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을 위한 규례(2) (신명기 24장 14-22절) >1. 품꾼을 학대하지 마십시오
곤경과 가난에 처한 품꾼에게 2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학대하며 일을 시키는 것’이고(14절), 또 하나는 ‘품삯을 미루는 것’입니다(15절). 품꾼이 그날 품삯을 못 받으면 당장 생계에 지장이 있기에 품삯을 간절히 바라는데 돈이 없다거나 일을 못했다는 이유로 품삯을 미루고 안 준다면 얼마나 서글퍼지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게 되면 죄가 되기에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마음을 헤아려 일을 시키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며 반대로 고용인은 고용주를 위해 성심성의껏 일을 해주어야 합니다. 고용주는 임금을 주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고용인이 자유롭게 다른 일을 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을 시키고 정당하지 않게 노임을 주지 않거나 맘대로 깎는 것을 인권 침해와 부당 이득 편취와 도둑질의 죄로 보셨습니다.
돈을 축적하고 힘을 키워 큰일을 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없는 상황에서도 행하는 거룩한 작은 일이 사실상 큰일입니다. 특히 품꾼을 학대하고 품삯을 주지 않으면서 돈을 축적하고 힘을 키우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축적한 돈과 힘으로 큰일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공의의 토대 위에서 얻는 돈과 힘을 가지고 작은 일이라도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작은 힘과 적은 돈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쁘게 사용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더해져서 큰일이 이뤄집니다.
2. 일반화로 억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좌제로 인한 사형을 금지하게 했습니다(16절). 고대로서는 파격적인 정의사회 및 인권사회를 지향시킨 것입니다. 개인의 책임을 가족까지 지도록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생명을 빼앗기까지 하면 더욱 안 됩니다. 연좌제 금지 규례는 일반화에 의해 아무 죄도 없는 개인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례입니다. 일반화(generalization)는 물질세계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필요한 원리지만 사람 관계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인간 사회에 상처를 낳는 수많은 일반화의 원리들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늑대 같은 남자를 만나서 아픈 경험을 한 후 “남자는 다 늑대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주장하고 다닌다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아픔은 이해가 되지만 자기 사례만으로 인류의 반을 늑대로 몰아버리는 일반화가 단순한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한 얘기라면 그녀는 늑대 같은 남자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높이려는 일반화를 주의하십시오.
개인이 자기 처지를 정당화하려는 일반화는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을 생각할 때 이해될 수 있고 그 폐해가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권력자가 권력기반을 강화하려고 선전하는 일반화 상징조작은 통치기술로서는 효과가 커도 반작용의 폐해도 큽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은 어떻다.”는 일반화로 나쁜 인식을 고착화시키면 그 지역을 희생양으로 삼아 다른 지역의 단결을 꾀하면서 지지기반을 다지기 쉽지만 그것은 못된 통치기술입니다. 일반화 상징 조작이나 연좌제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3. 약자를 위해 힘써 베푸십시오
본문의 규례는 약자를 보살펴주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눠주는 것까지 명령합니다(17-18절). 그래서 밭에서 곡식을 벨 때 벤 곡식 단을 잊고 가져오지 못했으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둘 때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19절). 또한 감람나무나 포도를 한번 수확한 후에 열매가 남으면 다시 살피지 말고 남겨두어서 객과 고아와 과부가 가지도록 했습니다(20-21절).
왜 그렇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규례를 세웠습니까? 이웃 사랑의 율법은 출애굽의 은혜에 근거합니다(22절).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베풀라는 뜻입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마땅히 감사하며 율법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그 믿음이 산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란 복 받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기 위한 영적인 토대입니다.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내 편이 아닌 남의 편에 설 줄 아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갈 길은 멀어도 길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소외된 자의 아픔과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덜어내십시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행동하는 믿음의 틀과 영혼의 맥으로 삼으면 세상의 어둠이 결코 영혼을 흔들지 못합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 40장 1-5절) (0) | 2022.12.31 |
---|---|
네가지 감사의 원리 (이사야 38장 17-20절) (0) | 2022.12.31 |
이웃 사랑을 위한 규례 (신명기 24장 6-13절) > (0) | 2022.12.31 |
자신을 긍정하고 경축하라 (이사야 37장 8-9절) (0) | 2022.12.31 |
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누가복음 5장 33-39절) (0) | 2022.12.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