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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누가복음 5장 33-39절)

by 【고동엽】 2022. 12. 30.

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누가복음 5장 33-39절) < 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

 사람의 영화는 잠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소중한 이유는 후대를 위한 씨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후대를 위한 선한 영향력과 열매를 남기려면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쓸 때 인생도 잘 쓰임 받습니다. 학력과 능력보다 시간을 잘 쓰는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살지 마십시오. 특히 성도가 아무렇게 살면 예수님은 욕을 먹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망령되이 일컬어지도록 하지 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도록 시간을 잘 사용하십시오. 세월을 아낀다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세월을 잘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은사와 소유를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시간을 잘 써서 쓰임 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기쁘고 즐겁게 사십시오

 어느 날, 금식을 영성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십니다(33절).” 그 말은 먹고 마시는 일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금식기도가 영성을 드러내는 과시 수단이 되면 더 안 좋게 됩니다. 예수님은 경건을 과시하는 금식을 엄히 경계하셨고 먹고 마시는 것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대개 일주일간 열립니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서 금식일과 겹쳐도 금식하지 않고 혼인잔치가 끝난 후에 금식했습니다. 그처럼 신랑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잔치 상황에는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순간이기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지만 신랑을 빼앗기면 자발적으로 금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34-35절). 이 비유는 금식은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과 먹고 마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교훈을 줍니다.

 기쁘고 즐겁게 사십시오. 그러나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이 무조건 낙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절한 비관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비관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어. 끝났어. 그렇게 해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하는 자포자기식의 비관주의가 나쁜 것이지 최악의 상황을 예견해 시나리오를 짜는 적절한 비관은 인생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낙관 자체가 좋은 세상이나 좋은 인생을 만들지 않습니다. 예전에 ‘행복전도사’란 명칭으로 TV에 숱하게 강연했던 사람이 자살했었습니다. 그는 비관적인 삶을 낙관적인 삶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관해도 비관주의자가 되지 말고 낙관해도 낙관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일과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안 좋게 될 상황도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언뜻 보면 비관 같지만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비관주의란 미래의 안 좋은 상황을 예견하고 그냥 주저앉는 습성입니다. 반대로 미래가 좋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좋은 미래를 만들려고 최선의 땀을 흘리는 건전한 낙관은 필요하지만 미래가 좋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만큼 나쁜 것입니다.

 대책도 없이 낙관하는 낙관주의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비관주의는 옆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낙관주의는 옆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비관주의는 너무 이타적이고 낙관주의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일할 때 전진만 생각하고 안 좋은 돌발 상황이나 리스크를 무시하니까 낙관주의는 큰 성공도 가져다주지만 실패나 실수나 비효율성이 많고 공감능력도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나 업무관계에서는 비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은 대책 업는 낙관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일 측면에서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대책을 세워 일하고 전체적인 삶 측면에서는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은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안일하게 사는 잘못된 낙관론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변화된 세상을 꿈꾸며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건강한 낙관론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게 보는 것이 다 좋지는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은 안 좋다고 해야 합니다. 비판 능력도 없다면 힘 있는 자의 무조건적인 지배를 당하기 쉽고 거짓말과 거짓 뉴스에 속기도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할 줄 아는 기본자세 하에서 건전한 비판의식도 가지십시오. 매사에 비관적이어도 안 되고 매사에 낙관적이어도 안 됩니다. 무조건적인 긍정주의나 낙관주의는 오히려 건전한 사회발전과 인생발전을 막습니다.

 인생에서 슬픔과 상처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과 상처에 빠져들지 않고 인생 자체를 비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슬픔과 상처가 커도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말고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 사실을 믿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대책도 세우고 땀도 흘리고 준비하면 나아가면 내적인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외적인 삶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처럼 슬픔과 서러움을 넘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거룩한 모험과 도전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하십시오.

2. 잘못된 과거를 버리십시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도 버리고 또한 옷을 빨 때 축소된 새 옷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뜯음으로 낡은 옷도 버립니다(36절). 이 비유에서 새 옷 조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낡은 옷은 율법적인 교훈을 상징합니다. 즉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율법주의에 한정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로 생기는 가스로 인해 낡은 가죽 부대가 부식되어 터지기에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37-38절).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낡은 가죽 부대는 율법적인 교훈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도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율법주의에 담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습니까? 형식적인 금식은 영성의 지표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주시고 더 나아가 잘못된 과거를 잘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과 섭섭했던 일을 잘 잊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남을 섭섭하게 하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내가 섭섭함을 잘 느끼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잘 정리하지 못해 섭섭함과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면 미래는 어두워집니다. 자신이 어두운 과거를 파묻지 않으면 어두운 과거가 자신을 파묻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하면서 섭섭한 일이 생겨도 믿음 안에서 크게 생각하면 섭섭함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섭섭한 일이 있어도 잘 잊으면 그 과거의 섭섭함이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원의 믿음이 주는 능력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소외 문제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려 깊게 행동하려고 해도 때로는 어떤 사람의 언행이 남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처와 섭섭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부족한 모습들이 인간의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상처의 기억을 믿음 안에서 잘 요리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 같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섭섭한 일보다 고마운 일들이 사실상 훨씬 많고 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 기억들을 품고 섭섭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삭제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해도 섭섭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섭섭한 기억과 느낌을 금방 털어버리거나 잊으면 그 섭섭함이 인생의 행복과 축복에 거의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섭섭한 과거의 일을 오래 기억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고마웠던 과거의 일을 금방 잊어버리면 마음의 상처가 커지면서 자신을 통해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 피해 본능을 버리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자신이 피해자였을 때도 많지만 가해자였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용서의 능력이 커지면서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그런 평안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좋은 일은 잘 기억하고 나쁜 일은 잘 잊기를 원하십니다.

3. 새로운 일을 기대하십시오

 묵은 것에 집착하면 새 것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39절).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통주의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내세워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묵은 것도 존중하면서 새 것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고수하고 계승시키는 ‘닫힌 마음’과 새로운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다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보수적인 마음과 진보적인 마음이 다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인생은 때때로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축복의 약속을 믿으며 사십시오. 과거를 잘 잊으려면 결단이 필요하지만 내일의 풍성한 약속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전의 경험과 이미지만 믿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 약속을 믿고 찬란한 내일의 비전을 세우고 나아가십시오.

 저는 현재까지 41개의 <성경강해 설교 파일>을 완성했습니다. 성경 전체의 약 77%입니다. 이번 달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는 15400권 발행했습니다. 저는 가끔 41개의 강해설교 파일은 41명의 생명제자로 여겨지고 15400권의 <월새기>는 15400명의 성도로 여겨집니다. 만약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월새기 영어판>이 예정대로 2019년 9월에 창간호가 발행된다면 그것들이 해외선교사처럼 세계 곳곳에 변화를 일으키며 복음 한류의 역사에 선봉도구가 될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비전입니까? 그 비전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도 때로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까지도 멋지게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길을 열어 주시고 결국 약속하신 대로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은 참고만 하십시오.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을 믿으면 의심 많은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과거의 좋았던 경험은 더 좋게 될 내일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시키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희망찬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복된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기도해도 시험에 빠지고 몸을 불사르도록 봉사하고 헌신해도 시험에 빠질 수 있지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잘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가장 복된 삶 중의 하나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일을 행하려고 하십니다. 그 일의 결과는 형통함과 풍성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도록 기대하고 힘쓰십시오.

< 자기 존재목적을 이루십시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충성하면서 보답을 바라지 말고 충성한 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또한 어떤 고난이 있어도 무조건 찬송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셔도 찬송하고 자신을 잡아 잡수셔도 찬송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보상을 바라거나 권리 주장을 하지 마십시오.

 또한 하나님은 찬송하라고 주신 입술로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늘 달라는 기도만 하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역효과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고 극심한 고난 중에도 찬송과 감사를 잃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은 못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의 달성하는 셈입니다. 그때 오히려 기도응답과 문제해결이 가장 멋지고 신속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며 봉사할 때도 복이나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충성의 최종 목적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복된 충성이 아닙니다. 계산적인 목적과 의도가 없는 충성이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보상을 목적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난 삶이 되면서 불평과 원망이 수시로 생기지만 보상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넘치는 보상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배반이 많지만 천국의 상급 문제에서는 결코 배반을 당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공짜심리를 부추기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섬기면 섬김을 받고 남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면 하나님께서 내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십니다. 복된 인생을 원하면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람 관계에서도 승리하십시오. 늘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운 일을 기대하고 열심히 살면서 많은 사람을 섬겨줌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멋지게 이루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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