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4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5)
우리도 소리 높여 외칠 고백
사도행전 2장 14~36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모두들 경제위기다, 살기 힘들다,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어려운 때란 항상 기적의 때요 간증의 기간입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모든 어려웠던 기간은 다 간증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다들 어렵다, 힘들다고 할 때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두려운 일도 염려도 없게 됩니다. 저는 짧은 생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고비들이 다 한결같이 간증의 때였고 기적을 경험하는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고 할 때 믿음 안에서는 사실 가슴 설레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때가 되었구나.’ 여러분,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하나님께 먼저 올려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이 역사를 안해주시는가?”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특히 어려울 때 여러분이 먼저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을 보여드리는 것 중에 놀라운 것이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역사도 인생도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 살 길은 항상 너무나 간단합니다. ‘왜 그것을 몰랐을까?’ 탄식할 만큼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축복, 십자가의 복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일 먼저 말이 달라집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5절-13절에 보면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한결같이 말 문이 열려 방언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저들이 어떻게 우리 방언으로 말을 하는가?”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 14-36절까지도 보면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설교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가다가 결국 가야바의 궁전에 가서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 부인했고, 두 번 부인했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자기는 전혀 상관없는 관계라고 분명히 밝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력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이 달라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너무 수다스러운 것도 좋지 않지만, 말없이 젊잖은 것도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젊잖다는 말은 그가 속이 뜨겁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속이 뜨거운데도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여러분 속에서부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터져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았음을 그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설교를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시편 16편과 110편의 다윗의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실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도무지 스스로가 깨우칠 수 없는 일을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다윗이 이미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였음을 증거하였습니다. 27-28절에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기서 “내 영혼”은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놀라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는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논쟁을 걸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도 다 있었니?” 하면 끝입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어떻게 이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 여러분이 보고 듣지 않았느냐고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32-33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는 신학적인 논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아니다’ 그는 증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그러냐?” 이렇게 넘어갈 만도 한데,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계시다. 그것을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아니냐고 증거할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증인이 나서니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세상을 살리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베드로에게만 예수님이 오셨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처럼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당당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공부를 많이 하고 큰 건물을 짓고 성공하면 관심을 가져주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세상을 주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당당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담대하게 증거할 때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조용히 믿는 것이 좋지, 그렇게 요란하게 말하고 믿을 것이 무엇인가?” 합니다. 그 분은 지금 아직 복음을 정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복음을 알고 나면 혼자 조용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례까지 치렀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길거리에 뛰쳐 나가 큰 소리로 외칠 일이 아닙니까?
아무리 놀라운 진리요 복음이라도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진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내게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죽었다고 하니 이것은 무슨 역사가 있는 메시지가 아니면 미친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다. ” 이렇게 고백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의 복음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고백한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라고 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베드로만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 예수님을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가족들에게도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여러분이 정말 소리 높혀서 베드로처럼 고백할 것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밝히는 것을 주저합니다. 무언가 부자유할 것 같고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논쟁에 휩싸일 것 같고, 계속 그리스도인 답게 살 자신이 없고, 너무 튀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바꾸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 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주저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호주에서 만난 한 의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교민 교회들 사이의 다툼, 교인들의 갈등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자로 찾아온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들은 것들입니다. 왜 불신자들에게 이런 것만 말하고 살아야 합니까?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정신 안에 조국 인도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영국의 부당한 처사에 굴복할 수도 없고 그러나 무력에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대안이 십자가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유명한 “비폭력, 비협조” 운동입니다. 그것은 힘이 넘쳤습니다. 대영제국을 흔들었습니다.
간디의 소집으로 인도의 지도급 인사 20만,명이 감옥에 갔습니다. 화를 잘 내던 사람들이 대나무 곤봉에 머리를 맞고 아무 저항 없이 감옥에 들어가고 가장 가혹한 형벌을 자청하였다. 그들은 법정에서 감옥으로 이송될 때 영국인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힌두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힌두교인이 선교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십자가를 가지고 말하려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감옥은 우습게 되었습니다. 양심적인 영국인들은 괴로와 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우리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있는가?’ 이것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힘이 있었고 거의 기독교적이었다. 그 운동에 폭력이 슬금슬금 들어오면 간디는 운동 중지를 명하고 대신 스스로를 참회하고 정화하는 뜻으로 단식을 실시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였다. 한 힌두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었듯이 마하트마 간디도 예르바다 교도소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겪고 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비폭력, 비협력 운동도 십자가가 아니었고 단지 목숨을 걸고 십자가 정신을 적용하려 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기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유력한 힌두교인이 기독교가 인도에 뿌리내리려면 더욱 기독교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한국 복음화, 토착화를 위하여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 종교를 배우고 그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통하는 기독교인이요 교회가 되려고 세상을 배우고 닮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진실이요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해되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엄청난 보화를 가지고만 다니다가 죽을 것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번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 예수님과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진리를 증거해 보십시오. 여기에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걸어 보십시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 자서전 [순례자의 노래]에서 개종자 베누고팔(C. T. Venugopal)이란 사람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는 형의 권유로 스탠리죤스 선교사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차에서 예수님이 곁에 앉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이 영원토록 서로에게 속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철도 공무원이었는데. 뉴델리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하 직원과 고위 공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기독교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이거든 내게 다가와 그것을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얼마 후 두 명의 힌두교인인 직원이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베누고팔씨. 오늘은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닌 것 같군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아침 고요한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 될 때, 서로 적대적인 사이에서 철도와 관련한 분쟁을 해결할 특사로 파키스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인도가 필요한 서류 뿐 아니라 배상금까지 받아 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인도 정부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산상설교에 나온대로 했을 뿐입니다. 10리를 더 가주고 원수를 사랑했을 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산상설교대로 살 수 있나 말합니다. 하지만 산상설교는 그대로 살기 시작할 때, 산상설교는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그는 브라만 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은 일로 인하여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회심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2년 동안 아들에게 와서 살았습니다. 그 후 가족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베누는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베누고팔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가진 신앙을 가지기 원합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당당히 예수의 사람임을 고백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번에 호주 코스타에 갔다가 서울 법대 교수이고 전 공정거래위원장이었던 권오승 장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40세에 예수를 믿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법전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소위 선진국의 법에서 도움을 받으려 했었지만 가장 귀한 지혜는 성경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한번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한국 경제법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하더랍니다. “당신은 참 이상하다. 당신같은 사람이 왜 그만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기 돈을 들여서 이곳에 와서 이런 강의를 하는가?” 그 때 장로님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했습니다. 그 말에 통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중국에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안되지만 내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느냐? 계속 통역을 하라.” 고 하고는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이 시장 경제로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온 것입니다.” 했더니 모두들 크게 감동받는 것을 보았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 그렇군요.” 하더랍니다.
그 자리에 여자 관리가 반 이상이었는데 얼굴에 기쁨이 없어 보였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으니 “1년에 한번도 듣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권장로는 자신은 하루에 세 번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믿지 않더랍니다. 자신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변했다고, 예수 믿고 난 다음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간증하니 모두 크게 감동을 받았답니다. 이것이 전도요 선교가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특별 기도 기간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하지만 뜨겁게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합니다. 왜 뜨겁게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 안에서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었고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라고 가족과 이웃에게 큰 소리로 당당하게 고백해 보십시오. 매일 매일 기도가 뜨겁게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여러분이 믿음으로 고백한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왜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선언해 놓고 나면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대신 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나는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로 산다.”고 당당히 고백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하고 살면 정말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만약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생명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가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과 같은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믿음을 도전했고 몸을 던졌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 밖에 물 위를 걸은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사신다고 선언할 때 그와 똑같은 심정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걸었고 다른 제자들은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도전도 없었고 물 위를 걷지도 못했습니다.
죠지뮬러 목사님.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아들을 먹여 살리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임이 증거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책을 출판하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제목 밑에 저자 유기성목사 라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너무 지나치게 보든지 너무 교만하게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수준 높은 영성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하셨을 때, 혼자서 감격해 했지만 나가서 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복음을 힘써 가는 데마다 가르치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미숙하고 부족하였지만 받은 은혜대로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를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러하므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속하여 가르치시고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하시고 구체적인 체험을 주셨고 엄청난 영향력을 일으키셨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삶에 시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가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고백이 분명하게 되어야 예수로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길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소리 높혀서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사는 이 복음을 증거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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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마음을 치실 때 /행 2:37-41 (0) | 2023.01.23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쁨/누가복음 15장 11-24절 (0) | 2023.01.23 |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히브리서 4장 14-16절 (0) | 2023.01.23 |
웃음으로 감사하는 자와눈물로 감사하는 자 /빌립보서 4장 3~7절 (0) | 2023.0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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