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비판과 분별의 차이 마7:1, 약4:11
‘교인’은 교회와 자기가 하나 됨을 느끼는 자다.
그래서 혹시나 교회가 잘못 되어가는 것을 보고 들어도...
자기 책임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간혹
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이런 사람은 글쎄 아직 교인이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교인’은
교회가 잘하건 못하건
그게 전부 자기 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기 집안 일은, 대부분 모두가 자기 일로 생각한다.
아버님이 잘 못하면.. 아들도 같이 피해를 당하게 되고
자식이 잘 못해도.. 그것이 부모에게 다 흉이 되고, 허물이 된다.
서로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도
교회 부끄러움=내 부끄러움으로 느끼는 사람은... 교인 맞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게 문제야..’ 하면서
그 문제를 자기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취급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교인’ 아니다.
▶여러분 ‘비판’과 ‘분별’의 차이를 아시는가?
비판은 ... <나는 당신과 달라!> 이런 기반에서 생각하는 것은 ‘비판’이다.
분별은 ... <당신의 잘못은 내 잘못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분별’이다.
부부가 한 몸 된 것은
아내의 잘못은 남편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의 잘못은 아내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진정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부부끼리도 보면
남편이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전혀 별개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고,
아내가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동떨어진 문제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직 미숙해서 서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아직 성경의 원리대로 부부가 아닌 것이다.
......................
◑성경 약4:11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judge 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네가 심판장에 자리에 앉지 말라' 그 뜻이에요.
건강한 비판 자체를 금하거나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금한 것은 사실은 '비난'의 의미로서의 비판입니다.
약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여기서 '판단'은 원어로 '크리노'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말을 할 때, 마치 자기가 최종적 결제권자나 재판장처럼
한 사람에 대해서 '저 인간은 틀렸어!' 하고 완전히 전체 부정을 하는
이런 무모한 태도는 좋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살다보면, 남을 비방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없어요.
남을 헐뜯고 남을 험담하는 이 재미가 굉장히 쏠쏠하다.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여러분 남을 비방하는 건, 습관이 되는 것을 아세요?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그런 죄성을 갖고 있고
그것(비방)만큼, 내 속에 내재된 죄성을 촉발시킬 수 있는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우리가 남을 비난하지 말아야 될 7 가지 이유>를
그의 설교집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죠. 우리가 모든 사실을 다 속속들이 알 수 없잖아요.
2) 사실(팩트)을 다 알 수 없을뿐더러, 우리는 모든 동기를 다 알 수 없어요.
그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돼 있는 동기를, 우리가 다 알 수 있나요. 없죠.
결국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객관성이 없어요.
우선 나부터, 모든 사물을 보거나 누구를 이해할 때,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내 본위로 말하고, 이해하고, 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인간은 굉장히 이타적이지 않습니다. 이기적이이에요.
숭고한 사랑마저도 지독한 이기성이 그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타적인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은데도
특별히 자식사랑 같은 경우에, 그 자식사랑만큼 이타적인 모습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도 자기 자식만 편애적으로 사랑한다든지,
또 자식을 통해서, 자기만족이나 대리만족을 경험하고자 하죠.
순수한 자식사랑 마저도 그렇게 이용될 수가 있다는 그 뜻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4) 인간의 인식 세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셨어요.
저 사람한테는 무슨 주제를 집어넣도 세모꼴로 나와요.
그런데 이쪽 사람한테는 무슨 주제를 집어넣도 동그랗게 나와요. 왜 그럴까요?
틀이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때
그 사람의 내면의 틀이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두 사람의 틀이 달라서 그래요. 그게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향해서 쉽게 '그가 틀렸다/ 맞았다' 단정하는 것은 조금 어리석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식세계가 제한적이에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죠.
5) 우리는 볼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그저 자기가 보는 경험의 세계를 토대로, 사실은 말하는 것 뿐이죠.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코끼리 만지는 시험을 했는데
다섯 명이 만지고 와서는,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더냐 물어보니까
각자의 설명이 다 달랐다는 얘기가 있죠.
우리 각자의 경험의 세계가 각자 다 다릅니다.
근데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것만 토대로, 인간은 판단하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6) 사람은 기본이 편견적일 수밖에 없어요.
사람의 모든 정신 구조가 편견에 붙잡혀 있습니다.
7) 사람은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는 거죠.
자기의 견해나 판단이, 나중에 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판해서 안 되는, 더 근본적인,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마18:23~35절은, 우리가 잘 아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1) 우리는 모두 내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허물을 용서받은 자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에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일만 달란트 빚을 제 힘으로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였어요.
그런데 탕감받았습니다.
근데 우리가, 내게 일백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비난'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겠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형제를 비난할 수 없고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남의 티를 책잡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탕감받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근본적인 은혜를 기초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것이 첫번째, 우리가 형제를 비난할 수 없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2) 두 번째로 그 비난속에는, 교묘한 어떤 심리가 감춰져 있는가 하면
"차별화를 위한 비난"입니다.
이런 거죠. 자기는 (그 죄와) 상관없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속에는 무서운 자기 기만(스스로 속음)과 자기 의와, 교만으로 감춰져 있어요.
'나는 너하고는 달라!'
이 죄를 가장 크게 범해서, 예수님께 비판을 받았던 대상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라는 말이 '분리'라는 뜻입니다.
왜 분리합니까?
'우리는 너희와 같이 갈 수 없어!'
대한민국에 사실 기독교가 원래는 하나이어야 하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이 교단이 갈라지고, 교파가 갈라졌죠. 전부 분리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전부 개혁을 부르짖고 분리를 했어요.
개혁을 부르짖고 분리!
'너희들은 틀려서, 우리는 너희와 함께 할 수 없어!' 이런 뜻입니다. 자기 의죠.
자 그런데 잘 보면, 거의가 사실은 진리 문제 때문이기보다는
그런 진리 문제로 갈라진 경우는 한 10%도 안 돼요.
거의 90%가 지방색, 정치적인 이권... 이런 것들 때문에 갈라진 겁니다.
차별화 하는 거죠. 자기 의죠.
그 '자기 의' 밑에는 교묘한 기만과 교만이 감춰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난 너하고 달라!' 라는 차원에서 상대방을 비판하게 된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오늘 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의도가 뭐냐면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위 구절에서, 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을까요?
우선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마22장에서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 하셨어요.
즉 율법의 가장 집약된 핵심 가치가 뭐냐하면
하나님사랑이요, 이웃 사랑입니다. 이게 율법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사실상 적극적인 목적지는, 뭐 하라는 겁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야고보 사도가 여기에 이 말(4:11)을 기록하고 있는 적극적인 정신이에요.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나는 비판 안 했어!' 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비판하지 말라'는 이 명령속에는, 적극적인 의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야 된다' 그 말이죠.
근데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과 열심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경쟁 속에서 형제를 비판하면서
사랑을 내세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정말 형제를 사랑해서 (선한 목적의) 비판(권면)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비판(권면)이 뭘로 묶어져야 됩니까?
그 형제를 사랑하는 목적으로 묶어지지 않는 비판은, 위험에 빠질 수가 있어요.
자기 기만과 의에 빠지는 비판으로만 끝날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유명한 성경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그런데 이 구절이 너무 유명한 나머지, 다음 구절이 가려져서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 condemn 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본성적 속성은 우리를 심판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건도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목적지에요.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자가, 할 수 없이 심판을 받게 된다.. 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목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언어 습관 속에서,
이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어서는 안 돼요.
'내가 저 형제에 대해서, 저 과장에 대해서, 저 직장 동료에 대해서
아무리 봐도 저건 비판 받아야 될 문제인데
그 비판의 끝이, 그 궁극적인 본 의도가
저 형제를, 저 직장 동료를 정말 사랑해서 하는 비판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돼요.
이거는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를 윤택해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생활의 태도입니다.
이건 훈련해야 될 문제에요.
자꾸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뒤에서 뒷담하기 시작하면.. 이거 굉장히 재밌어요.
그런데 그게 길들여지고 습관화 되고 내재화 되면
우리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요즘 SNS에 댓글들 많이 올리죠.
근데 그 글을 한번 올릴 때, 말을 쏟아낼 때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비판을 내가 사랑을 담아서 하는가?'
그걸 한 번 더 점검할 수 있는, 삶의 연습이 오늘도 쭉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यू की-सेओ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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