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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 (에베소서 3장 10-13절)

by 【고동엽】 2023. 1. 2.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 (에베소서 3장 10-13절)

 

<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 >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 모른 척 하며 등을 보이지 말라. 사람은 뒷모습도 중요하다. 등은 거짓말을 모른다. 돌아선 등은 그의 사람됨을 잘 보여준다. 누가 머물다 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보면 그의 사람됨도 대략 파악된다. 은혜 받는 것보다 은혜 받은 후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기에 합당한 마음을 예비하라. 어떤 마음이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인가?

1. 선교하는 마음

 본문 10-11절 말씀을 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은혜와 지혜는 같이 가야 한다. 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각종 지혜를 이방인에게 전하는 선교 사명을 위해서였다(8절). 선교는 바울의 제일 사명이었고 구원받은 자들의 제일 사명이고 교회의 제일 사명이다. 또한 은혜와 지혜도 넘치게 가져다준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바닷가 물놀이 중에 물에 빠졌다. 그때 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헤엄쳐서 학생을 구했다. 학생이 정신 차린 후 말했다. “아저씨!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그가 말했다. “괜찮다. 다만 네 생명이 구할만한 가치 있는 생명이었음을 증명하도록 열심히 산다면 너를 구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자신이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실만한 재목이었음을 증명하며 살라. 그 증명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선교 사명을 이행할 때 나타난다. 선교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냐?”를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다.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사명에 힘쓸 때 은혜 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던 존재임이 증명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선교사로 오셨고 지속적으로 선교하셨고 승천하실 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에 관해 명령하시고 승천하셨다(행 1:8). 재림하실 때도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 사명과 깊이 관련된 상태에서 재림하시고 재림하신 후에는 선교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보고 상급을 내려주실 것이다. 세계선교는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마 24:14). 그러므로 전방선교사로 나가지 못하면 후방선교사로서 기도와 물질로 선교에 힘써 동참하라.

 예전에 필자의 목사 안수 동기였던 한 선교사가 선교지로 들어가면서 머리를 완전히 밀었다.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밀었던 사도 바울처럼(행 18:18)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고 철저히 선교지 사람처럼 낮아지려는 각오였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발걸음’에 후방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헌신적인 손길’이 보태질 때 선교 역사는 더욱 힘 있게 펼쳐진다. 그처럼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면 영혼의 키도 부쩍 커지고 은혜도 풍성해질 것이다.

2. 용서하는 마음

 세계 선교의 비전을 이루려면 일차적으로 자기 마음의 장벽부터 넘어야 하기에 용서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전에 새벽에 기도하는데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목사야! 네가 찬란한 선교 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선교하기에 합당한 마음을 가졌느냐?” 그 음성을 듣고 마음속에 찔림을 받아서 그날 새벽은 그때까지 살면서 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최대한 기억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때 내면에서 본능의 음성이 들렸다. “야! 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주면 너만 손해야! 그런 기도는 시간 낭비야!” 그러나 곧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다! 네가 구원을 받았다면 거의 다 받은 셈이고 더 이상 손해 볼 것이 없다. 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마음껏 축복해 주라.” 그래서 축복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저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선교하려면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부터 잘하라. 가끔 보면 정치인을 미워하는 것은 죄가 아닌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충성스런 성도도 어떤 정치인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나타낸다.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런 미움과 적개심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꾸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면 더욱 큰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진다. 누군가를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것이고 나는 용서받을 부분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은 용서도 잘해야 하지만 용서도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보다 내 약점과 허물을 더 잘 아시고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빨리 깨지고 쉽게 항복할지도 아신다. 그 부분을 건드리시기 전에 빨리 항복할수록 좋다. 좋은 항복이 좋은 행복을 부른다. 하나님도 길을 열어주기 전에 먼저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이 준비되기를 원하신다.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도 용서하라. 그 때문에 내가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나 때문에 그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때로는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는 성자는 아니지만 원수 같은 사람도 축복을 잘해주는 편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혜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원수가 잘된다고 내가 못되는 것이 아니고 원수가 못된다고 내가 잘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원수가 못되기를 바라면서 내 마음이 상할 필요가 없다. 만약 원수가 잘된다면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모습이 없이 잘된 것이라면 잠깐 잘되다가 저절로 무너진다. 하나님의 공의의 손길을 믿고 원수도 불쌍히 여기고 원한을 잊음으로 용서를 실천하라.

3. 용기 있는 마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긴 담대함과 확신이 있었기에 어떤 환난에도 낙심하지 않았고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낙심하지 말라고 했다(12-13절). 온유하되 우유부단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사람과 환난은 두려워하지 말라. 살다 보면 상처와 패배도 당할 수 있지만 믿음이 주는 용기를 가지고 상처와 패배를 극복하며 살라. 참된 용기란 큰 환난 중에도 낙심 없이 당당하게 살고 새로운 각오를 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다.

 저는 초등학교 때 차력사가 당수로 나무와 돌을 격파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서 틈틈이 당수 연습을 했다. 고등학생 때는 거의 차력사 수준이 되었다. 두꺼운 벽돌을 손으로 격파하고 5-6센티 되는 각목을 어깨와 이마에 쳐서 부러뜨렸다. 태권도 격파 시범 때 쓰는 약한 송판과 기왓장 같은 것이 아니라 공사판에서 쓰는 진짜 벽돌과 각목을 그렇게 깨뜨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반 급우들이 조용해지며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했다. “저 친구가 차력사나 하지 고등학교에는 왜 왔나? 어떻게 저렇게 하나?”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지만 격파의 원리가 있다. 속도와 파괴력과 정확한 가격의 3박자가 맞으면 된다. 각목을 이마의 어떤 부분에 빠른 속도로 정확한 각도를 따라 가격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지지 각목은 부러지지 않는다. 그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용기다. 그때까지 했던 훈련과 경험을 살리고 훈련된 사람의 몸이 꽤 강하다는 믿음을 가지면 그런 용기가 나온다.

 훈련된 자신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 용기를 주지만 하나님을 절대 의뢰하는 믿음은 더욱 놀라운 용기를 준다. 성경은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올인!”하라는 말씀이다. 그때 놀라운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면 환난의 벽돌이나 각목과 부딪쳐도 그것들이 깨지지 성도가 깨지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라.

 물론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자신을 가꾸지도 않고 무작정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자신을 힘써 가꿔야 자신감도 더 생긴다. 자신감도 가지면서 자신의 내면과 외모도 힘써 가꾸라. 아름다움을 가꾸면 더 아름답게 되고 힘을 가꾸면 더 힘 있게 된다. 좋은 밭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피어난다. 인공미보다 자연미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미란 ‘자연을 방치하는 것에서 생기는 미’가 아니다. 참된 자연미란 ‘자연을 가공해서 생기는 미’가 아니라 ‘자연을 가꾸어서 생기는 미’를 뜻한다.

 자연을 방치하면 무질서해지면서 사람이 살 수도 없고 무질서와 동물적인 야욕이 판치는 정글이 된다. 자연을 잘 가꾸는 바탕이 있어야 자연미도 빛을 발한다. 자연을 방치하지 말고 자연을 가꾸라. 자연미를 추구한다는 헛된 명목으로 자연을 정글로 만들지 말라. 자신의 외모도 힘써 가꾸라. 다만 외모로만 남을 평가하거나 나를 비하하지 말라.

 이 권면은 아주 절실한 권면이다. 제가 한때 작은 키로 인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콤플렉스는 사명을 따라 살면서 청년 때 이후로 저절로 사라졌다. 그래도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고 좋게 보이려는 것은 외모 콤플렉스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책임감과 자신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외모도 힘써 가꾸되 외모로 남과 나를 비하하지는 말라. 진짜 못생긴 사람은 얼굴보다 영혼이 못생긴 사람이다.

<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라 >

 어떤 사람은 외모가 조금 떨어져도 영혼이 잘생겼다. 그는 자기 외모와 처지로 실망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지도 않고 자신을 존중하고 가꾸며 산다.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그처럼 외모와 외형은 부족해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라. 요새 살기 힘들다는 말이 많지만 언제는 살기 쉬웠는가? 삶에는 늘 어려움이 따른다. 삶이 힘들어도 하나님께 “올인!”하며 꿋꿋이 살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 복이다.

 예전에 아파트 투기 광풍이 불 때 이런 말이 돌았다. “집이 세 채 이상 있으면 함박웃음이 있고 집이 두 채 있으면 즐거운 미소가 있고 집이 한 채 있으면 담담하다. 전세 살면 깊은 한숨이 있고 월세 살면 죽고만 싶다.” 그런 말은 틀렸다. 저는 ‘월세’로 살지만 ‘월새기’를 발행하며 기쁘게 산다. 남과 비교하면서 나를 비하하지 말고 그 형편에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살라. 제 잘난 맛에 취해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 가능성을 믿으라는 말이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다 약점과 열등감이 있었다. 예레미야는 작고 가난한 동네인 아나돗 출신이고 말을 아이처럼 못했다(렘 1:6). 그래도 하나님은 열등감이 심했던 그를 불러서 쓰셨다. 열등감이 있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열등감에 매여 자기 가능성을 불신하는 것은 죄다. 살다 보면 실망되고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때 다시 일어서라. 과거의 상처를 오직 교훈으로만 삼고 다 잊으라. 그리고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하나님을 믿으라.

 현재의 신실한 믿음이 중요하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과거도 아름답게 보이고 미래도 소망적으로 보이고 환경의 장벽도 높게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자꾸 도지고 현재의 장벽이 높게 보이는 이유는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현재적인 믿음을 가지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찬란한 꿈을 품고 나아가라.

 요새 <월새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월새기>가 프랑스인의 <팡세>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대전 때 프랑스 청년들은 전쟁터로 가면서 성경과 함께 <팡세>를 배낭에 넣고 갈 때가 많았다. <월새기>도 한국인과 세계인에게 <팡세>처럼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집필하면서 <월새기 영어판> 비전도 준비하고 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좋은 만남과 기회를 허락하셔서 그 찬란한 비전을 구체화시켜주실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문제다. 불가능한 일은 많아도 행복하고 보람되게 사는 것 자체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믿음으로 생각만 바꾸면 시련은 저주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증거다.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불신자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전할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늘 선교하는 마음, 성육신의 마음, 용서하는 마음, 용기 있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고 그 은혜를 선교의 열정으로 분출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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