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택하신 하늘의 역설(약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 2장 5절의 말씀은 하늘의 방식이 땅의 상식을 뒤집는 순간을 우리 앞에 펼쳐 보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이 한 절은 짧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선택, 믿음의 부요, 나라의 상속, 사랑의 약속, 그리고 교회의 양심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익숙히 붙들던 가치의 저울을 조용히 들어 올려 다른 곳에 내려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정해 놓은 ‘무게’로 사람을 잽니다. 말의 유창함, 학력의 간판, 계좌의 잔고, 집의 평수, 직함의 높이, 옷의 브랜드, 인맥의 넓이.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기에 쉽고, 비교하기에 편하고, 자랑하기에 달콤합니다. 그래서 교회마저도, 어느새 그 달콤한 비교의 언어를 몰래 가져와 예배당 의자 사이에 숨겨 놓을 때가 있습니다. 누가 앞자리에 앉고, 누가 환대를 받으며, 누가 목소리를 갖고, 누가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의 예절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야고보는 그 숨겨 놓은 저울을 들춰내어 우리의 손에서 빼앗지 않고, 우리 양심의 한복판에 조용히 올려놓습니다. “들으라.” 들으라는 말은, 단순히 귀로 정보를 받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 너희가 익숙하게 살아온 방식이 복음과 충돌하고 있으니, 회개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미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가난은 미화될 수 없는 상처이며, 현실의 고통이며, 종종 부당한 구조가 남긴 멍입니다. 하나님은 가난 자체를 선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는 것은 가난의 낭만이 아니라,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손을 뻗는 마음, 세상의 자랑이 끊어진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자리, 부서진 심령으로 주를 찾는 자리입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 복이 아니나, 가난은 인간의 교만을 벗겨 내는 칼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선언은 “가난이 구원을 산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격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열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의 심장부, 곧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다는 말은, 인간이 조건을 갖추어 합격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는 성적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겉모양에 좌우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겉모양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양 너머의 실재를 보십니다. 그 실재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인간이 스스로를 ‘자기 구원자’로 세우는가 아니면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하는가, 인간의 마음이 이 세상으로 팽창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가—하나님은 그 마음의 방향을 보십니다.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천국의 화폐가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세상은 금과 은으로 부를 계산하지만, 하늘은 믿음으로 부를 잽니다. 믿음은 막연한 긍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드는 영혼의 손입니다. 믿음은 도피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용기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최면이 아니라, 현실을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부요는, 고난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고난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자기 기업’으로 누리는 상태입니다. 가난한 자가 믿음에 부요하다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붙든 분이 크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붙든 자는 결코 빈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 손을 빈손이라 부르지만, 하늘은 그 손을 ‘왕의 손’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손이 왕의 약속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나라를 상속”이라고 말합니다. 상속은 급여가 아닙니다. 상속은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관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 됨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선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역설이 땅에 꽂힌 깃발입니다. 가장 부유하신 분이 가장 가난해지셨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약한 자리로 내려가셨고, 가장 의로우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낮아지신 이유는, 우리를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비워지신 이유는, 우리를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벌거벗겨지신 이유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적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시는 것은, 단순한 사회윤리의 선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의 성품과 맞닿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경멸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식입니다.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우리는 “행함”이라는 단어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행함은 공로주의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뿌리를 만들지 않지만, 뿌리는 열매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향한 교회의 태도는, 복음의 진짜 여부를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교회가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자를 홀대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그 십자가가 가리키는 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2장의 문맥은 분명합니다. 금가락지를 낀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서 있으라거나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말하는 차별. 야고보는 그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차별은 단지 예의의 문제나 교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차별은 신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오해가 사람을 차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면 교회도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래서 복음도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도 달라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시는 하늘의 역설은, ‘가난한 자만 구원받는다’는 식의 새로운 계급주의를 만들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가 죄 아래 있고 모두가 은혜가 필요하다고 선포합니다. 문제는 ‘소유의 많고 적음’ 그 자체가 아니라, 소유가 인간의 마음을 어디에 묶어 두는가입니다. 부는 쉽게 마음을 무디게 만듭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고, 자력 구원의 환상을 심어줍니다. “나는 내가 지킨다.” “나는 내가 일으켰다.” “나는 내가 증명했다.” 이 고백은 세상에서는 칭찬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빈곤한 고백입니다. 반대로 가난은 종종 인간을 낮춥니다. 물론 가난이 자동으로 겸손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도 사람을 쓰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 은혜를 만나면,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시되, 가난한 자리에서 은혜가 더 선명히 빛나도록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역설입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밝고, 별은 밤에 더 찬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싶습니다. 어느 겨울,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 새벽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교회 문 앞에 낡은 장갑 한 켤레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장갑은 손가락 끝이 헤지고, 오래된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가 일부러 가지런히 놓고 간 흔적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장갑을 들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의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날 낮, 동네의 한 노인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문턱에서 머뭇거렸습니다. 목사님이 다가가 말을 걸자,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침에… 제 장갑을 두고 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교회에 들어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 웃으며 장갑을 건네자, 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 사이로 이런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제가 어제 밤에… 너무 추워서,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 교회 불빛을 보고…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들어가면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 못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한 마디만 하고 싶어서…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장갑을 놓고 갔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의 손을 잡고 예배당 가운데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교회는 작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노인은 예배 중에 조용히 주님께 돌아왔고, 교회 성도들은 그를 위해 옷을 마련했고, 따뜻한 밥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노인이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평소 예배에 늦고 무관심하던 몇몇 젊은이들이 갑자기 예배에 진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청년이 고백했습니다. “저분이 들어오시는 순간, 제가 가진 것들이 다 부끄러워졌습니다. 주님이 저분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면, 저도 주님 앞에 더 진실해지고 싶습니다.” 그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깨우는 하나님의 종소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통하여 교회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겉모양이 아니라, 복음의 심장으로.
이 이야기는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의 현실이 얼마나 차갑고 두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그 차가움을 따뜻함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복음적 환대는 구제의 우월감이 아니라, 형제 됨의 기쁨에서 나옵니다. 야고보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교회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교회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택하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리듬입니다. 아담이 숨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셨고, 출애굽의 노예들이 신음할 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사사 시대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자를 세우셨고, 마침내 때가 차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래’로 내려가시는 분입니다. 하늘의 높음이 낮아지는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함께 낮아지신다는 말과 결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부모의 품에서 자라셨고, 머리 둘 곳이 없으셨고, 십자가에서 벌거벗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걸으신 길이 이미 ‘하늘의 역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난한 자를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를 환대한다고 해서, 복음이 사회봉사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도덕 개선 프로그램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빵만이 아닙니다. 물론 빵은 필요합니다. 몸은 실제이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도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리고 그 화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교회는, 구제와 전도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구제는 복음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복음이 실제가 되었음을 증언하는 삶의 언어입니다. 전도는 구제를 무시하는 말의 폭력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인적으로 전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가 영혼과 몸을 함께 품듯이, 교회의 사역도 사람 전체를 품어야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통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지금 이 땅에서 이미 다른 가치로 살아갑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세상의 계급질서가 그대로 재현된다면, 교회는 나라의 표지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자기 비움의 섬김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환대입니다. 약한 자를 일으키는 손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2장 5절은, 단지 개인의 위로가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면, 교회는 가난한 자를 모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면, 교회는 그들을 영적 ‘하위’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상속자로 세우셨다면, 교회는 그들을 손님처럼 밖에 세워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난’이 갖는 두 겹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물질적 가난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없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설 수 없음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물질적 가난은 때로 이 심령의 가난을 더 빠르게 배우게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도 심령의 가난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도 회개를 주실 수 있고, 부자도 은혜로 부서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를 환대할 때, 단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부자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의 영혼도 하나님 없이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는 “당신은 귀하다”라고 말해야 하고, 부자에게는 “당신의 돈이 당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둘 다 사랑이지만, 서로 다른 칼끝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마음속에서 어떤 계산을 먼저 합니까.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 “저 사람과 가까워지면 내 체면이 올라갈까.” “저 사람에게 시간을 쓰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 이런 계산은 세상의 지혜처럼 보이지만, 복음 앞에서는 어리석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유익을 계산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투자’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생명이지, 손익계산서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낯설고, 말이 서툴고, 옷이 낡고, 냄새가 나고, 예배 순서에 익숙하지 않아도—그가 그리스도를 찾는 영혼이라면, 우리는 그 영혼 앞에서 거룩한 떨림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택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그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그를 상속자로 세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낯설고 서툴고 죄로 얼룩졌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문 밖에 세워두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집 안으로 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문 밖에 세워둘 권리는 없습니다.
이제 하늘의 역설이 무엇인지 더 선명해집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은 채운 자를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비운 자를 채우십니다. 세상은 높은 자를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낮은 자에게 이름을 새기십니다. 세상은 지금의 소유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지만, 하나님은 지금의 눈물을 씨앗으로 삼아 영원을 열매 맺게 하십니다. 이 역설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택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자리로 내려옵니다. 죄인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자녀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위아래로 나누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셈이 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교만을 수평으로 만들고, 모든 은혜의 찬양을 수직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가난한 자를 환대하라는 말이 단지 감정적 공감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환대는 구체적입니다. 자리 하나를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사 한 마디, 눈을 맞추는 것,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이 밥을 먹는 것, 필요를 묻는 것, 그리고 가능한 범위에서 실제적 도움을 연결하는 것. 동시에 환대는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는 환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별입니다. 복음적 환대는 같은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같은 은혜의 수혜자요, 같은 십자가의 피로 산 형제요 자매입니다.” 이 고백이 없는 구제는, 쉽게 자랑이 되고 쉽게 피곤이 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있는 환대는, 오히려 교회를 기쁘게 하고, 도리어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서 영적 선물을 받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통해 교회를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차별의 뿌리’를 베어내야 합니다. 차별은 행동의 문제이기 전에 예배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영광’이라 부르느냐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돈의 영광, 성공의 영광, 인맥의 영광을 숭배하면, 우리는 자연히 그 영광을 가진 자를 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배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낮아짐과 섬김의 길—을 아름답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차별하면 안 되지”라는 다짐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 제가 다른 영광을 사랑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바꾸십니다. 세상 가치의 렌즈를 벗겨내고, 십자가의 렌즈를 씌우십니다. 그 렌즈로 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눈물의 무게, 상처의 깊이, 한 영혼의 귀함,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직접적인 위로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무시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가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상속자”라고 부르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삶을 실패로 규정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석처럼 여기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진 것이 적어도, 여러분이 붙든 그리스도는 무한히 크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람들에게 밀려나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러분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가 여러분의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단지 먼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여러분을 붙드는 왕의 손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눈물을 헛되이 흘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하루를 헛되이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가난보다 크고, 수치보다 깊고,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역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영광을 피우십니다. 하나님은 빈손에서 찬양을 길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역설의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가 내어주는 작은 자리 하나, 따뜻한 한 마디, 함께 나누는 한 끼, 존엄을 지키는 손길—그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장을 이 땅에 써 내려가는 잉크가 됩니다. 그 잉크는 언젠가 하늘의 빛 아래에서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계산은 늦지 않습니다. 주께서 택하신 자는 결코 버려지지 않으며, 주께서 약속하신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면류관을 가로막지 못하고, 오늘의 가난이 영원의 부요를 빼앗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주께서 이미 길을 여셨고, 부활의 주께서 이미 미래를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걸음은 작아도 소망은 크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새벽은 반드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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