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의미 있게 살라 (창세기 5장 1-20절) < 세월을 아끼라 >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이 930세를 살았던 것을 필두로 셋의 후손이 다 수백 년 이상 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처럼 초기 인류의 장수를 생각하면 부럽지만 사실 장수의 복보다 더 큰 복은 건강하고 의미 있게 잘사는 복이다. 살면서 가장 피해야 할 삶이 ‘무기력한 삶’이다. 몸이 조금 약해도 얼마든지 기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언제 기력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나도 동참해서 기쁨이 넘칠 때 기력도 넘치게 된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은 질병과 무기력과 기억력 저하 가운데 장수하지 않고 건강과 기력을 유지하며 장수했다. 본문에서 계속 반복되는 어휘는 “OO를 낳은 후 몇 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는 어휘다. 나이가 많았어도 오랫동안 자녀들을 낳을 정도로 기력이 넘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짧게 살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이다. 에녹이 산 날은 365년으로 당시 다른 사람의 약 3분이 1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
우리는 당시에 가장 적게 살았던 에녹보다도 훨씬 적게 살기에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남은 인생으로도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누구나 복되게 살 수 있는 시간과 기회와 재주가 있다. 재주가 전혀 없어 보이는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가 있듯이 누구나 남보다 탁월한 점 한두 가지는 있다. 그 재주를 잘 살려서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가면 하루가 천년 같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은 재주가 없어 실패하기보다 목적과 열정이 없어 실패한다. 목적과 열정이 없어서 세월을 낭비하면 유능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때가 악하고 힘들게 느껴질수록 더욱 세월을 아껴서 나의 남은 날이 하나님 앞에 계수된 날이 되도록 힘쓰라. 육신의 나이는 60세인데 55세에 예수님을 믿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계수하는 나이는 5살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헌신한 시간만 계수하신다. 그러므로 장수의 복도 구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력과 건강과 재주와 소유로 남은 날을 힘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이미 늦은 인생은 없다. 모세는 80세부터 멋지게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멋진 삶의 꿈을 천국 갈 때까지 잃지 말고 남은 삶을 활용해 거룩한 작품을 남기라. 건강과 기억력이 있을 때 힘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에 나도 동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들려고 기도하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 내 가슴은 뛰고 기력은 돌아오고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보람과 행복이 넘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계수되는 날도 많아질 것이다.
< 탐욕을 버리라 >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 족보의 사람들은 한 명도 나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본문에 있는 셋 족보의 인물들은 일일이 그 수명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불신자의 삶은 기억하지 않고 성도의 삶만 온전히 기억하신다는 암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모태신앙으로 40년 믿었는데...” 하고 자랑하지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면 4년 밖에 계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안타까운 시간낭비다. ‘신앙의 연조’를 자랑하기보다 ‘신앙의 정조’를 자랑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때 하나님이 그 삶을 계수하신다.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무엇보다 버려야 할 것이 돈에 대한 탐욕이다. 왜 돈에 탐욕을 가지는가? 돈에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으면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리기가 비교적 쉽다. 어떤 사람이 매일 화투만 치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바둑을 배웠다. 그리고 바둑의 변화무쌍함에 매료되어 점차 화투를 끊고 바둑만 두었다. 어떻게 화투를 끊을 수 있었는가? 화투보다 바둑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성인군자가 “화투를 치지 말라. 패가망신한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화투를 끊기 어렵지만 화투보다 더 재밌는 놀이를 찾으면 점차 화투에 대한 관심을 잃는다. 관심의 정도는 가치의 정도와 비례한다. 돈에 대한 욕구도 돈에 대한 가치의 정도와 비례한다. 그래서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으면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리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다.
고양이는 생선을 보면 환장한다. 그러나 생선을 무수히 살 수 있는 천만 원짜리 수표에는 관심이 없다.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생선 한 마리를 함께 놓으면 고양이는 당장 생선으로 달려든다. 사막의 수도사보다 더 돈에 초연한 고양이다. 어떻게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가? 고양이는 돈보다 생선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으면 탐욕을 버리기가 비교적 쉽다. 물론 돈이 실제로 아주 유용하지만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도 많다. 선한 인격이나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나 헌신적인 믿음은 돈보다 가치 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리려면 ‘가치관의 상승’을 꾀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인에게는 그 상승이 쉽지 않다. 아담의 타락으로 가치관이 전락해서 인류는 원초적으로 타락한 가치관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치관의 상승’을 이룰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 소망을 가져야 한다. 아담의 원죄는 인간의 가치관을 하락시켰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가치관을 상승시켰다. 예수님은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했다(마 13:44). 어떤 사람이 밭에서 그 보화를 발견한 후 그것을 얻으려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자기 소유보다 더 가치 있는 보화를 발견했기에 자기 소유를 쉽게 처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를 최고로 여겼지만 예수님을 알고 가치관이 상승하자 예수님을 얻기 위해 그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다(빌 3:8). 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려면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가치관을 상승시켜야 한다. 그처럼 헌신적인 ‘상승된 가치관’으로 위대한 인물의 길을 예비하라.
< 변화된 삶을 추구하라 >
한 유명인이 있었다. 그는 한때 지독하게 돈을 추구하며 계산적으로 살았다. 그러나 늘 가슴이 텅 빈 상태였다. 그러다가 자기와 반대인 사람을 만나고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때부터 가치관이 변하면서 사람을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과거만 생각하고 변화된 모습을 냉소했다.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다. 사람들은 그의 변화의 모습을 냉소하며 그저 이미지를 높이려는 쇼라고 오해했다.
그런 오해가 계속되어도 그는 조용히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예전의 가정사만 생각하고 비판했다. 사람은 사람을 모를 때가 참 많다. 꽤 오래 만나고 사귄 친구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밀한 가정사는 남이 더 알기 힘들다. 그래서 나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은 남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목회자도 그 문제에서만은 쉽게 충고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됨이다.
강철 같은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도 가정 문제 앞에서는 기가 죽고 풀이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의 가정사를 쉽게 판단하지 않는 선진 의식을 훈련하라. 공적인 직무와 관련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면 남의 가정사에 대해 제3자가 말로 쉽게 비수를 꽂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양심 고백이 진실하고 그 고백이 작은 변화로라도 뒷받침되면 그 용기를 평가해주라.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상당히 적기 때문이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점차 자아를 상실하고 자리와 위치가 만든 겉포장의 삶을 살기 쉽다. 그런 유명인이 가끔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장대한 여정을 출발할 때가 있다. 그 용기를 냉소하지 말라. 작은 변화를 보고도 함께 기뻐해줄 때 더 나은 변화가 이뤄지고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맑아지고 밝아진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진실한 양심 고백도 보여주기 위한 쇼로 여길 때가 많다. 세상의 그런 속성을 알고도 하나님을 붙잡고 용기 있게 양심 고백을 하면 그때부터 ‘그 인간’은 ‘그 사람’이 된다.
필자의 아내는 이승철의 <그 사람>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이제까지의 은혜롭고 행복한 삶과 사역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사람’ 때문임을 알고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내 심장을 찾아준 사람// 그 사랑 지울 수 없는데/ 그 사랑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람 내 숨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떠나가네요.” 그 노래에서 ‘그 사람’이란 표현은 애정이 물씬 풍겨난다. 반면에 ‘그 인간’이란 어투는 비하적인 어투다. 성도는 예수님을 만나 ‘그 인간’의 삶이 아닌 ‘그 사람’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남의 양심 고백을 냉소하는 사회는 좋은 인물을 낳지 못하고 앞날도 어둡게 만든다. 변화되기 전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최악의 박해자였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지만 한 동안 사람들은 그의 고백의 진정성을 불신했다. 그래도 묵묵히 자기 고백을 변화된 삶으로 보여주어서 지금까지 2천년 영향력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변화되기 전 아브라함도 우상 도시에서 우상 문화에 젖어 살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어 꾸준히 믿음의 길을 갔기에 지금까지 4천년 영향력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전의 죄와 허물을 솔직히 고백하고 변화된 삶을 향해 나아가면 그 고백을 냉소하거나 쇼라고 단정하지 말고 응원해주고 지켜봐주는 것이 사람됨이다. 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해 실망하는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책임감이 없고 더 나아가 책임 회피까지 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그런 삭막한 세상에서 양심 고백을 하고 고백적인 삶을 살려는 사람을 보면 고맙게 여기라. ‘그 인간’이 ‘그 사람’이 되는 여정을 출발했는데 계속해서 예전의 모습만 떠올려 “그 인간!”이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
인간 세상은 청정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유명인에게 따르는 비판과 오해는 어쩌면 숙명이다. 그런 비판과 오해가 있어도 계속 믿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추구하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인정할 날이 온다. 특히 은밀하게 선행을 펼치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이 오랫동안 그런 좋은 일을 은밀히 했어?” 하면서 사람들에게 주는 깊은 감동이 남다를 것이다. 지금 나의 소리 없는 선행이 인간 세상에서는 혹시 알려지지 않아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알고 인정해주신다는 것이다.
남은 인생 동안 세월을 아끼면서 변화된 고백의 삶을 계속 추구하라. 그 삶이 내가 살고 있는 당대에 평가받지 못해도 괜찮다. 때로는 내 다음 대가 평가하고 역사가 오래 평가해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평가해주시면 된다. 사도 바울이나 아브라함은 변화된 후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꾸준히 살았기에 천년 영향력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세월을 아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남은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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