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764회] -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도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니라.” (창세기 18:14)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애급 사람 여종 하갈이 있었습니다. 80이 넘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이 지내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던 사라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드려 보내 아이들 갖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을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바라고 있었으나 감히 청하지 못한)이라 할까요, 하갈과 동침하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 이스마엘의 출생은 아브라함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아가, 전 세계 기독교권과 기타 다른 종교에까지 심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고, 주고 있으며, 또 계속 될 불씨가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크게 번성하게 될 것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 네게서 민족들이 나오고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드디어 여호와의 사자들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하고,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적자(嫡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사라가 본즉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불평을 하여, 여종과 그 아들을 쫓아냈습니다.(창 21:)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일 간의 갈등은 그 후손에게 이르러, 이스라엘 민족과 후에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민족으로, 나아가 유대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또 이슬람과 기독교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11세기 십자군 전쟁은 결정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간격을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넓혀, 영구히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테러와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가 열두 살 되었을 때, 여행 중인 시리아 출신 기독교 수도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호메트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세히 일러 주었습니다. 마호메트는 수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수도자가 떠나간 후로는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곧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 때,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성경만 있었다면, 마호메트가 성경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영접했을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세계 역사는 큰 변혁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역사에서는 ‘만일’-if-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만일 ‘그 때 그랬다면’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번역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아라비아어 성경이 있었다면....만일 마호메트가 성경을 읽었다면....만일 마호메트가 주님을 영접했더라면.....
이슬람과 기독교 건의 갈등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드려 보내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살았다면 불과 10여년 후에 이삭이라는 적자를 얻게 될 것인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하갈을 남편에게 들여보내, 가문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불행의 씨앗을 배태(胚胎)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을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원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앞날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기도합시다. 샬롬.
L.A.에서 김 인 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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