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도마의 한계

by 【고동엽】 2023. 1. 13.

도마의 한계  

 

 

 

 

 

 

 

 

                                      20:24-25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 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

 

 

 

                   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

 

 

 

                   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놓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

 

 

 

                   겠노라.      

 

 

 

     

 

 

 

 

요즘 정치시즌입니다. 가는 곳마다 정치이야기 입니다. 정치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는 주부들이 더 난리입니다. 더 적극적입니다. 옛날에는 대통령 선거도 남편에 따라 온가족이 움직이더니 이제는 아내들의 요구에 따라 온가족이 움직일 정도입니다. 참 재미있는 시대입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또 재미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체면이나 자존심을 불문하고 이 사람에게 갔다 저 사람에게 갔다 합니다. 어제는 이쪽이 유리하니까 이쪽으로 왔다가 오늘은 저쪽이 유리하니까 저쪽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그런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스 한사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목숨을 바쳐가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믿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도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 한사람입니다. 이 도마를 보면 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도마를 한번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마가 나와 얼마나 닮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후에 도마가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너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녀가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한말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고 말을 합니다.

 

 

 

아주 철두철미 부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세 가지 믿음의 조건을 얼마나 만족하게 채우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내용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살아가는 삶에서, 마음으로, 인생에서, 영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 얼마나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현재 예수를 신뢰하고 있는 그 신뢰 수준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살아가다가 아주 어려운 사건을 만나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예수께 의지하는 강도가 얼마나 되십니까. 이것이 믿음의 기초입니다. 만족할 만큼 예수를 신뢰하고 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주 좋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불신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대로 믿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하고 고백을 한다면 예수를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요구와 약속들을 모두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모두 수용하고 받고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믿고 수용하십니까. 믿으면 살아가다가 실패를 했어도 아픔이 주어져도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스와 노와 무응답입니다. 기도를 했더니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이 아닌 줄 알고 포기하겠습니다“하고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도마가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 받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잘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별 문제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사후 부활하신 후 부활의 예수를 그는 완전히 부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철두철미하게 부정으로 일관합니다. 예수를 몰라도 그렇게 철저하게 모릅니다. 사전에 예수님이 나는 죽고 3일만에 살아나리라고 그렇게 부활을 외쳤는데도 도마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신뢰의 기반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사시가 되니까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과 신성과 능력과 기도의 응답을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나의 구주 되시는 이 모든 일체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도마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그 예수를 믿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한계였습니다. 오늘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도마 같은 신앙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고 아픔의 상징이고 고뇌의 상징입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십자가 빼놓으면 믿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대부분 십자가는 빼고 안일과 평안과 풍성함을 구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생활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기도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주님 나는 젊습니다, 건강합니다, 필요하시다면 주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그런 기도 해 보았습니까. “주님 내게 돈이 많습니다 필요하시면 사용하십시오”하고 기도해 보았습니까. 또 “주님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필요하시다면 저를 사용하십시요 순종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 기도 속에 십자가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은 믿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도 아는 일입니다. 귀신들도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이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평안을 구하고 형통을 구하고 넉넉함과 부요와 화려함을 구하고 안녕 만을 구하는 신앙인이라면 그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거기 어디에 십자가가 있고 주님의 뜻이 있습니까.

 

 

 

 

  주님의 뜻에는 그런 형통이나 평안이나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십자가가 수반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복은 때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일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통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보니까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킬 좋은 기회를 자꾸만 놓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그 예수를 팔아버립니다. 그것이 믿음입니까. 유대인들이 어제는 예수를 열렬하게 환호했습니다. 왜 환호했는가 하면 예수에게서 혁명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뭔가 기대해도 되겠다 싶어서 그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뜨겁게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니까 그 능력많던 예수가 너무 무력하고 기회를 자꾸만 놓치고 혁명할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를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가 없는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예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신앙은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기도 속에, 장래 희망 속에, 신앙인의 삶 속에 십자가가 없으면 그것은 믿음도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는 그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없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평안만 구하고 형통만 구하고 잘되기만을 구하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는데 보면 참 부러울 정도로 열심히 합니다. 보면 서로 재미있게 연애를 합니다. 그러다 결혼해서 1년 정도만 살면 원수처럼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 싸우는 이유가 서로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에게 사랑만 해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관계가 잘 유지되겠습니까.

 

 

 

어느 책을 보니까 남녀가 앞으로 결혼할 대상에게 바라는 마음을 적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요구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나만 사랑하고 다른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는 여자, 우리 부모님 공경하고 잘 돌보는 여자, 남편도움 청하지 않고 가사 일을 잘 하는 여자,  요리 잘하는 여자, 부지런해서 집안을 늘 깨끗하게 잘 정돈해 놓는 여자, 옷 사는데 돈 많이 쓰지 않는 여자,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어주는 여자, 비가 오면 우산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여자, 내가 아무리 늦어도 저녁먹지 않고 기다리는 여자, 밤늦게 친구 데리고 와도 불평하지 않는 여자, 노래 잘해서 주부열창에 나가 일등상 타서 나를 하와이에 데리고 갈 수 있는 여자, 밤에 도둑이 들어와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 내가 돼지 목따는 노래를 해도 당신은 언제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아요 라고 말해주는 여자” 등입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돈을 많이 버는 남자, 가사 일을 즐겨하는 남자, 기꺼이 처가 부모 부양할 수 있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조용히 듣고 앉아있는 남자, 아이 잘 키우는 남자, 퇴근 후 집안 청소 잘하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등입니다. 여러분 이 내용들을 한번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어디에 십자가가 들어있습니까. 있다면 오직 나만 있을 뿐입니다. 나에 대한 배려뿐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싸우고 가정이 불화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도마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따라다녔습니까. 그것은 세속적인 기대 때문입니다. 베드로, 유다, 야고보 모두 똑같습니다. 모두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죽도록 희생하면서 언젠가 그 날을 위해서 오늘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날이 왔습니다. 왔는데 보니까 영광이 아니고 그들 앞에 십자가가 턱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도망간 것입니다. 그리고 도마는 그 십자가를 거쳐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평소 도마가 십자가를 알았더라면 이 시간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이 왔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 없는 믿음은 이렇게 공허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속에 이 십자가가 있습니까. 이점을 한번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신앙이 점검됩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를 따르는 일” 입니다.

 

 

 

 

 

 

 

 

알았으면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은 머리로는 참 많이 압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따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한계입니다. 베드로는 참 열렬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회피했습니다. 알기는 많이 알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고백을 하고 나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천국의 열쇠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몸으로 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무슨 제자이고 믿음입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은 고향바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순간 그 십자가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오늘의 이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주저하지 않고 올라가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비로소 진정한 제자 베드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비난도, 수모도, 손해도 감수하는 것이고 또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으로 믿음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후에 제자들이 없어져서 시체처리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나타나서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다 자기 묘에 안장을 합니다.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일은 아는 차원이 아닌 행동하는 차원입니다. 니고데모도 예수께서 죽어 장사를 지내지 못할 때 몰약을 들고 좇아왔던 사람입니다. 모든 불이익 감수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손해가 따르고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모험이 따릅니다. 그 손해를 감수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도마는 참 맹랑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소극적인데 예수를 부정하는데는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의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그의 손바닥의 못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 그 말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부정입니까. 베드로는 소녀에게 ”나는 결단코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까지 하며 부정했습니다. 오늘 신앙인들도 보면 믿는 일에는 아주 소극적입니다. 그런데 부정하는 일에는 아주 강력합니다. 세상에 내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때는 아주 소극적입니다. 그런데 나를 감출 때는 아주 철저하고 적극적으로 나를 숨깁니다. 그것이 무슨 믿음입니까. 행동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도는 기도도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느 정도입니까. 오늘은 나의 믿음을 한번 예리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예수를 신뢰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내용이 있어야 믿음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이 십자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인 명설교편◑ > 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큰 힘  (0) 2023.01.13
더불어 평화하는 삶  (0) 2023.01.13
도망가는 제자  (0) 2023.01.13
동방박사들의 성탄  (0) 2023.01.13
두 길  (0) 2023.01.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