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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히브리서 4장 14-16절

by 【고동엽】 2023. 1. 23.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

2002-02-18 15:05:08 read : 995

 

 

히브리서 414-162002/02/17

 

<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행복이 위협받지 않는 인생이 없고, 행복이 위협받지 않는 가정은 없습니다.

때로는 남편 때문에, 때로는 아내 때문에, 때로는 자녀 때문에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그 힘든 것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힘일 것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미완성을 지혜롭게 수용하여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가는 힘입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것만 가지고 실망하고 원망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길을 다 다르게 만드셨기에 성급한 판단은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사람에게 실망해도 요셉처럼 실망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17살에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서 13년 동안 실망스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바르게 살수록 실망스런 일을 만나고, 정직하게 살수록 실망스런 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않게 자신을 지킵니다.

만약 그가 누구에게 실망했다고 신세타령만 했다면 그는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 잠깐 분노할 수는 있지만 습관적인 분노는 금물입니다.

자신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갖가지 절망과 아픔을 가지고 삽니다.

"저 사람은 아무 어려움이 없이 살겠지...." 하지만 그분도 그분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쉽게 불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크게 보면 나를 속상하게 한 사람도 내게 좋은 것을 선물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때로는 그 사람 때문에 속상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는 기도를 선물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를 축복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다 축복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바꾸고,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모든 어려움은 반드시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세상이 황폐하다 해도 사실 세상에서 제일 황폐할 수 있는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걸핏하면 기분 나쁘고, 걸핏하면 짜증나고, 걸핏하면 낙심하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십시오 >

 

그 은혜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드림으로 유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큰 대제사장인 예수님은 자기 피를 드려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다른 길을 찾지 말고 예수님을 붙들어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사실상 예수님만큼 우리의 심정을 알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체휼한다'는 말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으로 절실히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 회개 안 하면 죽어!"라고 윽박지르며 회개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상대의 형편을 알아주고 조건 없이 사랑을 주며 회개로 이끄십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약점을 다 아시기에 약점으로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장점을 개발하기보다 약점에 몰두하며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약점에 몰두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넘어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 속편'을 이렇게 꾸민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온 탕자는 "이제 아버지께 효자가 되자!"고 다짐하고 얼마간은 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몇 달이 지나니까 점차 일이 싫어지고 감사한 마음도 희미해졌습니다.

다시 옛날에 신나게 돈 쓰며 살던 일들이 기억나고 끊임없이 유혹은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소 두 마리를 팔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돌아오는데 돈이 생기니까 옛날 생각이 나 딱 한 잔만 하자고 술집을 들렸습니다.

그런데 딱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계속 늘어나다가 결국 3차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돈을 다 써 버리고 면목이 없자 "죄송하다!"고 생각해 다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탕자의 아버지는 계속 이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비록 꾸며낸 얘기지만 이 얘기는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하나님 아버지 사랑에 감격해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다시 죄의 자리에 서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편하게 죄짓고 지내다가 나중에 다시 믿자!"고 합니다.

그렇게 다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래! 맘대로 하라!"고 하실까요?

 

어느 가정에 자녀가 공부도 안하고 부모 말씀도 안 듣고 계속 말썽만 부렸습니다.

부모들은 "무자식이 상팔자야!"라고 한숨을 쉬는데 어느 날 자식이 와서 말합니다.

"부모님! 저 같은 자식은 없어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부로 집을 나가겠습니다.

오늘부터 저 같은 이런 불효자식은 없는 것으로 치시고 부디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면 어떤 부모가 "이제 철이 나는구나! 속이 후련하다. 어서 가라!"고 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어딜 나가! 이 자식아! 너 죽고 나 죽자!"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부모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 참 많습니다. 타락하고 또 타락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안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상처도 많이 받고, 반대로 상처도 주지만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차라리 다른 교회에 가서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다면 다른 교회라도 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처참한 모습도 받아주십니다.

 

<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

 

그러므로 항상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지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는 실력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대학 입시를 보십시오. 합격하려면 실력도 필요하지만 은혜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죄송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더 뻔뻔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만한 위인이 못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것이 뻔뻔스러운 모습 같아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좋지만 부족해도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가면 언젠가 우리의 모습은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회사 다닐 때에 술 먹는 분들을 보면 3-4차까지 갈 때가 많았습니다.

자꾸 죄 짓고 싶은 그런 마음의 10분의 1만 은혜를 사모해도 은혜가 넘칠 것이고,

우리가 죄 짓는데 쏟는 시간의 10분의 1만 은혜를 추구해도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된 자라도 은혜를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가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면 잠깐 못나 보일 수 있지만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평생 못나게 됩니다.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자존심이 세서 못나 보이지 않으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은혜를 구하면, 사람은 잠깐 못나게 볼지 몰라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십니다.

 

여러분! 문제해결의 샘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은혜를 구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때로 문제 때문에 잠을 못 이룬 경우가 있고 밥맛을 잃어버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보면 그 문제가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면 그 문제가 오히려 더 꼬이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경우가 얼마나 종종 발견됩니까?

 

우리가 조금 높은 산에만 올라가도 우리가 갈등하는 문제들이 작게 여겨지는 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으로 올리워지면 문제가 어찌 작아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문제가 해결(解決)되기 전에 이미 해소(解消)될 것입니다.

 

< 은혜를 받으려면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진정 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면 길이 열리지만, 교만하면 길이 다 닫힙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행위에 근거를 두기에 겸손함이 부족합니다.

종교에서 여자, 상놈을 사람 취급 안하는 이유는 교리 때문보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지난 911일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가장 잘못된 것도 바로 교만입니다.

그는 오마르와 함께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회교 국가를 세우겠다고 봉기했습니다.

결국 탈레반 정권을 아프가니스탄에 세우는데 성공했고, 그래서 더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오마르를 모하메드 후계자로 높여주며 전 세계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인류는 무지하고 한심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옥이라고 여겨도 그들은 자기 나라를 최고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텔레비전과 카메라를 없애고, 여자들은 공부도 안 시키고 집에만 있게 했고,

그들 외에 온 인류를 다 무지한 자로 알고 세계적 문화 유산도 다 파괴해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교만이 너무 극에 달하면 이처럼 무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힌두교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먹는 것을 중시합니다.

왜 갠지스 강물을 먹습니까? 화장을 하고 그 뼈와 가루를 그 강에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가에 뼈들이 수두룩한데도 그 강물을 마시면서 "거룩한 물!"이라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면 그들은 오히려 관광객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사람, 유럽 사람을 다 무지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회교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성지 메카에서 참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카에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가면 안되고, 몇 달이라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매년 몇백 명씩 깔려죽습니다.

그렇게 깔려죽는 것을 순교라고 하고, 그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봅니다.

그런 지나친 의식이 어디에서 옵니까? 사실상 그것도 다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겸손해야 바로 들을 수 있고, 봉사도 겸손해야 바로 할 수 있습니다.

감사도 겸손해야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하면 얼마나 영혼이 풍요롭게 됩니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수록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삶에 여유와 만족이 생기게 됩니다.

 

기쁨도 어디에서 옵니까? 겸손에서 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순종도 겸손한 사람이 순종할 수 있고, 행복도 누구보다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집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집에서 "여봐라!"하며 지내면 행복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하면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느새 교회생활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교회에서 교인이 수많은 은혜를 받아도 교만하기만 하면 그 은혜가 다 떠나갑니다.

그래서 교만은 좋은 것이 떠나가게 하고, 행복의 문과 축복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사람도 교만한 사람은 다 떠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 주변에는 친구가 많습니다.

나라도 교만하면 망하고, 입맛도 교만하면 없어지고, 건강도 교만하면 사라집니다.

 

어떤 교회에서 고급 공무원으로 있던 한 집사님이 은혜 받아 목사 되겠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말렸습니다. 그런데 기어코 신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을 했는데, 목사가 된지 두 달만에 죽었습니다. 사인은 모릅니다.

그런데 이분은 신학을 하면서부터 천하에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른 목사님 얘기에 의하면 목사 되던 날부터 선배 목사에게 말을 놓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앞선 분들을 존중해야지 우습게 알면 자기가 망합니다.

사람들은 교회 일을 능력이 없어 못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교만하니까 못합니다.

성도들은 은사 많은 목사님을 좋아하지만 대개 그런 분들이 잘 넘어지지 않습니까?

부족한 목사님은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라고 하니까 꾸준히 은혜를 입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가장 잘 못하는 것이 겸손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 말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까지 교만하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문제입니다. 나라도 겸손해야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미국에 큰소리치는 세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이 빠지고,

현재 미국 앞에서 큰소리치는 오직 두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나라일까요?

하나는 북한이고, 또 하나는 이라크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 나라라고 합니다.

 

미국 앞에서 큰소리치는 나라라고 뻐길 필요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우리 나라는 큰 나라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작은 나라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미국이 외면하면 사실 남을 것도 없으면서 우리는 미국 앞에서 너무 큰소리칩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무식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만한 나라가 되면 안됩니다.

"! 미국! 정말 그럴 거야!"라고 하지 말고 항상 겸손한 자주외교를 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잘되려고 해도 안되지만, 겸손하면 항상 좋은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이지 말아야 할 태도가 교만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동시에 사람의 축복도 받게 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

 

그처럼 겸손하면 은혜를 받지만 한 가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그 인내를 강조하기 위해 16절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금방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느긋해져야 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느긋해지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 뜻은 다를 수 있는데 내 뜻대로 안된다고 안달하면 되겠습니까?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약점은 많지만 한 가지 약점만은 거의 없습니다.

즉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팔짝팔짝 뛰는 그 한 가지 모습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다만 한가지만 더 하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때를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너무 조급해합니다. 조금이라도 느긋하면 실패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속도를 내야 할 때도 있지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행동은 빠를수록 좋고 실천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느긋해야 합니다.

사람이 부드러우면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지만 은혜 안의 부드러움은 큰 힘입니다.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은혜 안에서 부드러우면 반드시 살 길이 생깁니다.

 

그 느긋한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드러운 언어생활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금방 언어가 거칠어지고, 은혜를 받으면 언어가 부드러워집니다.

몸은 말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부드러워지면 행동도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건강보다 항상 언어의 건강이 앞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병약하면 언어가 거칠어지지만 반대로 언어가 거칠면 세포가 병들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약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나의 건강한 언어가 바로 보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18:21)

그러므로 긍정적인 말, 부드러운 말로 세포를 살려보세요. 그러면 건강해질 것입니다.

 

사실상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혀가 감정이 아닌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할 때 어떤 일부터 생겼습니까? 혀가 하나님께 붙잡혔습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드러운 혀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언어와 편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찬찬히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과 언어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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