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으신 하나님
시 100:1-6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찌어
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어느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구체적으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열심히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나무의 색깔과 맑은 하늘,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설명해주고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잎, 꽃잎들의 청초함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는 마음속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때로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으로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렌 켈러라는 분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평생 세상을 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분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만일 눈을 뜨신다면 무엇을 먼저 보고 싶습니까.” 그러자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싶고 두 번째는 나를 가르쳐주신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뜨이면 가장 먼저 저 높은 하늘을 보고 싶은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무엇이 아쉽고 무슨 소원이 또 있습니까.
이 소년이 마침내 성년이 되어서 개안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침대에서 생전 처음으로 눈을 감고 있던 붕대를 풀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런데 어머니는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았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왜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표현하고 설명한들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청초한 풀 한포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설명하고 천국을 설명해 줍니다. 천국, 생각해 보십시오. 오죽 찬란한 곳이면 천국이라 말하고 파라다이스라고 말하겠습니까. 말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설명하고 천국을 설명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다음에 우리들이 모두 천국에 갔을 때 그때는 이 눈을 뜬 젊은이처럼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 천국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그 깊고 넓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읽은 시는 시편 전체 150편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00편은 찬양 시라고 부르고 감사의 시라고도 부릅니다. 이 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성전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마음에 떠올리면서 자발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른 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00편을 보면 원망이나 불평이 전혀 없는 시종일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설명해 주던 어머니 심정으로 하나님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로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참 좋으신 하나님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염려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사람들 마음에는 온통 염려와 근심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밤샘하면서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응답이 늦어지거나 없을 때 얼마나 고뇌가 큽니까. 엊그제 어느 목사님이 그런 탄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이제 하나님께 기도할 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목회가 어려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기도도 하고 부르짖어 보기도 하고 금식도 해 보았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기도할 힘도 용기도 잃었습니다”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안타까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면 좋으신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데 다만 내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다가 늦어지고 응답이 없을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부흥사 윌리엄 퀘일이라는 분이 한때 심한 고통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때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고통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길과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며 기도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다, 이제 너는 안심하고 잠이나 자거라, 긴긴밤 나 혼자서 깨어서 풀어주마“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하나님이십니까. 이 하나님은 분명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어려서 죽어가는 아들을 앰뷸런스에 실려 보내고 떠나는 차를 바라보면서 땅에 주저앉아 풀포기를 붙잡고 안타깝게 기도하는 어느 노모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그 노모가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어린 마음인데도 하나님은 저 노모의 기도만큼은 들어주실 것이다 하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며칠 후 살아서 그 앰뷸런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염려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뜻과 내 생각보다 더 깊게 생각하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나의 생각, 나의 소견, 나의 계획은 참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앞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의 앞길을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끌어안고 밤을 새워 고민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키에르 케골은 인간은 그렇게 고민하며 걱정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 그리고 배려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성숙한데 말입니다. 신앙의 삶은 하나님께 나의 앞길과 미래를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은 그러지를 못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면 혹시 실패하게 하고 어렵게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의구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목사님을 찾아와 그런 상담을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혹시 십자가를 지라 하면 어떻게 하나, 아들을 달라하시면 어떻게 하나, 나의 삶을 어렵게 하시면 어떻게 하나 싶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진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 다가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와서 어머니에게 오늘 나는 어머니의 원하는 일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그 어머니가 생각하기를 “오늘 내 아들에게 힘든 일을 시켜야 하겠구나”하고 생각할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그 어머니는 되도록 아들에게 멋진 하루가 되게 해 주어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자식에게 환란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면서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면 그 하나님이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그 삶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할 것입니까.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의 종은 순종하겠나이다” 하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정말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앞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도 깊고 넓은 배려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필요시 무거운 짐도 주시는 하나님
자식에게 언제나 쉽고 평안하고 안일하게만 해 주는 것만이 자식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아픔도 힘든 일도 수고도 필요합니다. 채근담에 보면 역경과 순경이란 말이 나옵니다. 순경은 평안함, 안일함, 풍성함의 삶을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평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그것이 마침내는 칼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경은 어렵고 힘든 삶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순간 힘들고 고되고 어려움을 경험하며 살아가다 보면 후에는 그 고난의 삶이 참 공부가 되어 눈이 열리고 철이 들고 생각이 깊어지는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도자기가 반짝거리고 광채가 나는 것은 불가마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영국 국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공장에 가 보니까 한편에 반짝거리는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고 또 한편에는 무광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왕이 이 도자기는 왜 광채가 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공장장이 대답하기를 “이 도자기는 아직 불가마니에 들어가지 않아서 광채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광채 나는 도자기는 불가마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불가마를 통과한 도자기는 연단을 받아서 광채가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편안하고 행복하고 온실 같은 환경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힘들지만 무거운 짐도 주십니다. 새는 무거운 두 개의 날개 때문에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개가 무겁다고 떼어 내면 새가 어떻게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토머스 램비트 라는 의사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일합니다. 산골짜기에 급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한 원주민이 그 급류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위험천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주민이 골짜기를 건너기 전에 큰 돌 하나를 가슴에 안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급류 속을 가슴에 지난 무거운 돌 무게 때문에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생들에게 날 마나 쉽고 가볍고 평안한 생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태풍에 실려 오는 무서운 비바람도 주시고 추위와 더위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그 어려운 일들, 시험들, 고난들을 맞이할 때는 어렵지만 그런데 그것들이 오히려 오묘한 하나님의 축복의 삶으로 바꾸는 자료로 작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전화위복의 복이라고 했고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만사를 합동해서 유익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는 땅콩 생산지입니다. 그런데 앨라배마 주 엔터프라이즈라는 작은 도시 재판소 앞에는 “우리는 목화를 갉아먹었던 벌레들에게 감사한다, 이 벌레들은 우리에게 번영의 기회를 주었고 하면 무엇이든 된다는 신념을 주었다, 목화 벌레들이여, 다시 한 번 너희들의 수고에 감사한다” 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원래 이 도시는 목화생산지였습니다. 그런데 1895년 어느 날 목화벌레들이 침입해 와서 그 넓은 땅에 재배한 목화나무들을 갉아먹어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기근과 실직사태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사람들이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새 길을 찾아 모색하던 중 그 넓은 땅에 땅콩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콩농사가 너무나 풍작을 이루어 전화위복이 되어 아주 부유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 사람들이 목화 벌레들에게 감사하면서 비석까지 세워준 것입니다.
때로 이 세상에는 환란이 오기도 하고 고난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무거운 짐들이 사람들에게 새 길을 주기도 하고 전화위복의 은혜를 입게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무거운 짐을 주시기도 하고 고난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지경에 처하든지 합동해서 유익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약할 때 힘이 되시는 하나님
사람은 강할 때, 일이 잘될 때,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때는 찾아오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비율이 아주 낮습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살 때는 하나님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찾아오셔도 모세는 하나님을 모른 척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전과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40년 살아가는 동안 완전히 새사람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산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기까지 80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까”하고 그는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제 애굽으로 가서 고난 받는 네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강하고 힘이 있고 자만에 빠져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직도 내 힘으로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하고 자만할 때는 처다 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때로 내가 약하고 부족하고 힘들 때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은혜를 입을 때이고 복을 받을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장애인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장애인임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의 능력 없음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에게 힘주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성숙한 생각이고 판단입니까.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찌어다,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감싸시고 잘 인도하실 것입니까.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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