백하는 것 뿐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자신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나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 인생 전체를 새롭게 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한 부인이 암 수술을 받고, 회복되고 나니, 아이들 도시락 싸는 일, 남편 출근을 돕는 일이 그렇게 행복한 일임을 깨달았답니다. 가정 일이 많으냐 적으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죽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꼭 죽을 때 가서야 이런 일이 이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자녀를 가르칠 때, 예수님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부모 자신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라고 질책하고 꾸중하였더니, 자녀가 더 무너졌습니다. 그 아이도 스스로 잘 해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칠 수 있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국 초대교회 유명한 목사님이신 길선주 목사님의 아들은 술주정뱅이에, 망나니였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이 장로님일 때, 아들을 볼 때마다 야단을 쳤습니다. 안타까우니, 아버지 사랑으로 책망을 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들은 더 빗나가는 것입니다. 한번은 미국 선교사님께서 그런 길선주 장로에게“아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보세요.”하고 권면했습니다. 길장로님은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안타까움, 노여움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100일 동안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의 눈으로 보였습니다. 술주정뱅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더욱 축복하고 선포하였습니다. 100일 기도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회에 그 아들이 술이 취하여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 날 이후, 그 아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 우리 가족 고쳐달라.”고 하지 말고 그저 여러분 자신이 “죽었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고백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 역사의 첫 단계입니다!
열심이 산다고 가정이 은혜로와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고 또 실망하는 것입니다. “안돼요. 힘들어요. 못하겠어요.” 하지 말고 “이제 저는 죽었습니다.”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하는데 예수님이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지 아닌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남편에게 불만이신 분,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행복하겠습니까?” “나는 죽었습니다.”가 결론이 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남편이라도 불만일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불만이신 분, “예수님이 부모님이라면 효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정에 사시면 편안하겠습니까? 불편하겠습니까?
가정의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력해도 안되는데, 노력마저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고민하여, 가정이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발짝도 못 움직이고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노력하지 말고, 그 대신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 맡깁니다.”
염려가 됩니까? 너무 쉬워서 너무 간단해서 믿어지지 않고 그러면 잘못될 것 같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까?
제가 처음 주님으로부터‘죽으라.’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죽으라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님이 보시는 저의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저 자신에게는 주의 종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고백이요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하영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불쑥“아빠 아니었으면 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을 거예요.”하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듣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주장들이 귀에 더 옳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를 보니까 아빠는 분명 자기 보다 더 똑똑한 분인 것 같은데, 예수님이 정말 함께 하시는 것을 진짜 믿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계시기는 계신가 보다! 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마음에 확신이 생겼는데, 이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자녀들 중에도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바깥에서는 훌륭한 목사인지 몰라도 집에 함께 사는 자녀의 눈에는 엉터리로 보여 믿음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 때문에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니, 아버지로서 딸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서 늘 미안했는데, 눈물이 핑 돌만큼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딸에게 이런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나는 죽었습니다.” 하고 살아 온 것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결론삼음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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