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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섬기러 오신 예수

by 【고동엽】 2023. 1. 14.

섬기러 오신 예수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

 

 

 

                       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로다.            

 

 

 

 

 

 

 

 

오늘은 2005년도 마지막 주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4주간의 대강절을 보냈습니다. 대강절은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기도로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되신 그대로 호젓하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모습을 보면 그 모습 속에 상당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3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초라하게 태어나신 일”입니다. 여행 중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모습에 상당한 메시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신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목수의 집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부분 때문에 예수님은 두고두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당시 이름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구간과 가난한 집, 여기에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상징들입니다. 영광을 받으러 오셨다면 오실 때 요란하게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오신 것은 영광과는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아주 짤막하고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로다.

 

 

 

 

 

 

 

 

                                  

 

 

 

그렇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을 주고 세상을 즐겁게 하는 일이 이 섬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섬기신 모습이 대표적으로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병도 그냥 병이 아니고 원초적인 병자들을 골라 고치셨습니다. 나병환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귀신들린 자, 소경, 저는 자 등입니다. 원초적인 병을 가진 병자들의 고민은 대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병을 고친다고 행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망스런 일입니까. 가끔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보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속상할 때가 참 많습니다. 도무지 도와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방할 때는 고치는 능력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또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겠지만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40일 금식기도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종횡무진 돌아다니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무지합니다. 육신의 세계도 잘 모르지만 영적인 세계에는 더욱 무지합니다. 그 무지한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고 나의 종말을 알게 하셨고 내가 살아가야 할 생존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산상수훈에서 깊이 있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위로”하셨습니다. 인간은 위로를 받아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상한 마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압제당하고 나라를 잃고 살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뭔가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로마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저 사람이라면 로마를 물리치고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해방하게 해서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화려했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호산나를 부르면서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은 위로자가 아니고 정치적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강한 힘을 가진 정치적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정치적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만 있으면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 아닙니까. 일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 무조건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몸도 자기가 무질서해서 다쳐 놓고 병들게 해 놓고 고쳐달라고 떼를 씁니다. 술을 물마시듯 하고 담배를 두 갑씩 피우고 주일도 무시하고 돈을 벌겠다고 일하다가 병이 생겼는데도 찾아와 무조건 고쳐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때 하나님도 참 입장이 곤란하실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로자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30년 동안 침묵하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계시다가 30세가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병자들을 고쳤고 기적을 일으키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위로하신 이유는 복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임”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은총입니다. 사람이 잘 사는 것, 성공하는 것, 건강한 것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잘 살고 잘 먹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 지식을 가지는 것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조금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했다는 것, 그것이 뭐가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이 있으나 없으니 짤막한 인생은 그대로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믿음이 아주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다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천국엘 가게 됩니다. 천국에 도착하니까 문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거스틴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다가와서 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머릿속에는 온통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잠을 깨 보니 꿈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는 지금까지 믿음이 좋은 줄로 알고 살아왔는데 객관적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평가를 받고 보니까 자기는 지금까지 헛 믿음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지성이 믿음인줄 알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지성으로 믿음을 대신하는 신앙인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지식이 있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믿음이 창백하고 용기가 없고 구체적인 고백이 없습니다. 이론은 앞서는데 용기가 없고 참여가 없고 헌신이 없고 눈물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지성신앙입니다. 그 믿음이 어거스틴이 착각한 믿음입니다. 머릿속에 온통 키케로의 철학, 신학, 교리, 교권, 경건, 역사들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백이 없고 눈물이 없고 용기가 없고 헌신이 없고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키케로의 철학만으로 가능하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구차하게 오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고치고 위로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철학으로 율법으로 수양으로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로 보이시고 치료하시고 직접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며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우리의 할 일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구현하고 실천하고 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신의 병을 앓는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해서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병원에서 고치는 병 보다는 고치지 못하는 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정신의 병, 마음의 병은 병원에서 약으로 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이런 병은 모두 신앙으로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 증오, 파괴가 나타납니다. 살인, 증오, 파괴 등의 모습은 모두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악화되어 나타나는 병입니다. 이 병들은 마음에 신앙이 들어가면 다 고쳐지는 병입니다.

 

 

 

또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 가운데 가장 큰 사명은 전하는 일입니다. 아주 좋은 음식점에 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은 친구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주 먼 곳일지라도 데리고 가서 맛을 보게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렇게 데리고 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점에는 돈을 써가며 잘도 데리고 가는데 교회에는 데리고 갈 줄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전도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점에 친구를 데리고 가듯 데리고 오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전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에 이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주께서 하시던 일을 마무리 하는 일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특히 그 시대에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는 할 수 있는데 까지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할일이고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교회가 구제를 하지만 성탄절 헌금은 전액 이웃에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하면 직무유기입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일은 세상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때 이 세상이 따뜻해지고 조화가 조성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며 그때 이 세상에 감동이 나타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저는 며칠 전에 CEO들의 성공담을 기록한 책을 읽었습니다. 정진구라는 CJ식품서비스 총괄사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 성공은 함께 하는 삶에서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카스텔라가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카스텔라를 만들려면 재료로 계란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소풍 때만 되면 계란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카스텔라를 만들기가 참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알아보니까 계란이 나환자촌에서 90% 이상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직거래를 상담하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외부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환자촌으로 직접 들어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환자들을 목욕시켜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마음을 열어 계란 직거래에 성공해 삼립식품이 카스텔라로 인해 대 회사로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함께 할 때 거기서 감동이 주어지고 마음이 열리고 공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삶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함께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환자 전도하면 다미엔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하와이 군도에 몰로카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몰로카이라는 말은 “하늘을 꿈꾸는 섬“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몰로카이 섬이 100년 전만 해도 악명 높은 나환자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도 탈출 할 수가 없습니다. 섬 주변에는 모두 암벽이고 주위에는 물살이 거세어서 죽어야만 나오는 곳입니다. 몰로카이 섬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그 섬에 다미엔이라는 신부가 33세의 나이로 전도하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갑니다. 들어갔는데 아무도 그를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사랑을 설파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정댐뿐이었습니다. “사랑, 그것은 당신들처럼 건강한 사람들의 잠꼬대야.

 

 

 

다미엔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미엔은 그때부터 기도를 고쳤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저들이 앓고 있는 나병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그는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비로소 나병이 옮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9세 때입니다. 그는 기도대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이 발병한 후에 다미엔은 비로소 당당한 마음으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강단에 서서 그가 외친 첫마디가 “형제들이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일생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하나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때 그 설교 한마디가 그곳에 모여온 많은 나병환자들의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 흘러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미엔은 끝까지 치료를 거부하고 결국 나병으로 죽어서 그 섬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 벨기에로 갑니다. 그런데 섬에 남아 있던 나환자들이 이 다미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남아있던 나병환자들이 다시 그의 시신이라도 보내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래서 고향에 묻혀있던 다미엔의 오른 팔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곳 나병환자들은 그 팔을 몰로카이 섬 땅에 묻고 그곳에 묘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묘비에 나병환자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는 나환자들의 아버지였다”라고 썼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어설프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설프게 이웃과 함께 한다고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큰 소리로 비웃음을 당합니다. 돈 몇 푼주고 구제했다고 사진이나 찍는 것으로 다 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마음도, 생각도, 삶도, 정신도, 뜻도 함께 해야 그것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접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한 가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세상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무능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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