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명자에게 필요한 것 (마가복음 16장 16-20절) < 이단에게 미혹되지 말라 >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생명의 길을 여셨다. 부활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 중 하나다. 그래도 성도가 죽은 후 현세에서 육신으로 바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부활의 진리는 궁극적인 부활을 믿는 것이고 큰 의미에서 육신의 부활을 넘어 인간성의 부활, 인간관계의 부활, 생명력 넘치는 삶의 부활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부활의 진리를 왜곡해 죽어도 지금 현세에서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이단이 된다. 부활 교리를 강하게 믿는 것 같은데 왜 믿음이 좋다고 하지 않고 이단이라고 하는가? 그런 식으로 많은 영혼을 미혹해 파멸시키고 교주의 왕국을 쌓기 때문이다. 어떤 이단은 부활을 증명하겠다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상 아무도 사람을 다시 살리지 못했다. 중요한 교리라도 몰상식하게 문자 그대로 그 교리를 실제 삶에 적용하면 안 된다.
부활 교리가 현세에서 사람 뜻대로 부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교리가 아니듯이 신유 교리도 사람 뜻대로 신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교리가 아니다. 신유 교리는 육신의 신유 이상의 신유와 궁극적인 신유를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신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 “믿으면 치유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유의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의 신유’를 믿는 것은 많이 다르다. 이단은 정통과 디테일에서 다르다. 그래서 같은 줄 알았는데 끝이 다르기에 ‘다를 이(異) 자’와 ‘끝 단(端) 자’를 써서 ‘이단’이라고 한다.
믿음의 대상은 ‘신유’보다 ‘주님’이 되어야 한다. 신유보다 주님에 더 초점을 맞춘 바른 믿음은 오히려 신유를 따라오게 하지만 주님보다 신유에 더 초점을 맞춘 기복적인 믿음은 오히려 신유를 멀어지게 한다. 아무리 큰 마이크 소리로 “치유됩니다. 치유되었습니다.”라고 외쳐도 헛된 외침일 뿐이다. 주님은 주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지 주님도 바라보고 동시에 신유도 바라보면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신유집회 광고지 문구를 보면 “신유의 종! 능력의 종! 와보라!”라고 선전한다. 또한 그 신유의 종으로 인해 신유가 일어났다는 사람의 간증도 실려 있다. 사람이 죽을병에 걸리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약한 심령이 된다. 그때 ‘신유 집회’와 ‘신유의 종’을 찾아가는 것은 정말로 지푸라기를 붙드는 행위다. 능력이 없어보여도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담임목사의 겸손하고 순수한 기도가 오히려 더 신유를 가져다준다.
미국 기독교 선교 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C&MA)은 ‘신유의 교리’를 중시한다. C&MA가 내세우는 4중 복음은 ‘구원의 주, 성결의 주, 신유의 주, 재림의 주’이다.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성결교에서 내세우는 4중 복음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다. 그만큼 신유를 중시하기에 C&MA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는 “믿으면 치유된다.”라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치유 집회를 대대적으로 열어 사역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1918년 1월, 심슨 목사가 74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는 신유란 종착지가 있고 하나님이 쓰실 때까지만 성도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여겼다. 그리고 1919년 10월 30일 하나님 앞으로 평화롭게 떠났다. 그는 결코 남에게 신유 교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또한 신유 기도를 남발하지 않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신유가 이뤄지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심슨은 예배나 집회나 캠프 때 신유가 핵심 주제가 되지 않게 했고 성도의 성숙한 삶, 죄인의 구원, 그리고 세계선교를 신유보다 훨씬 중시했다. 그는 많은 성도들이 존경하고 따랐지만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성도들이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치유의 복음(The Gospel of Healing)>이란 책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치유는 사려 깊고 철저한 성경적인 고찰이 요구된다. 치유는 복음의 일부지 전부가 아니다.” 그는 치유가 외면되어도 안 되지만 너무 강조되어도 안 된다고 여겼다. 또한 거짓 치유를 철저히 배격했다.
이단 교주가 자기를 ‘치유의 종’이라고 높이고 치유 집회를 통해 인간 왕국을 키울 때 거기에 가담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말한다. “치유 집회가 뭐가 나쁘냐?” 문제는 그런 집회에 거짓 치유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치유 집회 인도자가 치유를 특별히 줄 수 있는 것처럼 안수하는 것도 큰 문제다. 미국에서도 20세기 초부터 그런 거짓 집회가 확산되면서 성장주의, 외형주의, 기복주의가 점차 만연해지자 그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선지자적인 외침을 발한 C&MA 목회자 겸 저술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토저(Tozer)다.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이다. 치유를 위해 기도하라. 믿음으로 기도하면 치유의 능력이 높아진다. 그러나 치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손길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치유의 하나님임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되 “기도하면 낫는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지는 말라. 간절히 기도해도 낫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 사례도 많은데 주님을 믿고 기도하면 낫는다고 단정해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된다.
이단 교주는 집회에서 “아무개가 나았습니다.”라고 수시로 선포한다. 낫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말고...” 하고 무책임하게 나온다. 그리고 다음 집회에서 또 “아무개가 나았습니다.”라고 한다. 그런 비양심적인 사람에게 양심적인 순진한 성도가 무수히 속아 넘어가는 것이 문제다.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면 그의 배만 불릴 뿐 순진한 성도는 그저 이용만 당한다. 하나님은 그런 집회에 찾아다니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믿음 치유’를 내세우며 수없이 거짓 치유를 선포하는 이단 교주에게 결코 미혹되지 말라.
< 늦더라도 바른 길로 가라 >
간증도 지혜롭게 잘해야 한다. 치유 간증이나 성공 간증이 기복주의의 통로가 되지 않게 주의하라. 복과 성공과 치유의 추구가 잘못은 아니지만 믿음의 주목적이 되게 하면 안 된다. 믿음의 주목적은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 사람의 영광과 복이 없다는 말이나 외면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오히려 사람에게 진짜 영광과 복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헌신적인 교인은 사회의 희망이 되지만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기복적인 교인은 사회의 부담이 될 때가 많다.
치유 간증이나 선포도 나중에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일정 시간이 지나 치유가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때만 해야 한다. 낫지도 않았는데 믿음으로 미리 나았다고 선포하는 것은 믿음을 빙자한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그런 말을 ‘거짓말’로 여기지 않고 ‘믿음의 말’로 여기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대중 앞에서 수시로 거짓말을 하는 치유 강사를 용서는 해도 결코 따르면 안 된다. 거짓 치유 집회에 미혹되는 것은 차라리 다단계 사기꾼에게 미혹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을 잃게 만든다. 영혼을 잃고 가정을 잃고 시간을 잃고 물질을 잃는다.
치유를 내세워 상업적으로 간증시키는 모습도 주의하라. 치유 간증을 잘못 들으면 기복주의자가 되기 쉽다. 성공 간증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잘 봉사해서 크게 성공했다고 금방 간증을 세우면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되어도 그 간증을 잘못 듣고 성공 욕심에 젖어 봉사하는 교인이 많아질 수 있다. ‘주님’이 목표가 아닌 ‘성공’을 목표로 봉사하는 교인이 많아지면 교회가 외적으로는 커져도 내적으로는 커지는 것이 아니다.
치유 간증이나 성공 간증은 자랑이 없는 겸손한 언어로 매우 주의해서 해야 한다. 잘못 간증하면 예수님을 사모하게 하기보다 기복주의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성공해서 혹시 간증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도 자랑하거나 광고하듯이 간증하지 말고 거짓이 없이 겸손하게 간증하라. 간증이 인기 가수 무대처럼 인기 간증 무대가 되게 해도 안 되고 더 나아가 사례비와 인기에 맛들인 인기 간증 강사의 밥벌이 수단이 되게 해도 안 된다.
봉사해서 복 받았다는 간증을 듣고 복을 염두에 두고 봉사했다가 복이 없다고 시험에 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기복주의에 미혹된 자기 잘못이다. 그래서 바른 목회자는 헌신적인 봉사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성공한 사람에게 “성도님! 성공한 얘기를 간증하라.”고 무대를 마련해주기보다 오히려 “성도님! 성공을 자랑하지 말고 변함없이 겸손하게 은밀히 봉사하라.”고 멘토링을 해준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적인 기쁨과 보람과 행복도 잃지 않고 성공도 아름답게 지속되기 때문이다.
간증을 지혜롭게 잘하고 지혜롭게 잘 듣지 않으면 기복적인 교인을 만들 수도 있다. 기복주의나 성공주의는 단기간의 성장도 촉진할 수 있지만 단기간의 몰락도 촉진할 수 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내세워 초대형 교회가 된 LA에 있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는 2010년에 파산해 그 화려한 교회 건물이 가톨릭교회에 팔렸다. 그 교회는 매주 사람을 초청해 설교 전에 성공과 치유와 감동적인 사연을 간증시키면서 성장도 빨랐지만 몰락도 빨랐다.
성공한 투자 얘기를 듣고 다단계에 미혹되듯이 성공 간증을 잘못 들어 영혼이 기복주의에 미혹되지 않게 하라. 제자 10명이 기복주의자 10만 명보다 낫다. 하나님 나라에 제자는 플러스가 되지만 기복주의자는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에 C&MA 총회가 생기는 기쁜 상황을 맞이해서 제가 동료 목회자들에게 말했다. “부흥이 늦더라도 바른 길로 가면서 한국 교회의 부활에 일익이 됩시다.” 영혼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부활도 중요하다.
< 복음 사명자에게 필요한 것 >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 전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를 명하셨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라는 암시다. 은혜에는 책임이 따른다. 복음 전파 사명을 잘 이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1. 믿음
예수님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셨다(16절). 믿음은 구원의 최대 전제 조건이다. 믿음만 분명히 가져도 삶은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믿음을 요구하셨다. 모든 실패의 핵심 원인은 불신이다. 믿음은 구원뿐만 아니라 표적도 따라오게 한다. 본문 17절을 보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먼저 믿어야 표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표적이 주어져야 세상으로 나아가겠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먼저 믿고 나아가면 표적을 주시겠다고 했다.
믿음은 생각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낸다. 의심하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얻고 사명의 길로 나서서 당시에 가장 머나먼 인도 지역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했다. 그의 의심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씨앗이 된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의심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신다. 가끔 어떤 일로 의문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것이다. “저기 또 한 명의 도마가 있구나. 저에게 나를 보이리라.” 의문 중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부활하신 주님도 만나고 그를 통해 부활의 복음도 멋지게 전파될 것이다.
2. 표적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르게 하시겠다고 하면서 4가지 표적을 언급하셨다(17-18절). 첫째 표적은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표적이다. 둘째 표적은 새 방언을 말하는 표적이다. 셋째 표적은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표적이다. 이 말은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려고 진짜 뱀을 집고 농약을 마시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는 결코 작지 않은 죄다. 이 표적은 어떤 위기 중에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내포된 표적이다.
넷째 표적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표적이다. 복음에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있다. 복음이 가는 곳마다 심령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인간관계도 회복된다. 또한 특별한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예외로 두실 때를 제외하고는 건강도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겨 보내실 때 그냥 보내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놀라운 표적을 주어 보내셨다. 표적은 믿음에 딸린 부수적인 것이긴 해도 사명 이행을 위해 매우 유용한 것이다.
3. 말씀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19절). 예수님의 최후의 사역은 말씀 사역이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전파한 것도 말씀이었다. 표적이 따르는 것도 말씀의 증언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20절). 표적은 보조적인 것이고 말씀이 중심적인 것이란 뜻이다. 성경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헌법과도 같다. 개인의 신기한 체험도 말씀을 앞설 수 없고 공동체의 공신력 있는 체험도 말씀을 앞설 수 없다. 기독교에서 성경 말씀은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것이다.
체험적인 믿음이나 감정적인 믿음은 순식간에 확 달아오르지만 순식간에 확 꺼지기도 한다. 왜 사람이 극단에 치우치는가?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리더에게는 더욱 말씀과 바른 신학이 필요하다. ‘체험’이란 주관적인 진리보다 ‘말씀’이란 객관적 진리에 늘 자신을 비추고 말씀을 토대로 한 건전한 상식 위에 믿음을 건축하라. 말씀을 영혼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을 때 영적인 건강도 잃지 않고 복음도 바르게 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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