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기 |
하나님의 거룩한 영(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 엡4:30, 요14:16~17 출처
로버트 맥체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회심치 않은 사람은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세상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분을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목회자들은 성령에 관한 설교를 자주 하지 않는 편입니다.
회심치 않은 청중도 또한 그런 설교 듣기를 꺼립니다.
그러니 위와 같은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어리석은 말로 들리겠습니까?
"네 어머니나 네 아버지를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명령이라면 차라리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 도무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어려운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악한 말을 하지 말라는 권고를 하면서,
이 멋있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 사항을 숙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성령님과의 거룩한 교제
(2) 이 거룩한 친구를 슬프게 만드는 몇 가지 일들
(3) 위의 두 가지를 구체적으로 적용함
◑1. 성령과 믿는 자의 혼 사이에는 거룩한 교제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담긴 속뜻 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분을 슬프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원수라면, 우리가 넘어질 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실족할 때 그분께서 슬퍼하신다는 그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슬픔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분은 온전히 행복하신 분이 아니라는 뜻이 될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과 그분의 슬픔 사이에는 분명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다.
1)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오셔서 거기에 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여! 이 얼마나 친밀한 교제입니까?
어떤 친구는 우리 이웃에 살 수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우리 가족 중의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이보다 더 대단한 우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서 식사도 하셨고,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로 자신의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다시 닦아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친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더 위대한 친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벽에는 문둥병이 가득 덮여 있는 진흙으로 지은 오두막집에 들어와 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과 믿는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교의 상황입니다.
2)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과 13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리고 요한일서 2:20절도 한번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여러분, 친구지간에 아둔한 친구에게 어떤 것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증표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는 친교의 모습입니다.
위대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겸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호숫가의 배 위에 앉으셔서 백성을 가르치실 때 이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듯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것보다 더 긴밀한 친교는 없습니다.
그분은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리석음을 오래 참으시면서
마음을 열어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이것이 진정한 친교입니다.
3)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그 자신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유다서에도 이와 동일한 뜻이 담긴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고 또한 『성령 안에서』기도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그분과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친교의 또 다른 증표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어머니의 몫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의 입속에 자신의 말을 넣어 주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기도하고픈 욕구도 불어 넣어 주십니다.
같이 기도해 주는 것도 위대한 우정인데, 그분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친교의 현황입니다.
4) 그분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인을 치십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자 다시, 에베소서 1장 13절을 봅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습관은 서로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혹자가 거룩한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거룩한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란 사람사이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마치 양초에다 도장을 콱 찍는 것만큼이나 뚜렷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이 표시는 구속의 날까지 지속됩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당신은 이 친구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당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중보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확신이 조금도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제가 당신에게 던진 질문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혹시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당신이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세상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2.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슬퍼하셨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막 3:5).
예수께서 그렇게 슬픔을 느끼셨다면,
성령께서도 완악함이라는 죄를 보시면 슬퍼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 때, 베드로는 울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보셨을 때,
그 눈동자에서 아마도 슬픔이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눈동자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베드로야! 네가 분명 그렇게 행하리라고 내가 일러 말하지 않았더냐?
베드로야, 내가 너의 원수이더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하기라도 했더란 말이냐?"
분명 주님은 눈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을 뒤섞으려고 한다면 그분은 슬퍼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일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4-15)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임무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시길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오순절 날 삼천명의 사람들이 회심한 것은 성령님께서 사역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얼마나 탁월하고 신성한 것이었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가끔씩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성령님의 사역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평안의 기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성령님께서 몹시 이기적인 분이시라면, 그분은 아마 이런 일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더 그분을 슬프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2)그분은 당신이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하지 않을 때 슬퍼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거룩함이란 모두 그분께 기인한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함은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베푸시는 위대한 사역의 결과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성령님께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분과 당신의 우정은 아주 돈독하게 유지되는 것이지만,
만일 당신이 한순간이라도 그 의지하는 마음을 거두어 버린다면, 당신은 그 분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깊고 빠른 물살이 흐르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해 봅시다.
그 친구는 당신보다 훨씬 강해서 물살 속에서 버티는 힘이 당신보다 더 셉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에게 "물을 건널 때 나를 의지해."하고 합니다.
그런데 물을 중간쯤 건넜을 때, 당신이 그에게 말합니다. "난 더 이상 널 의지하기가 싫어.
혼자 갈테야." 그리고는 혼자서 허우적거리며 물속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당신을 보는 친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슬퍼하시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4)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올 때, 그리고 더러운 욕망들이 물밀 듯이 밀어닥칠 때,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그분이 슬퍼하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들에 의지하기 시작한다면, 즉 자신의 지식이나 선한 결심,
혹은 지난날의 경험에 기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슬프시게 하는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난 많이 성장했어, 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라고 중얼거리며
유혹 속으로 첨벙첨벙 거리며 뛰어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3)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분을 슬프시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마 8:22)
만일 그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분은 몹시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위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때로 우리 속에서 신음하십니다.
기도하기를 거절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슬프시게 한 것입니다.
양심의 반대를 외면하고 시험에 빠져든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슬프시게 한 것입니다.
시험이 닥쳐올 때면 그 분은 당신에게 그것을 경고해 주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끔하게 찌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유혹을 피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4)모임을 멸시함으로 그분을 슬프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에 축복을 쏟아 부으시는 통로입니다.
이 모임들을 무시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슬프게 한 것입니다.
당신이 친구와 만나기로 하고 시간을 정해 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약속만 해놓고 나가지 않는다면 친구가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런 식으로 성령님을 슬프시게 할 수 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말입니다.
이 중에 그분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 성령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혼에 해악을 끼치는 짓일 뿐입니다.
◑적용
1) 이 가운데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단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왜 당신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그분이 당신을 광야나 암흑의 땅에 두신 적이 있습니까?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 32:6)
혹시 주님 속에 질투의 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그분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에게 해 주신 일들을 숙고해 보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죄의 자각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혼에 강한 서풍과도 같은 호흡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러한 분을 슬프시게 하는 것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짓입니다.
2)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그 어느 누구도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선 그분의 면전에 나아오지 못합니다.
죄에서 돌아서십시오!
3)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당신은 자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소멸하게 되면 그 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당신 마음에서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나면,
당신은 마른 땅 위에 난파선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4)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분을 슬프시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그분이 끌어당기시면,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무엇보다 그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그분이 어떤 친구와 동행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와 같이 가는 것을 멈추십시오.
또 그분이 어떤 길을 가지 말하고 하시면 그리로 가지 마십시오.
절대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슬프게 하지 않는 자들의 혼을 가득 채워서,
그 마음속에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을 대처하는 방법-팀켈러 (0) | 2023.01.16 |
---|---|
하나님의 구원 사 55:7-9 (0) | 2023.01.15 |
택해 주시는 사랑 요15:16 (0) | 2023.01.15 |
지금은 바로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 롬13:11 (0) | 2023.01.15 |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욥34:31-32, 느9:33 (0) | 2023.0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