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 흐름
성서시대인 1세기까지 유대인에게 신학이란 용어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믿음이 곧 삶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이라는 용어는, 2세기에 와서 로마 그리스 정신사유와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믿음을 이성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생겨났습니다.
폴 리꾀르는 신학자가 아닌 순수 구조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신교인으로서 어느 종교학자나 신학자보다 성서와 바울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깊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의롭다가 도덕과 경건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오히려 반대로 이해한 겁니다), 즉 믿음이 의로움을 인정받고 사는 문제로 인식하는 흐름은 바울 - 루터 - 불트만으로 이어져 왔다고합니다.(폴 리꾀르 해석의 갈등 양명수 한길사 2012, 436, 438p)
보충하자면, 2세기 관념신학 흐름에서 4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진가를 발견한 이레니우스와 4복음서를 성경으로 주장한(디아테사론) 파피아스 등을 통해 지지되어 오다가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그 글들이 오늘의 성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다른 기독교만의 정체성은 바울 - 이레니우스 - 아타나시우스 - 루터 - 불트만으로 이어왔습니다.
현대에, 바르트는 아들하나님 예수로부터 계시되는 영원에 대한 계시신학을 세웠습니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사역에 대해, 몰트만은 복음서 전체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증언임을 밝히고 하나님나라 삶이 구원임을 밝힌 종말론신학을 세웠습니다.
이 2학자는 하나님나라 신학과 삼위일체 신론에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소위 복음주의라는 한국 주류 신학자와 목사들은 상기 신학자들을 자유주의자라며 거부합니다.
한국 교회성당이 위 신학자들의 신학만이라도 수용한다면 기독교 다시 서기에 희망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는, 현재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는 복음주의 흐름입니다.
유대 - 기독교 사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에덴동산 이야기는 인간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주시는 은혜 이야기이고, 요3:16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께서 땅으로 오셨다고합니다)
삶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세상을 악으로 인식하고 관념(이데아)이 선이라고합니다. 그래서 삶을 부정하고 금욕과 경건을 주장합니다.
2세기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사유를 기초로 신학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신학이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을 종교개혁자 칼뱅(장로교)과 웨슬리(감리교 침례교 성결교)가 그대로 받아서 베자가 발전시키고 근현대에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존 파이퍼, 김세윤 등이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신학합니다.
내가 이들 신학자 글을 읽은 까닭이고 그외 어느 신학자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플러신학교에서 칼뱅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그는 여성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사람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백인 남성이 이들을 깨우쳐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주의는 이러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주도했고 지금도 주도합니다.
김세윤 교수는 플러신학교 교수로 세계 신학계가 인정하는 보수신학자입니다.
그러나 총신대학교에서 자유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고 쫓겨났습니다.
기독교가 세계 정신문화로부터 심각하게 고립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기독교는 세계기독교로부터 심각하게 고립되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쓰는 복음이라는 뜻은 정치 경제 사회는 거론하지 않고 오로지 교리만 거론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스토아 인식론을 차용하여 믿음이란 관념(개념)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땅에서 구원하시는 소식이라는 뜻으로 복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사야가 들으면 벌떡 일어날 소리고 지나가는 소가 웃을 소리입니다.(이사40:9 개역개정은 아름다운 소식으로 공동번역은 기쁜소식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들은 믿음을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순수함을 지키는 것으로 인식하여 도덕과 경건이 믿음 표상입니다. 그래서 차별과 혐오가 교회에 만연합니다.
도덕과 경건은 플라톤이 말하는 관념이고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긴장하는 법입니다.
사랑은 자기 수준에 못미치는 사람을 용납하는 행위이지만 도덕경건은 부정 불의한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는 행위입니다. 즉 도덕경건은 신앙 권력이고 엘리트주의입니다.
도덕경건주의자들은 가난한사람 실패한사람 불치병자 이주노동자들을 혐오합니다.
예수께서 혐오 인간인 세리와 창녀를 친구하시고 하나님나라에서 배제된 갈릴리 소작 농민과 여성들에게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설교하십니다.(누가13:1-8)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는 출중한 신앙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변부를 선택하셔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화해하여 자유와 정의 기쁨과 평화의 삶을 주십니다.
또한 주변부가 정의를 세우고 중심부에 저항하고 일깨움으로서 평화를 도모합니다.(이정용신학 출19:5-6, 이사42:1-3, 예수 갈릴리사역 등)
세상을 악하게 인식하여 도덕과 경건이 믿음인 신앙인들은 하나님나라와 삼위일체신론을 모르거나 등한히 합니다.
복음주의 원류인 칼뱅이 그러했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시를 4년여 통치하며 예배 불참자를 감옥에 가두고 매월 거의 한 사람꼴로 화형시켰습니다.(박충구)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삼위일체를 거부한다고 화형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삼위일체 신론을 좋아하지 않고 성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또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 7천 명을 살해했습니다.
4 년여 통치 끝에 의회가 권한을 회수하고 외국으로 떠나줄 것을 종용받았습니다.
어느 복음주의 교회사가는 칼뱅이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거룩한 도시를 세웠다고 칭송합니다.
폴 리꾀르는 현재 기독교가 플라톤 늪에 빠져있다고 진단합니다.
복음주의는 미국의 칼뱅주의자들이 성서비평을 반대하며 근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주창하다가 이슬람 근본주의가 태동하자 복음주의로 그 명칭을 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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