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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버려야 할 4가지 (이사야 21장 1-10절)

by 【고동엽】 2022. 12. 30.

삶에서 버려야 할 4가지 (이사야 21장 1-10절) <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

 얼마 전 인공 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둑 최고수를 가볍게 이기면서 인공 지능에 대한 관심과 연구 개발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공 지능을 갖춘 로봇 개발도 점차 빨라집니다. 인류를 편리하게 해줄 목적으로 개발된 로봇의 지능이 탁월해지면 자체적으로 더 탁월한 로봇을 개발해 결국 인간이 인공 지능을 갖춘 로봇에 의해 정복당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조만간 인류의 지능을 넘어선 로봇에 의해 인류가 멸종될까요? 언뜻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만 그 주장은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입니다. 아무리 고도화된 인공 지능 로봇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미소한 도구입니다. 과학자들의 예측처럼 약 50년 후에 고도화된 인공 지능 로봇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해도 그 로봇이 “그동안 인간에게 억눌려 종처럼 살면서 너무 상처를 받아 억울했다. 이제 세상을 뒤엎고 자유를 찾기 위해 인간을 지배하고 정복하자.”라고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미래에 인공 지능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다양한 해악을 미리 대비할 필요는 있지만 너무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과학을 내세워 영혼을 사로잡으려는 과학주의 이단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인공 지능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인공 지능이 스스로 진화해 인간을 정복한다는 가설이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인공 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창조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체의 ‘욕망’입니다.

 인공 지능이 사람보다 지능과 능력이 크게 앞서도 스스로 더 발달하려는 욕망, 남을 정복하려는 욕망, 명예를 높이려는 욕망, 쾌감을 누리려는 욕망 등의 감정이 없어서 인간을 정복할 원인과 이유가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사람은 더 발전하려는 욕망이 있지만 인공 지능은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그런 욕망의 감정을 창조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에 삶의 욕망을 주셨고 인류에게는 지식욕, 정복욕, 명예욕, 문화욕 등도 주셨습니다. 그 욕망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원동력입니다. 인공 지능 로봇이 고도화되어 심지어는 지식적인 주체 능력까지 갖춰도 욕망을 창조해서 가질 수 없는 한 로봇이 인간을 정복한다는 가설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욕망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인간을 발전시키지만 오용되면 불행과 비극의 원천도 되기에 욕망을 잘 조절하도록 욕망을 절제하고 때로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버릴 때 더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큰 시련을 당하거나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무엇인가 내게 버릴 것과 절제해야 할 욕망이 있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절제해야 할 것을 절제할 때 참된 축복과 행복을 놓치지 않습니다.

< 삶에서 버려야 할 4가지 >

 본문 1-10절에는 바벨론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패망을 통해 반면교사로 얻는 교훈으로서 성도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 욕심

 이사야 당시에 엘람과 메대는 바벨론과 연합국이었는데 그때부터 약 200년 후에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들이 바벨론을 멸망시킵니다. 왜 바벨론이 멸망됩니까? 속이고 약탈하는 행위 때문입니다(2절). 왜 속이고 약탈합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가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욕망’인 욕심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까? 자기 팽창의 욕심을 버려야 참된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은 교회 부흥을 원합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영적 기운과 활력도 넘치고 선교와 구제도 더 많이 할 수 있고 비전도 힘 있게 구체화시킬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목회자가 “나도 큰 교회 목사이고 싶다.”라는 마음 때문에 교회 부흥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욕심의 함정에 빠져 마음에 불순한 동기를 가지면 참된 예배자의 마음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꿈과 비전과 일의 동기가 인간적인 욕심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욕심을 절제하면 사기를 당하거나 이단에게 미혹될 확률도 크게 줄어듭니다. 왜 사기를 당하고 이단에 미혹됩니까? 단기간에 횡재하게 해준다는 말과 기적적인 축복을 주겠다는 말에 속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큰돈을 벌게 해준다고 하면 대개 사기입니다. 그 말에 속으면 대개 돈을 날리고 속인 사람만 대개 돈을 법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욕심을 절제하고 정직한 땀을 앞세워 살면서 쉽게 돈 버는 방법은 아예 없다고 여기십시오.

 쉽게 돈을 벌어도 문제입니다. 쉽게 번 돈은 불행한 일과 함께 쉽게 사라집니다. 정당하게 땀을 흘리고 지혜와 창조성을 발휘해 번 돈만이 오래 자기 곁에 머물면서 행복과 보람을 가져다줍니다. 왜 다단계 사기와 금융 사기가 계속 생깁니까? 물러터진 법도 문제지만 일확천금의 헛된 꿈에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돈을 벌고 쉽게 기적을 얻겠다고 하면 미혹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도한 욕망인 욕심을 잘 버리십시오. 욕심을 잘 버릴 줄도 알아야 꿈과 비전의 성취 확률도 커집니다.

2. 쾌락

 바벨론의 패망에 대한 경고를 듣고 이사야는 기뻐하기보다 심한 요통을 겪고 마음에 괴로움과 두려움과 떨림이 생겼습니다(3-4절). 이사야의 고통과 떨림은 패망하는 바벨론의 극심한 참상을 암시합니다. 왜 그런 극심한 참상에 빠졌습니까? 포위 공격을 받을 때도 잔치를 벌였고 고관들이 침략에 대비해서 칼날이 미끄러지도록 방패에 기름을 발라야 하는데 그런 대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5절).

 쾌락에 빠지면 실패하고 패망합니다. 땀도 없이 쉽게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최선의 땀을 흘릴 때 열매도 얻고 진리와 기쁨과 행복도 얻습니다. 일상의 재미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물론 늘 정답의 길로만 가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오답도 선택하고 실패도 겪습니다. 그러면서 더 성숙해지면 됩니다. 실패한 선택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 실패를 계기로 성공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너무 편안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좋은 일을 위해 편안하고 재미있고 쾌락적인 삶을 버릴 각오도 하십시오. 바람이 예상되어도 출항해야 고기를 잡습니다. 편안하고 재미있고 쾌락적인 삶에 안주하면 영혼은 자랄 수 없고 인물도 되기 힘듭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할 때 성장도 이뤄집니다. 늙었다는 것은 좋은 일을 시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시도하지 않으면 더 늙어지지만 좋은 일을 계속 시도하면 계속 청년의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앞에는 찬란한 세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초청하고 도전하는 그 세계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편안과 쾌락에 안주하지 말고 인물이 되어 약자를 껴안아주려고 하십시오. 사람 사이를 나누려고 하지 말고 사람과 나누려고 하십시오. 쾌락을 버리고 나눔을 통한 기쁨을 추구할 때 사람 사이의 담도 무너지고 하늘과 땅 사이의 담도 무너지면서 참된 자유과 기쁨도 얻고 천국의 행복도 얻을 것입니다.

3. 우상

 바벨론의 패망은 우상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9절). 우상숭배는 이단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단은 윤리성이 없습니다. 교주가 곧 세상 종말이 온다고 하면서 신도들의 재산을 교묘하고 철저하게 긁어모아서 성장한 신흥종교들은 대개 재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단은 행동대원을 앞세워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하고 심지어는 죽입니다. 또한 이단 교주는 이성관계가 복잡하고 호화판 생활을 하고 비윤리적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제일 많이 하는 미혹의 말이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둘째, 이단은 교주를 맹신합니다. 교주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의 종’이나 ‘능력의 종’으로 선전합니다. 한 교주는 시체에 주문을 외우면 시체가 따뜻해지고 시체에 생수를 뿌리면 썩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생선 가게에서도 죽은 생선에 물을 뿌려 놓으면 잠깐은 싱싱해 보입니다. 그런 의미 없는 일을 기적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면서 교주를 높입니다. 사람을 너무 높이는 것은 이단의 전형적인 행태입니다.

 셋째, 이단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입니다. 그것을 위해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이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 가족과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정상적인 교회와 격리시키고 심하면 법의 눈을 피해 사회와도 격리시킵니다. 그래서 집을 팔아 바친 후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하고 담을 높게 쌓아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합니다. 그런 공동체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새로운 세상에 온 기분이 들지만 점차 거의 지옥과 같은 생활이 펼쳐집니다.

 이단은 경건 서적도 폭넓게 보지 못하게 하고 신학을 마귀 학문이라고 비하합니다. 자신의 종교 장사에 가장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멸시하는 사람은 경험 법칙상 거의 이단이거나 이단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만큼 신학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단에 미혹되는 것처럼 불행과 저주는 없습니다. 이단에 넘어가지 않는 것만도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과감히 버리고 이단을 과감히 떠나는 것은 최고로 복된 결단입니다.

4. 절망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압제자인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묵시를 주시고 전하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10절).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disappointment)은 그분의 약속(His appointment)으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절망적인 환경도 하나님의 희망적인 선택이 됩니다.

 실패해도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을 회복하고 인생의 참 의미와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고기 하나 없는 빈 배 인생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자기 뜻대로 삶이 펼쳐지지 않고 빈 배의 상황이 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실패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패 속에서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신 사람도 많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성도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십시오. 실패했어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오늘은 실패자의 모습이지만 내일은 성공자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오. 어떤 시련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시도하십시오. 포기하면 낙오하고 뒤쳐집니다.

 어떤 분은 연이은 실패 앞에서 자책합니다. “나는 완전 실패작이야.” 그런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내가 실패작이면 나를 지으신 하나님도 실패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기에 성도가 실패할 수는 있어도 실패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실패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작품 인생의 재료가 됩니다. 실패 속에서 잘 교훈 받고 예수님을 붙잡고 내일을 준비하면 반드시 역전승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됩니다.

< 용기와 희망을 가지십시오 >

 가장 복된 성공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직 구체적으로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겪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리와 현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현재 일에 최선을 다하면 조만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길이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좋은 시절이 되어야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발전도 없고 성취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짐합니다. “앞으로 잘되면 좋은 일을 많이 해야지.” 어떤 교인은 다짐합니다.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헌신해야지.” 그렇게 다짐만 하면 대개 일이 잘 되지도 않고 여유도 생기지 않습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부족할 때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좋은 일이라면 여유가 없고 바빠도 지금 하십시오. 여유가 없을 때 하는 헌신이 진짜 헌신입니다.

 내일 시험이 있어도 예배를 빠지지 않으면 등수는 몇 등 떨어져도 영적으로는 몇십 등 올라설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도 자기 믿음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자존감도 높아지고 목회자와 부모는 그런 믿음을 대견하게 보면서 자녀의 찬란한 미래가 예측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배에 빠지지 않아도 불안감이 없도록 그 전부터 미리 시험을 준비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준비성과 책임감이 있는 철든 자녀로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중심적인 삶만이라도 굳게 결단하고 실천하면 현재의 모습이 초라해도 인물 가능성은 크게 높아질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십시오. “안 된다, 죽겠다, 못살겠다, 힘들어죽겠다.”는 사탄의 말들이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믿음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성령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놀라운 기회입니다. 성공했어도 예수님을 잡지 못하면 불행이지만 실패했어도 예수님을 꼭 붙잡으면 성공한 것입니다. 버릴 것을 잘 버리고 예수님을 꼭 붙잡으면서 내일의 희망을 개척해나가는 참된 성공자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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