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신앙 성숙한 삶 (1)
행 12:1-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제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금년 여름은 참 무더웠습니다. 매일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였는데 잘 이겨낸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는 조용히 열매들이 여무는 시기를 맞았습니다. 성숙의 계절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여물고 성숙해지는 모습은 보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신앙까지 성숙해지면 더 향기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신앙과 성숙한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28살에 군에 갔습니다. 목사 안수 받고 군목으로 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갔습니다. 군에 갈 무렵 그때 제 몸이 쇠약해서 군에 가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군에 갔습니다. 가서 신검을 받는데 군의관이 그냥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몸으로 훈련받으면 틀림없이 도중에 쓰러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훈련받을 수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도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훈련받다 쓰러져도 책임지지 않습니다”하고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입대해서 훈련을 받았는데 내가 왜 쓰러집니까. 훈련받을수록 마음이 강해지고 나는 해내야 한다하는 마음 때문에 날로 더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두주 간쯤 지나니까 나와 같이 갔던 옆 사람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M1 소총을 메고 그 사람을 부축하고 매일 훈련장을 뛰어 오고 갔습니다. 그렇게 부추기고 뛰고 할 때 힘들기도 했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모두 내가 쓰러진다고 관심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쓰러진 것이 아니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내 이웃을 도와 훈련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러니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때는 정신적으로 무장되어서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재미있고 행복하고 생각나고 그립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누구를 돕고 힘이 되어주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삶을 살면 힘이 솟습니다. 용기가 나옵니다. 보람의 샘이 흐릅니다. 삶이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 행복함과 기쁨과 즐거움의 삶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데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배를 타고 놀러 갔습니다. 가다가 파도가 거세지면서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할머니 한분이 그만 물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 때 한 할아버지가 뛰어내려 그 할머니를 구해냈습니다. 그때 모두 용기 있는 할아버지 모습에 감동받아 박수를 쳤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행동은 박수 받을 만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배에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등을 떼밀었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에는 비록 누군가 떼밀어서 타의에 의해서 물에 빠진 한사람의 생명을 구해냈어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함께 하는 삶이고 즐거운 삶이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건강한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삶은 이렇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신앙이 성숙해서 영적으로 기도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삶이 가장 성숙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중보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서 진정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중보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 중보의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중보의 삶은 내가 누군가를 돕고 지팡이가 되어주고 함께 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면 중보의 기도는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눈물로 나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중보기도를 영어로 “Intercession 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양편의 가운데 위치해서 서로 연결해 주는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앞으로 이 중보의 삶을 몇 주 동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성숙한 삶, 성숙한 신앙, 성숙한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줌으로 그가 힘이 되고 용기가 주어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삶이 얼마나 품위 있고 폼 나는 삶입니까. 그래서 신앙 중에서도 가장 성숙한 신앙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중보의 신앙입니다.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세상에는 뭔가 도움이 요청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움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힘이 되어주고 안내해주고 함께 하여 소망을 주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고 이런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먼저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중보의 소명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고 사명을 느끼는 삶이 소명을 자각하는 삶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그래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고 깨닫는 날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1939년 뉴욕 항을 떠나 젊은 목사 본 훼퍼는 고향 독일로 향합니다. 지금 고국에서는 히틀러가 광분해서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독일 교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히틀러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깊이 잠들어 있는 고국을 잠에서 깨우기 위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결심하고 나니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장래에 대해서 그동안 파도처럼 일던 몹시도 불안하던 마음이 이제야 잔잔해졌다. 이는 내가 갈 길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본 훼퍼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과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갈등하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확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독일에 도착해서 잠자고 있는 독일교회를 일깨웁니다. 히틀러의 죄상을 신날하게 공격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본 훼퍼는 “바르멘 선언”하고 나서 투옥됩니다. 그때 미국은 탁월한 학문적 자질을 가진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 본 훼퍼는 옥중에서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니온 신학교 교장에 편지를 씁니다. “나는 내가 독일에 돌아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이 젊은 목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39세의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일한 용기 있고 성공한 목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걸어갈 방향이나 목표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중보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이사야서를 보면 백성들이 너무 많이 타락해서 하나님이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누가 이 백성에게 나아가 저들을 깨닫게 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자신 있게 나서서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결국 이사야는 목숨을 내놓고 세상에 나아가 회개를 외칩니다.
요나서를 보면 니느웨성의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요나를 불러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를 촉구해 보라, 가서 한 번 더 외쳐 회개를 촉구해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회피했습니다. 도망갔습니다. 멀리 바닷가로 도망가서 큰 배 밑창으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요나의 행동이 괘씸했습니다. 지금 니느웨성에 사는 20만 명의 생명이 심판받아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있는데 가기 싫다고 도망가 숨어버렸습니다. 그 행위가 아주 괘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추적해서 배 밑창에 숨어 잠자는 요나를 끄집어내 바다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느니라.”
그랬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의외로 순순히 회개했습니다.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20만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 직전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중보의 기도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중보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것이 협동의 삶이고 중보의 삶이고 함께 하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매일 모이고 기도하고 돕고 나누고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믿음을 성장시키고 교제를 넓히고 예수의 사랑을 나누고 신앙을 굳게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 즐거웠고 행복해했고 감사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려면 초대교회의 모습을 예로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갈수록 이기적이고 개인적이고 옆 사람을 모른 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흩어지고 개인화, 간단화, 형식화 되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세상이 이렇게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협동의 삶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서로 힘이 되어주고 안내자가 되어주고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내 안에서 힘이 솟고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함이 만들어지고 조성되는 것입니다.
미국 에모리 대학 행동과학 연구팀이 사람의 행동 중 협력과 배신의 행동을 할 때 어느 쪽이 인체의 건강에 유익한가를 조사했습니다. 20세에서 60세까지 여성 26명에게 협력과 배신할 때 뇌의 움직임을 MRI로 찍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협동하고 협력할 때는 뇌에서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신경조직이 최고조로 활성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신하고 나쁜 감정을 가졌을 때는 극도로 저하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협동의 삶이 주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함께 더불어 돕고 협동하며 사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성숙한 삶의 모습입니다.
중보기도와 기적
사람이 이렇게 살면 반드시 그 삶에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에 뒤따르는 기적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보의 삶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이고 복입니다. 예수님도 두세 사람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면 따뜻하다고 했습니다. 삼 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복입니다.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이 중보의 삶에는 이런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이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내친김에 베드로도 죽이려고 구속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순교를 했는데 베드로까지 순교하면 복음전파에 차질이 빚어집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성도들이 그 밤에 다락방에 모여 아주 뜨겁게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날 그 다락방의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모두 생사를 걸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밤에 옥중에서 기적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 밤에 천사를 동원해서 감옥 문을 열어 베드로를 무사히 탈출시키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와 다락방에 와 보니까 모두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밤에 기도하던 제자들이나 베드로나 얼마나 뜨겁게 그 감격을 서로 나누었겠습니까. 그것이 중보의 기도에 나타나는 기적이고 은혜이고 복입니다. 중보의 삶, 중보의 기도에는 이런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보의 기도에는 이런 기적을 동반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기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할 때에는 응답이 주어지는 것 뿐 아니고 반드시 이런 기적이 수반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한 백부장이 예수께 와서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내 종이 중풍병으로 누워있으니 고쳐주십시오. 당신이 직접 가실 것도 없이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고침 받을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이런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종이 병들었으면 내 버리면 그만인데 그 종이 고침받기 위해서 주인 백부장이, 백부장이면 부하가 백 명이나 되는 군 지휘관을 말하는데 그 주인이 예수께 직접 찾아와 종의 건강을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내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나이다, 고쳐주십시오. 고생하면서 가실 것도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고쳐질 줄 믿습니다.”
그 말에 예수님이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느니라, 네 믿음대로 되라, 그랬더니 그 시로 하인이 나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중보의 삶에는 이런 기적 일어납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중보의 삶과 기도로 교회가 부흥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진정 중보의 마음이 있는 곳에는 하늘이 움직이십니다. 하늘도 감동하십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위력이고 힘이고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의 현장을 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이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이런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힘이고 신비이고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서로 돕고 협력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로 발전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한 나라입니다. 건강한 시민이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삶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소망적인 나라가 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그 시대에 할 일 다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삶이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하는 삶입니다.
오늘같이 서로 끄집어 내리고 넘어지게 하고 편이나 가르고 국론을 분열시키면 안 됩니다. 거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합세해서 휩쓸리며 다니면 안 됩니다. 이런 때 진정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 난국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을 다 이루는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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