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인 명설교편◑/유기성목사 명설교(199편)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행18:12~23

by 【고동엽】 2023. 1. 14.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행18:12~23      

 

1,2,3차 선교여행과, 이어서 로마행과

또 다시 (사도행전에 안 나타나는) 4차선교여행 등

사도바울의 그 초인적 에너지의 근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름 아닌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반드시 해 내리라!) 이었습니다.

 

◑특별기도회의 목적 .. 주님의 뜻대로 인도함 받기 위해서

 

금년에도 우리는, 12월 1일부터 ‘2달간의 특별기도’에 들어갑니다.

 

작년 12월에 시작한 ‘2개월의 특별기도’로,,

올해 우리 교회는 놀라운 기도의 역사,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올해는 2개월의 기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놀라운 기도의 응답과 기적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2달 동안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새해를 맞으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을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고

또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2010년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되 나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지는 말고,

주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되기를 갈망합니다.

 

저도 제가 소원하는 대로 되기를 갈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갑자기 한 생각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알기에 무엇이 되고/안 되고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포기했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여러분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로 순종하여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원을 세우신 대천덕 신부님께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역의 길은 막히고, 목회만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가르치는 사역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기도를 바꾸었답니다.

‘목회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즐겁게 하게 해 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작 그렇게 기도하지!’

 

그 뒤부터 정말 목회가 너무나 즐거워지더랍니다.

 

얼마 후 한국에 신학교 학장으로 오게 되어

다시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목회 경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나에게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환란도 고생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느냐/아니냐 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골짜기를 지나가면 푸른 초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만 가면..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본문 설명

 

▲고린도에서 만난 어려운 환경

오늘 본문은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도바울의 모습이

너무나 강하게 드러나 있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그 말씀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도바울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두려워 떨었고 고린도 전도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오래 동안 전도해서 열매 맺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18:10

 

주님의 이 응답을 듣고, 사도바울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눈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들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고린도에서는 도무지 전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판단을 꺾고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내 눈에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다른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 주님의 인도하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당한 어려움은 어떤 것이었나요?

 

(※앞서 에베소에서는, 아데미를 우상이라고 규정하자.. 당한 어려움이었습니다.)

 

고린도에 갈리오라는 새 총독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새 총독이 부임해 올 때를 이용하여

사도바울을 총독에게 고소하였습니다.

 

갈리오 총독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다수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바울 한 사람 죽이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그러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죽이라고 하니까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난감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끝인가?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주님의 응답은 '너를 해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상황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의 언어와 법에 관한 것이면 내가 상관하지 않겠다.’ 하며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하고, 유대인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18:15

 

이것은 예상외의 결과였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이, 정치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렸을까요?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행18:10 라는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에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소스데네에게 화풀이하다.

자기들의 뜻이 좌절당한 유대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가 안식일마다 사도바울에게 회당에서 강론하도록 허락했다고

재판석 앞에서 소스데네를 잡아 때렸습니다.

 

총독이 이 일은 가만 내버려 두었다고 했습니다. 18:17

 

그만큼 유대인들의 영향력에 대하여 신경 쓰고 있었다는 말인데,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한 일이 정말 신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낙심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만 확인되면 담대해야 합니다.

 

 

◑해석 및 적용

 

▲1. 소스데네가 받은 ‘고난의 복’

사도바울 대신 매를 맞은 소스데네는 잠시 억울하고 괴로웠겠지만

매 맞은 것이 복이 되었습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과 같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가가 다 구원받고,

그 자녀들이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전1:1, '...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소스데네는 사도바울과 동역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 날 소스데네가 사도바울을 대신하여 매를 맞은 일을 계기로

그때부터 바울과 동역자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입니다.

 

소스데네가 복음 때문에 매 맞았다는 것이,

그를 초대 교회의 존귀한 위치에 세워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를 맞는 소스데네에게 감동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 네가 나를 위해/나를 대신해서 매 맞는 것을 내가 고맙게 여기노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 당한다면

마음으로는 정말 기뻐할 일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핍박이 있다면 손해 본 일이 있다면

그것이 복인 줄 믿으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0~12

 

(오늘 우리 가운데, 바울과 소스데네 처럼 자랑하지 않고,

누가 ‘나는 부자되었네, 나는 성공했네’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도바울의 행동 원칙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를 거쳐서 가아사랴로 가려할 때,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더 머물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너무너무 좋아

그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가지 마시고 여기 더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계속 전해 주십시오.’ 요청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했습니다. 행18:21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한결같은 태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러면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생각, 자신이 좋고 싫은 것,

자신의 감정, 자신의 계획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그처럼 간절히 붙잡으면 ‘그래 있어주자.’ 할만도 한데

그는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있고 싶다고 있어 본 적이 없고,

자신이 가고 싶다고 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지금은 더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시면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고린도에서는 사람들이 다 내몰려고 했었습니다.

회당에서 설교도 못하게 하고. 그런 곳에 더 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사도바울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아!’

그러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행18:10

사도바울은 자기가 좋아서 있었던 적도 없고,

자기가 싫다고 떠난 적도 없었습니다.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로마까지 전도 여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만 하더라도 3년이 소요된 수륙 모두 3천 km의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든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좋고 싫음과 자신의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는 달나라까지라도 갔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차전도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굳이 찾아갑니다.

가서 오래 머문 것도 아닙니다. 간단한 안부만 전하고 안디옥을 돌아갑니다.

'문안했다'는 얘기는 2차전도여행 보고를 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요즘같이 이메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교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

도대체 이방인 선교는 어떻게 되는지.. 교회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가이샤라에서 104Km나 떨어져 있고,

다시 안디옥까지는 480km를 가야 했습니다.

간단한 안부만 전하기에는 너무나 먼 여행입니다.

 

이방인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알려야 한다고

주님이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여행입니다.

 

선교보고 한번 하려고 104km 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다시 480km나 되는 안디옥으로 내려가는 이런 수고를

사도바울은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서 보고하라고 그러면.. 그냥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다른 선택(옵션)이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입니다.

 

▲그리고 다시 3차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대단하지요?

사도바울이 2차전도여행을 떠났던 길을 가만히 거리를 합산해 보면

3천 km나 됩니다.

 

사도바울이 만약에 자기 감정, 자기 원하는 것, 자기 계획대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그런 것이 앞섰다면 아마 그는 이런 전도 여행은 못했을 것입니다.

 

3차전도여행까지 끝내고, 이제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순교하는 것으로 사도바울의 위대한 선교 여행은 끝납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런 선교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있고 주님의 뜻이면 갔던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사도바울에게 다른 원칙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했다면 이제 우리의 삶에도 똑같은 원칙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래 전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영접하셨지만,

뭔가 내놓을 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원칙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정말 뭔가 거둘 것이 있으려면

사도바울이 가지고 살았던 유일한 원칙인 ‘주님의 뜻이라면’으로

여러분도 살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23절부터가 바울의 제3차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정말 사도바울의 삶은 주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맡긴 삶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평생 씨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가 아니지만,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후지 산 앞에 가서, 후지 산을 못 보고 돌아오다.

지난 주간 일본에서 사역 장로 수련회를 가졌는데

후지 산에 이틀을 갔다가 정작 후지 산을 보지 못하고 왔습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덮여서,

후지 산에 있으면서도, 후지 산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목사님은 여행 중에 내내 안타까워하며

계속 구름 덮인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가 후지 산입니다.

저기 후지 산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후지 산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감동은 없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산을 가린 흰구름만 보고.. 감동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때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알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만 아니라

믿는다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우리 눈을 가리워서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든지 믿고 볼 수 있는데도 못 믿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살면서, 예수님을 못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믿습니다.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만으로는 감동이 없습니다.

성질 하나 바꾸지 못합니다. 기분 하나 바꾸지 않습니다.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 하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막연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예수님, 천국에 가서 만날 그 예수님이

실제로 지금 내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믿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내 안에 계시는 놀라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기분 하나가 안 바뀝니다.

짜증스럽고 힘들고 슬픈 이 기분 하나가 안 바뀝니다.

성질 하나가 안 바뀝니다.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뀝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며

성질 기분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뀌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후지 산에 가있으면서도 후지 산의 감동이 없습니다.

구름에 가려있으니까요...

 

예수님 내 마음에 모신 것도 내 눈이 '세상'에 완전히 가려있으면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내 성질 하나 안 바뀌고, 기분 하나 안 바뀌고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뀌는.. 이런 기가 막힌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과 친밀함에 눈이 뜨여야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위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정말 그 문제를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것이 아니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눈이 영적으로 가려져 있는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고 아무리 머리로 믿어도

실제로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능력도 없단 말입니다.

눈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신앙 성숙은.. 일평생 눈을 (점점 더) 떠가는 과정이라고요!’

 

▲최근에 저는 ‘저희 교회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출석 교인이 만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를 1천 명 파송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더욱 분명한 교회

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그 점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 하나 외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할 때 위기가 오는 이유는

예수님 보다는 교회 규모나 예배나 집회의 화려하고 웅장함, 유명한 사람들,

매력적인 교회 프로그램/ 활동/ 예산/ 파송 선교사의 수 등이

예수님보다 더욱 주목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에 굉장한 영향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당에 꽉 찼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을 받는 것은 좋겠지만,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은 흐려져 버리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목회 프로그램이 좋고 또 사업이 많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자꾸 소홀해집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핵심인데,

사람을 보느라고 어떤 큰 행사를 보느라고

정작 예수님 바라보는 마음은 점점 더 식어져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렇게 빠져버렸는지 모릅니다.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고, 프로그램 중심, 행사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교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점점 더 부흥 되면

그냥 예배 시간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예를 들면, 관중이 운집한 잠실 체육관에 가서도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심하자는 뜻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오히려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여 은혜 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기인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커지면서 오는 위기가

예수님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미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도 기대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람이나 조직이 움직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수나, 사역의 내용과 규모는.. 주님이 정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셔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생각이나 판단, 꿈이나 계획’과 다르게 주님이 인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절박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예배당이, 몇 해 전에는 큰 굴처럼 되어져 있었습니다.

교회를 짓다가 완성되지 못하고.. 그렇게 되어져 있었습니다.

 

강단 밑에서 추운 겨울날 담요 뒤집어쓰고 눈물로 기도하던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예배당이 지어진 것입니다.

 

예배당 인테리어 다 뜯어내고 나면 콘크리트가 나오는데

거기에 성도들의 기도 제목들이 빼곡히 씌어져 있습니다.

아마 그때를 보지 못하던 분들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는 복 받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현실이 너무 어려우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성해질 때가 언제나 우리에게는 영적인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건강하게 될 수 있는 핵심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지금보다도 더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철저히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은 내 곁에 계시지만.. (펀 글)

피에트라 수도원의 긴 아침기도가 끝난 후, 풋내기 수사가 수도원장에게 물었지요.

“기도를 통해, 인간 존재가 하나님에게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수도원장이 말했습니다.

“답하는 대신 하나 묻겠다.

너의 간절한 기도가, 내일 아침 해를 뜨게 하겠느냐?”

 

“해가 뜨는 것은 우주의 섭리니까, 제가 기도하지 않아도 해는 뜰 것입니다.”

 

“그 말 속에 네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네가 얼마나 기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풋내기 수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인즉, 우리의 기도가 쓸모없다는 것입니까?”

 

“절대 그런 말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해돋이를 볼 수 없듯,

하나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셔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님과 실제로 동행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얻습니다.

성령님을 가까이서 느낍니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시대가 열렸지만, 내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