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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2월1일~2월28일 묵상설교

by 【고동엽】 2022.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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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설교[ 2월 1일] 마귀의 궤계를 알라(출 7:1-7)     #4169E1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방해했습니다. 여기서 바로는 영적으로 마귀를 뜻하며 애굽은 죄악 세상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이제껏 속해 있던 죄악 세상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미혹하여 계속 죄악 세상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알고 이에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어떤 궤계로 우리를 미혹하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마귀는 우리에게 죄악 세상에서 계속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바로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분리될 것을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악 세상에서 떠나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는 하나님을 섬기되 적당히 타협하며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바로는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되 경우에 따라서는 주일도 범하고, 돈 없으면 십일조도 내지 말고, 또한 너무 광신자가 되지 말고, 적당히 고상한 신자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섬김에 있어서 적당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우리가 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신앙의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천국 시민이요, 능력 있고 승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이 바로 주님 앞에 결단할 때입니다.

 

 

365일 설교[ 2월 2일]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신 이유(출 10:1,2)
 

하나님께서는 큰 권능과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데 그 어떠한 어려움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직접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권능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시는 영원한 보호자이심을 자손 대대에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하여 평안하게 사는 동안 하나님을 잊고 있다가, 바로의 압제를 받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여러 가지 표징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만이 오직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애굽에 행하신 표징을 직접 체험한 당대뿐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대대로 알게 함으로써 세세토록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와 복음을 늘 기억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간증하여, 믿지 않는 이웃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 3일] 나의 하나님 야웨(마 22:32)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믿고 있는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첫째, 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예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예비해 놓으시고 그를 통해서 만민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의 일생을 예비하셨으며 그의 계획과 뜻에 따라 섭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나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풍성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질 때, 온전한 순종을 보임으로써 일평생 형통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게 쏟아 부어 주시는 복을 받아 풍족하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나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서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20년 만에 귀향하게 되었지만,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서 상황을 보아 도망칠 생각으로 얍복 강을 건너지 않고 혼자서 강 이 편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던 끝에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그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통해 우리의 자아와 불순종을 깨뜨려 버리고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연단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며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 4일]다가오는 문제들과 싸워 이기는 길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의 지휘하에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창일한 홍해로 앞길이 막혀 주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뒤에서는 바로가 애굽 군대를 이끌고 질풍처럼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사면 초가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여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에게 “야웨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선포하였고, 과연 그 말대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애굽 군대와 친히 싸워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하나님 중심으로 서야 합니다. 큰 문제를 당해 암담한 처지에 있을 때 사람들은 인간적인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중심에 서서 문제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음을 끝까지 견지해야 합니다. 기대감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결코 믿음을 지킬 수 없으며 축복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대감은 찬란한 내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믿음과 소원을 가지게 함으로써 오늘의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문제를 극복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수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음을 견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믿음의 승리자가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 5일]율법의 근본 정신(마 23:23)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릴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의 진정한 근본 정신을 간과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만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의 근본 정신은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의입니다. 의란 공평과 정의를 의미합니다. 공평이란 빈부 귀천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정의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의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차별 없이 공평하게 판단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입니다. 인이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은 불쌍하고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며, 내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없는 사람과 함께 나눔으로써 더불어 누리고, 힘든 일이나 괴로움은 서로 나누어 짐으로써 반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특히, 고아와 과부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셋째, 신입니다. 신이란 믿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믿음의 표현이라면, 믿음 없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믿음이란 신앙인이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기본 요소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여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밖으로 경건한 모습을 내보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이란, 내적으로 경건하여 그것이 밖으로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경건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의와 인과 신을 갖추고 그것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 6일]교회의 치리자의 자격(출 18:21)
 

오늘날 세상의 여러 조직의 성패는 유능한 관리자 확보에 달려 있습니다. 유능한 경영진을 확보한 기업체는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체는 앞날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구로 쓰임받는 여부는 교회의 치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운영과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치리자들이 유능하면 그 교회는 효과적으로 운영되며 성령의 도구로써의 기능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능한 교회의 치리자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지도자의 유형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와 사람을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에만 치중하고, 공동체의 유익과 발전에는 무관심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요, 신앙의 기초이며, 교회 운영과 행정의 기반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진실 무망한 자입니다. 진실 무망하다는 것은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울 것이 없이 선하고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뛰어난 지도자라 할지라도 진실하지 못하다면 교회를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정직한 자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리자는 선하고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 17:23)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뇌물은 판단을 흐리게 만들므로, 뇌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공의를 저버리고 타락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리자는 뇌물을 미워하고 정당한 기준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능한 교회의 치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재덕을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365일 설교[ 2월 7일]계명은 지킬 수 있습니다(출 20:2-17)
 

자연에는 자연 법칙이 있습니다. 또 국가에는 국법이 있어서 그 나라의 국민은 그 법을 지킬 의무를 부여받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으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義)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 얻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은혜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을 완성시키시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므로 십계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십계명은 더이상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평생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하여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십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계명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아직은 비록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 9일]신앙과 구제(마 25:31-46)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분리하듯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때 심판의 기준은 구제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구제는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기에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구제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적인 신앙은 외면적인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과 믿음의 실천은 하나로 결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데,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실천으로서 구제에 힘쓸 때 큰 유익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성경에는 평상시에 구제에 힘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보상을 받은 여러 사람의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평소에 기도와 구제에 힘쓴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있습니다. 그의 온 집안은 구원받고 성령 충만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열심히 옷을 만들어 헐벗은 이웃들을 구제하던 도르가는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이 평소에 구제에 힘쓴 사람은 하나님께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풍성한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고 말씀했습니다. 열심으로 구제하면 그것이 축복의 씨앗이 되어 하나님께서 맺어 주시는 축복의 열매를 풍성히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심판 날에 칭찬을 받습니다. 성경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고 말씀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보상과 풍성한 복을 받고 심판 날에 칭찬을 받게 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구제에 힘씀으로써 올바른 신앙을 표현하고 이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2월10일]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구원(마 26:36-46)
 

욥기를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욥 5:7).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죄와 허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와는 상관 없이 철저히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영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짓고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고 처절한 영적 절망과 고독을 당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심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는 쓰라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믿고 따르던 유대 군중들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의 심적인 고통과 고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육체적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붙잡혀 가야바의 집 뜰에서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매맞으며 수욕을 당하셨습니다. 금요일 새벽에는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당하신 후, 홍포를 입으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으며,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피를 흘리시며,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갈보리 산을 향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6시간 동안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큰 구원의 은혜는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처절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11일]두려움을 쫓아내라(시 27:1,2)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래 일을 미리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왜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부정적인 것만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두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형벌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이런 두려움을 깨끗이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 능히 어떤 두려움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생각을 지배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근심과 두려움은 모두 사라지고, 평강의 하나님이 실족치 않게 든든히 붙잡고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시므로 어떠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며, 어떤 난관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주님만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철옹성보다 강하고 견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12일]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세 가지 의무
 

본문은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이 야웨 앞에서 죽음을 면키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이 된 우리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의 물에 수족을 씻어서 죽음을 면하라고 했습니다(30:19-21). 물두멍은 놋으로 만든 일종의 큰 세숫대야인데,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이나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반드시 이 물두멍에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두멍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수족은 죄악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물두멍의 물에 더러워진 수족을 씻으라는 정결 규례는,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먼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금 방울과 석류를 달아서 성소에 나갈 때 그 소리가 들리게 하라고 했습니다(28:34-35). 제사장은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야웨께 부정을 범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매우 신중하고 조심성 있게 직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제사장의 특권을 부여받은 우리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제사장은 베로 고의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라고 했습니다(28:4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는 길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의 의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왕 같은 제사장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이 세 가지 의무를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먼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모든 죄를 사함받고,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경외와 감사의 마음으로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13일]우리의 고난을 짊어지신 예수님(마 27:27-34)
 

인간의 삶에는 평탄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적인 사건을 당할 때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도 있으며, 원수의 공격으로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고난을 담당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고난을 자청하셨습니다.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부귀, 영화, 공명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지은 사람, 세리, 창녀, 병든 자, 가난한 자, 비천한 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과 고통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 인류를 죽음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의 고난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고난에서 해방되어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죽음, 질병, 저주, 가난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건강과 축복과 부요와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고난의 짐에 눌려 있는 자들과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그들의 짐을 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죄악과 몰인정, 무자비와 살상 때문에 이 순간에도 고통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고통당하고 소외되고, 죄짓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힘을 다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지금도 고난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 치는 자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러분은 어떤 고난의 짐을 지고 계십니까?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그 짐을 내어 맡기십시오.

 

 

365일 설교[ 2월14일]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출 31:12-17)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제정하시고, 그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명령하셨을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일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는 야웨,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야웨”(렘 33:2).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하실 뿐 아니라 안식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복 주시고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창 2:1-3).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을 보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와 교제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복도 주십니다. 이사야 58장 13절과 14절을 보면, 야웨의 성일을 존귀한 날로 여기고 사사로운 오락을 구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신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이 땅에 살 동안에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 있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며,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이사야 56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를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 즉 예배를 기꺼이 받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기쁨이 샘솟아 우리의 영혼이 소생케 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맡은 바 생업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안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임을 깨달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365일 설교[ 2월15일]예수님의 지상 명령(마 28:16-20)
 

예수님께서는 감람 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신 지상 명령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권세 있는 이름을 사용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름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병을 고쳤으며, 가난과 저주를 몰아냈고, 또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이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예수 이름을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전도와 선교의 명령입니다. 본문 19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복음을 이웃과 세계에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전도와 선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세계 각국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전도와 선교에 참여하면 됩니다. 만약 일선에 나가서 선교를 할 수 없다면, 기도와 물질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전도와 선교에 동참할 때 예수 이름의 권세가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배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지켜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전도와 선교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 전체를 통해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16일]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베소서 1:15~23(17절) / 480장-기도하는 이 시간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 기도하기 전에 바울이 한 것과 성도들을 위한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15~16,17~19절)?

2.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3가지로 찾아보십시오(20~23절)?
 
말씀묵상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를 인하여 감사할 뿐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더욱 자라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것은 첫째, 성숙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새로운 사람으로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격이 미숙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하고 혼합되어 살고, 믿음으로 살지도 못합니다.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성을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둘째,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성경에서 사명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8)과 주님의 지상명령(마 28:19~20; 행 1:8)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에 있어 사명은 다 같습니다. 다만 이 사명을 순종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를 뿐입니다. 내가 어떤 모양으로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하는 것은 내가 찾아야 할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기 위하여, 또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거룩한 투쟁(고전 9:26~27)을 하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19절).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죽으신 그리스도를 살리심으로 나타났습니다(20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최고의 적인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위대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셨습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인을 능력 있게 합니다(행 4:19~20). 둘째, 그리스도를 모든 악한 영들보다 뛰어나게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21절). 악한 영들인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르던 천사들의 계급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악한 영들보다 뛰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이들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우월성을 갖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을 능력 있게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되게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22~23절). 머리되게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합니다. 신앙공동체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을 능력 있게 합니다.

 

 

365일 설교[ 2월17일]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자의 자세(출 35:21)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여러 가지 예물을 드립니다. 십일조, 주일 헌금, 감사 헌금, 성전 건축 헌금, 선교 헌금 등 실로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이런 각종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에 감동을 받아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이 감동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간적으로 마음이 사로잡힌 바 된 상태를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 마음이 사로잡힌 자들은 성막 짓는 데 소용되는 예물을 즐거이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에도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예물을 즐거이 드렸습니다(스 1:5,6).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예물을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의 예물을 요구하실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지체 없이 순종함으로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십니다.

  둘째,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이는 기쁨으로 즐거이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

  을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예물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열납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물을 드림으로써 신앙이 견고해지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다면 마음에 감동이 오는 대로 기꺼이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물을 기쁘게 열납하시고 우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한 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18일]낡은 부대, 새 부대(막 2:21,22)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지 말고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먼저, 낡은 부대와 새 부대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낡은 부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옛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새 부대는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새사람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육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은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써도 육에 지나지 않으며, 이 육은 죄와 질병과 저주와 멸망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옛사람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세상과 죄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결국에는 죄값으로 멸망받는 것이 옛사람의 운명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옛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어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럼, 새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보면, “너희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새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삽니다(잠 9:10). 또한, 새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으며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부패한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새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죄와 질병과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이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말과 생각의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몰아내고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의와 치료와 축복과 천국 의식을 마음속에 채우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으로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새사람답게 살고 계십니까?

 

 

365일 설교[ 2월19일]예수님의 진정한 혈육(막 3:32-35)
 

예수님께서 식사하러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만나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진정한 혈육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진정한 혈육은 육신적인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영과 마음으로 연합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 와 있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밖에 와 있는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님의 혈육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혈육은 예수님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혈육이 되기 위해서는 영과 마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예수님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진정한 혈육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뜻과 우리의 방식대로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일은 아무리 성공적으로 많이 할지라도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뜻대로 한 일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정한 혈육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시오.

 

 

365일 설교[ 2월20일]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리라(레 2:11-13)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제사 방법 중, 본문에는 소제를 드릴 때의 주의 사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제’란 문자적으로는 ‘예물’, 혹은 ‘선물’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한 그의 복을 사모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러한 소제의 제물로는 곡식이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제를 드릴 때 제물에 누룩이나 꿀은 넣지 말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누룩은 부패와 위선을 의미하고(마 16:12), 꿀은 세속적인 쾌락과 재리를 상징합니다(잠 5:3). 이와 같이 누룩과 꿀은 우리의 삶을 부패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독소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제물로서 화제를 드릴 때에는 누룩과 꿀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룩과 꿀은 발효성이 강한 식품으로써,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발효하여 그 원래의 성질이 변질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과 꿀은 쉽게 변질되는 신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변질시키는 누룩과 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단호하게 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3절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소금이 매우 비싸고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또 소금은 맛을 내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언약의 상징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예물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소금을 가리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소금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소제물에 대한 주의 사항은, 우리가 부패와 세속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1일]만남과 은혜(막 5:25-34)
 

본문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침받은 기사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을까요?

  첫째, 이 여인은 불치의 혈루증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삶에 대한 의욕과 의지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처럼 생명을 갈급해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적극적인 의욕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을 만나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한 번만 들은 것이 아니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알고 확인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셋째, 이 여인은 확신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란 ‘이해’나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믿음을 통해 이 여인은 불치의 병을 치료받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이해나 막연한 기대는 결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오직 이성을 초월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넷째, 이 여인은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군중들을 헤치고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느 한 순간에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믿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믿음이 동할 때 그 믿음대로 실천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하여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줄기찬 의욕을 가지고, 말씀 안에 거하며,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2일]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려면(막 5:35-43)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당장에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함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일이든지 주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의 질병을 고치러 가시는 도중 이미 그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에는 반드시 절망의 시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이로는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왜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 그 믿음을 깨뜨리려는 시험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절망적인 시험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시험을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성취되기까지 반드시 한 번은 죽음과 같은 절망의 시련을 통과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신 후, 훤화하고 우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야이로 내외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며, 긍정적인 믿음이 충만한 가운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때는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먼저 시련의 터널을 지나게 하신 후 우리가 가진 믿음을 따라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365일 설교[ 2월23일]야웨께 합당한 예배(레 7:37,38)
 

구약 시대의 모든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법에 따라 드려야 했습니다. 본문은 야웨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예배의 원칙과 형식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의 예배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믿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예배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서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피 흘림입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는 필수적으로 희생 제물의 피가 있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희생 제물의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헌신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번제를 드릴 때 반드시 제물을 태워서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배 드리는 자의 헌신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태워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구약 시대와 같이 특별히 정해진 예배의 규칙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정신만큼은 구약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중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헌신하는 자세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4일]부모 공경의 복(막 7:10-13)
 

예수님은 사람의 유전은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부모 공경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은 부모 공경이 무엇인지, 또 부모를 공경하는 자의 받을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항상 부모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부모에게 가 있는 자녀는 부모를 보살펴 드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본문 11절부터 13절을 보면,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부모 공경도, 하나님 공경도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첫 걸음은 부모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고 살펴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부모의 뜻에 순종하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약속된 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범사에 잘 되는 복입니다. 에베소서 6장 2절과 3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를 실천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건강 장수의 복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야웨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병 장수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무병 장수의 길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무병 장수의 길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부모를 얼마나 공경하고 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그리하여 형통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65일 설교[ 2월25일]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3-45)
 

레위기 11장에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규례를 주신 것은 주변의 이방 족속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을 보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추구하거나, 눈으로 보고 즐기거나, 또는 욕심을 내서 빼앗는 일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세상의 부정한 것에서 완전히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러분을 부정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구별’이란 말은 단순한 ‘차별’ 이상의 뜻으로, ‘헌신’을 의미합니다. 즉, 헌신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세속과 분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거룩은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거룩이 아니라, 자원해서 헌신된 자세로 드리는 거룩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 입고 다니는 옷, 출입하는 곳, 쓰는 말씨 등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있습니까? 또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먼저 거룩해졌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도 거룩해질 수 있도록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도 거룩해질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의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6일]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막 8:34,35)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이나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온전히 주님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단호히 옛 생활을 버리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제자의 도리인 것입니다.

  셋째, 많은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며,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생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고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자랄 때까지,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 주님의 생명을 증거하는 제자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의 도리를 바로 알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7일]힘이 미치는 대로 드리라(레 14:21-32)
 

본문은 문둥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규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은 결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문둥병자가 정결케 되는 규례에 의하면, 원래 문둥병 환자가 나았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속건제와 속죄제와 번제의 제물은 흠 없는 어린 숫양 둘과 일 년된 어린 암양 하나, 그리고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입니다(레 14:10). 그런데 본문 21절과 22절을 보면, 만약 사람이 가난하여 이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어린 숫양 하나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그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되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도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둥병자가 정결케 되는 데 드려지는 예물이 그것을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도록 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물 드리는 자의 사정과 형편을 고려하셔서 예물을 제정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일률적으로 예물을 바치게 하시지 않으시고 차등을 둠으로써 가난한 자들도 부담없이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의 범위내에서 힘이 미치는 대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하여 적게 드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의 힘이 미치는 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 자세로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고린도후서 8장 12절에 보면,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드리려는 마음이 담긴 것이라면 적은 액수의 예물이라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불신앙적인 예물은 액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힘이 미치는 대로 드리는 것이요, 드리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365일 설교[ 2월28일]이스라엘 회복의 환상
 

1.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속에서 어떤 가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다.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망상에 불과했으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가능했다(롬 4:17). 따라서 질문의 의도는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아닌 ‘믿느냐 못 믿느냐’하는 것이다.
2.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12절): 이스라엘에게 있어 바벨론 포로 생활은 마치 무덤 속에서의 생활과 같았으므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실 것을 나타낸다.본문에서는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금 회복될 것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은 환상 중에 신적 능력과 예언자적 충동에 의해 골짜기 가운데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죽은 자의 해골이 가득했습니다. 그 뼈들은 마치 처절한 전투가 벌여져 살육 당한 자들이 매장되지 못한 채 있다가 살이 썩어서 뼈만 남고 서로 탈골되어 흩어진 것처럼 지면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절). 왜냐하면 이 질문은 믿음에 관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이들 뼈와 생기에 대해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고 예언합니다. 그때 해골은 에스겔의 기도에 대한 응답같이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감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며, 죽은 해골로 싸움을 대신할 심히 큰 군대를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이 환상은 포로 중에 있는 유대인의 비참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환상입니다. 그들은 깊은 절망에 떨어져 있었고, 자포자기하며,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11절)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과 섭리에 대한 능동적 신앙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사멸(死滅)에서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명을 받아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대언합니다.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2절). 그들은 원수의 땅, 마치 무덤에 생매장 당해 있는 것 같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융성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을 그들 속에 두어 그들로 살게 하십니다. 뼈들과 같은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힘과 소망이 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십니다.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출처 : RED COMPASS 선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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