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요한복음 16장 1-7절) <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
한 학생이 사춘기 때부터 이성에 대해 눈을 떴다. 이성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졌는데 외모가 떨어져 이성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외모를 포기하고 싸움 기술을 길러 동급 남학생들을 힘으로 무릎 꿇렸다. 또한 또 다른 힘의 표식인 폭넓은 친구관계를 쌓았다. 힘 있는 친구가 얼마나 많으냐가 힘의 표식이기에 그도 힘 있고 싸움을 잘하는 친구를 많이 사귀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친구 관계는 다 끊어졌다.
점점 성숙해지면서 그는 ‘삶의 넓이’보다 ‘삶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넓이’보다 ‘깊이’가 중요하다. 성숙이란 ‘넓이’보다 ‘깊이’가 중요함을 아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 말씀은 ‘넓은 삶’보다 ‘깊은 삶’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도 ‘깊은 삶’과 더불어 ‘깊은 위로’를 주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은 결국은 같아도 굳이 차이를 둔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선교사 사역이고 성령님의 사역은 위로와 평안과 능력을 주시려는 목회자 사역이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불안에 떨던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성령님의 임재는 하나님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임재하시고 거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아직도 많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아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가끔 큰 문제를 만나고 삶이 힘들면 고아처럼 버려진 느낌이 든다. 그런 약한 감정에 빠지지 말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성령충만한 삶으로 나를 부르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한 은혜를 주려고 내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살면서 힘들고 피곤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다. 문제는 참된 위로자가 별로 없다는 현실이고 그 현실이 더 사람을 낙담시킨다. 자기도 약한데 남을 어떻게 위로하는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서로 위로자가 되어주라. 남을 위로하는 것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가 없어도 실망하지 말라. 가장 든든한 위로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한 후부터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느끼든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이 성령님은 늘 나와 함께 하셔서 놀라운 평강과 위로를 주신다.
< 성도의 근심거리는 감사거리다 >
예수님이 유언 설교인 다락방 강화에는 위로의 말씀이 많다. 왜 그런 위로의 말씀을 하셨는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1절). 왜 당시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하는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2-3절).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마음이 근심이 가득했다(5-6절). 그때 예수님이 실상을 말씀하셨다. 본문 7절 전반부를 보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어떤 근심이 있다면 그 근심이 실상이 아니다. 사랑 받는 성도의 근심거리는 사실상 유익거리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했다. 어떻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유익이 되는가? 언뜻 보면 이해되지 않는다. 한 엄마가 어린 자녀에게 “얘야! 내가 죽는 것이 너에게 좋은 일이야.”라고 하는 말이 자녀에게 어떻게 이해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좋다고 말씀했다.
살아서 재림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 얼마나 좋은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나누고 싶은 사랑의 밀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먹기와 신앙의 깊이에 따라서는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좋은 것이 있다고 예수님을 말씀했다. 그것은 본문 7절 말씀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신 것’이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계신 것’보다 낫다고 했다. 그 말씀은 성령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한다. 왜 ‘성령의 오심’이 ‘주님의 현존하심’보다 더 좋은가?
첫째, ‘주님과의 만남’에서 공간적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과의 만남’에서 내면적 깊이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현존하면 성도의 마음과 영혼에 직접 임함으로 보다 깊고 차원 높은 방식의 대화가 이뤄진다. 그 대화는 실제적인 언어와 생각뿐만 아니라 언어로 완전히 전달할 수 없는 신비한 기름부음과 영적 감각으로 이뤄진다. 성령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깊은 차원에서 받아 누리는 은혜를 생각할 때 예수님이 ‘무소부재하시고 현존하시는 능력’을 지닌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은 무엇보다 깊은 감사거리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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