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에 이르는 길 (로마서 6장 15-23절) <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
종양은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해 생긴 무의미한 생리 조직입니다. 그 중에서 치명적인 악성 종양을 암이라고 합니다. 암은 몸의 어디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위에 생기면 위암, 폐에 생기면 폐암, 간에 생기면 간암이 됩니다. 그런 종양이 마음에 생긴 것을 성경에서는 '쓴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자란 마음의 상처 덩어리인 쓴 뿌리가 지나치게 커지면 인성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마음암이 되어 가정과 인생을 파괴합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크게 자라서 악성 쓴 뿌리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쓴 뿌리가 커지면 자기가 먼저 괴롭다가 나중에는 남도 괴롭게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큰 해를 입습니다. 물론 모든 상처가 다 쓴 뿌리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보다 반응은 더 중요합니다. 똑같은 상처를 통해 어떤 사람은 쓴 뿌리를 내지만 어떤 사람은 복된 열매를 냅니다.
어떻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까? 인간적인 성공이나 세상적인 사랑이나 과학적인 상담이나 종교적인 신비만으로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상처가 마음암이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쓴 뿌리의 치유 도구로서 가장 좋은 2가지 덕목이 화평함과 거룩함입니다.
약 30여 년 전, 서울 약수동에 전 모 씨가 소유한 대형건물의 배전반에서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습니다. 그 불이 바로 옆에 있던 저의 아버님의 사업체 창고로 옮겨 붙어 거의 전소했습니다. 그 상황을 새벽 2시에 당구를 치러 나왔던 고시생 3명이 목격하고 그날 새벽에 그 사실을 경찰에 진술했습니다. 아버님은 목격자가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건물주가 어떡 작업을 했는지 고시생들이 처음 진술을 번복해서 아버님은 한 푼도 보상받지 못하고 결국 얼마 후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불의한 일이 저에게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제가 믿음이 아주 뜨거웠고 은혜도 넘쳐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꿀맛처럼 달게 받아들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 중에 용서하라고 하면 다른 어떤 군말도 없이 용서했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이 주일 설교 때 “과거의 상처와 슬픔의 줄을 끊어야 배를 저어 나아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억울한 화재 사건을 깨끗이 잊자고 결단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결단은 아주 복된 결단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그 일을 계속 생각하며 분노에 젖어 살았다면 전 모 씨는 멀쩡해도 저만 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의 상처를 믿음과 은혜로 극복하고 빈털터리의 상황에서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전 모 씨의 소식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잊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조치하셨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면 미워하는 자신이 조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조치하십니다.
은혜와 믿음을 가지고 과거의 한과 상처가 자기 내면에서 쓴 뿌리가 되지 못하게 하십시오. 또한 쓴 뿌리가 자라 인생과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미운 사람도 용서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멀리하더라도 미워하지는 말고 늘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거룩한 삶이란 죄를 짓지 않는 삶보다 더 나아가 희생하는 삶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 거룩함에 이르는 길 >
본문은 성도는 의의 종으로서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본문 19절에는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이 나오고 22절에서도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가 거룩함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은혜의 종이 되십시오
성도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죄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15절).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합니다. 거룩하게 살려면 거룩한 것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예배를 가까이하고 교회를 가까이하고 좋은 성도를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기를 힘쓰면 거룩한 삶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은혜로운 사람 옆에 있고 은혜 아래에 있으십시오. 은혜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살아가기가 막막합니다. 그런 순간들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풀리고 복원되지 않을 것 같은 관계가 복원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붙잡히고 고통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살면서 가끔 “내일도 어둠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 아픈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나 저의 죄와 허물을 생각하면 이 고통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면서 어둡고 아픈 마음으로 맞이했던 내일이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진 경우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쉽게 잊어버려서 그렇지 사실상 그런 은혜가 지나온 삶 중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단계도 스스로는 높이기 힘들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높아질 것입니다.
2. 순종의 종이 되십시오
죄와 순종이 반대 개념입니다(16절).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 죄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순종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성령님의 강동을 따라 순종의 길을 선택하면 죄의 극복 가능성도 커집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좋은 것은 그냥 오지 않고 좋은 선택을 할 때 옵니다. 때로는 고난이 예상되어도 좋은 것을 선택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복된 인생이 펼쳐집니다. 고난이 예상되어도 믿음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쾌락도 일시적이지만 고난도 일시적입니다.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기보다 고난이 예상되어도 믿음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학생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지만 제자는 그것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선생처럼 되는 것입니다. 선생처럼 되어야 하니까 좋은 선생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성이 다 같은 영성이 아닙니다. 자신을 ‘기적의 종’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하고 허황된 말을 하는 사람을 선생으로 삼으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그의 삶을 닮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만한 죽을 영성만 배우다가 결국 무섭게 추락합니다. 순종할 사람을 잘 선택하는 것도 복입니다.
성도의 행위 중에 가장 위대한 행위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기도나 전도보다 중요하고 교육이나 봉사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선언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개념임을 생각할 때 순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순종은 순종하는 대상이 가진 것을 상속받게 하는 가장 위대한 통로입니다. 자기 뜻과 현실에 맞지 않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힘써 순종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에게도 나타날 것입니다.
3. 의의 종이 되십시오
성도는 말씀에 순종할 때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17-18절).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 헌신의 길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 자기 뜻에 의한 추가 계획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신을 드릴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19절).
어떤 사람은 생각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게 된 존재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의의 종이 되어 의롭게 살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도의 삶은 구원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제자가 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대가 없이 받는 것이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대가를 치르고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대가를 치르는 삶을 통해 의롭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의의 종이 되라는 말은 비교적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나처럼 비교적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아직도 네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르는구나! 내가 보여주마.”라고 하시면서 훈련의 길로 들어서게 하십니다. 의의 종이 되라는 말은 비교적 정직하게 살면서도 “나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아직도 네가 얼마나 의로운지를 모르는구나! 내가 보여주마.”라고 하시면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4.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합해 물질적인 축복이나 문제해결의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처럼 동기가 불순한 믿음은 마치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나 출세나 성공을 얻기 위한 축복의 수단으로 예수님을 찾지 마십시오. 그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기를 힘쓰면 예수님의 부요가 내 부요가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과 연합하면 거룩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영생을 얻습니다(22-23절).
늘 예수님의 신부란 의식을 가지고 사십시오.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로 영적인 팔자를 고치는 가장 복된 일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사주팔자에 따라 모든 운명은 타고난다고 하면서 팔자는 결혼으로 고쳐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운명이 달라지면 “팔자를 고쳤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팔자를 고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의 사나운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팔자를 고쳐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를 때는 사실상 거의 변화된 삶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스승이나 정치적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예수님과 온전한 연합이 이뤄지는 변화를 받은 후로부터 그들은 자기를 드림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신랑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때부터 신비한 행복이 따라옵니다.
< 예수님과 하나 됨의 축복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사랑에 빠진 여자(Woman in Love)>란 노래가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가사만 의역하면 대략 이런 가사입니다. “인생은 한 순간이다. 그런데 꿈이 사라지면 외로운 것이다. 사랑의 길은 좁고 멀다. 그러나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준다. 나는 사랑에 빠진 여자이기에 당신을 내 세계로 이끌고 끌어안기 위해 뭐든지 하고 싶다. 사랑 안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내 사랑을 느낄 것이다. 진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1980년대 그 노래를 듣다가 잠깐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사를 들어보니까 사랑의 의미가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은 여자에게는 역사고 남자에게는 에피소드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에피소드가 아닌 역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부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의 일꾼’으로만 여기지 말고 ‘주님의 신부’로 여기면서 주님의 신부답게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영성훈련이나 제자훈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주님의 신부다!”라는 의식 훈련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은 믿음의 최대 본질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영원한 동반자가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부모와 자녀도 너무 함께 있으면 안 좋습니다. 때가 되면 자녀는 빨리 독립해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관계도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래 함께 살아도 좋은 관계는 부부 관계뿐입니다. 신앙생활도 부부관계처럼 설정해서 자신을 예수님의 신부로 알고 해야 행복한 신앙생활을 쉽게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팔자를 결혼으로 고칠 수 있다는 개념은 신앙의 신비를 계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 삼는 선생님이나 병을 고쳐주시는 의사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자선가나 나라와 인권을 지켜주시는 정치가로도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죽을 팔자를 살 팔자로 고쳐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과 결혼해 팔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큰 의미에서 부부관계처럼 설정해서 교우들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알고 해야 행복한 교회생활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가 비유적인 의미에서 내 영적인 팔자를 고쳐줄 백기사가 될 수 도 있음을 깨닫고 사심 없이 교우를 섬겨주십시오. 성령충만을 신비로운 신앙형태를 가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충만의 핵심적인 뜻은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교우들과 하나 되는 삶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함의 핵심적인 뜻이기도 합니다. 항상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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