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38년된 병자 요5:1-9
◑낙심
▲변화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38년 된 병자
베데스다에 가신 예수님은, 아마 가장 중환자였을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셔서,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 아닙니까?
물으나마나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38년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세월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낫고자하는 소원이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감히 “낫기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낙망한 채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에 ‘내가 정말 그렇게 나음을 받을 수 있을까?’ 낙심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은 고침을 받을 길이 없다는 깊은 낙심을,
그런 식으로 둘러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정말 은혜의 삶을 누리고 살려면
우리 마음에 있는 <낙심이라는 무서운 병을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본문의 말씀이
‘38년이나 병으로 고생하는 어느 특별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어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8년 지나도 전혀 안 바뀌는 나 자신
어느 목사님이 40년 만에 처음 고교 동창회에 참석하였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창회에 갈 때는 흥분했답니다. ‘다들 어떻게 변했을까?’
그러나 가서 너무 실망했답니다. 나이가 들었고 체중이 늘었고 옷이 바뀌었을 뿐,
한두 시간 지내다 보니 40년 전과 똑같더랍니다.
‘변한 것이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40년이나 지났는데... 인격은 옛날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등학교 졸업 때와 얼마나 달라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이것은 고쳐야지, 달라져야 해.’ 하고 깨달은 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10년 전 일이고, 20년 전 일이고, 30년 전 일이라도..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38년 된 병자’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감동적인 연설 한 대목
“나는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의 그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올해는 작년과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하나 새로워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전이나 하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퇴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너는 변화가 일어날 것을 믿느냐?” “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나 ‘아멘’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저는 변화를 원합니다.” 하지 못하고
“변화되면 좋지요!” 하기가 쉽습니다. 우물쭈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합니다.
‘변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기도했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나 자신도 모르게 <낙망>이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내 삶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실 수 없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변화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내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포기하고 있는 것들을.. 오늘 일으켜야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기도하는 열정도 믿음도 없다면.. 낙심 때문입니다.
매사에 모든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만 늘었다면.. 낙심 때문입니다.
낙망이 무섭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낙망하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18:1
◑두 강도의 차이점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기대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희망을 품었던 한 편 강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편 강도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인생이 끝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만큼,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100% 실패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절망적인 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관련글 보기 클릭-
▲낙심했던 다른 편 강도
다른 편 강도는, 십자가에 달릴 때 이미 포기했습니다. 아주 막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욕하고 저주하고...
그는 이미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느 쪽 강도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기대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놓져 버리는 그 때
내 인생도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과 내게 주어진 변화에 대하여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의 일화가 참 귀해서 나누기 원합니다.
(한 번은 김용의 선교사님이, 선교사 모임에 설교말씀을 전하러 갔었답니다.)
하루 먼저 도착하여, 다음날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수련회에 참석하신 선교사님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답니다.
그 대화를 듣다가.. 너무 낙심을 했답니다.
“이제는 너무 지쳤어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제는 은혜 받는 것이 무서워요...”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을 전해도 쉽지 않은데,
저렇게 낙심한 선교사님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나.. 싶어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깨달아진 것이 있었답니다.
이것이 ‘누구 편에서의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 편에서의 문제임이 깨달아졌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라는 것이었답니다.
그 분은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OO야,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많이 애를 썼단다.
그런데 이제는 너를 보면 무섭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만한 가능성이야 너무나 많지 않은가?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주님이 나를 보시고 ‘이제는 지쳤다. 더 이상 아무 느낌이 없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떠하겠는가?
주님이 지치실 가능성이나 포기하실 가능성이 단 1 %만이라도 있다면
나는 끝장인 것이다.
(선교사들이 하나님께 대해 낙심하고, 좌절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약 하나님이 선교사들에게 낙심하고 좌절한다면.. 큰 일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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