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됨을 지향하라
일전에 한 사람이 필자의 글에 나온 ‘장애인’이란 표현을 보고 이런 생각을 전해왔다. “목사님! 요새 장애인에 대해 ‘장애우’라고 많이 표현하는데, 장애인 사랑을 강조하신다면 표현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장애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필자도 한때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표현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다시 ‘장애인’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장애인을 친구로 대해주자!”는 의미의 ‘장애우’란 말이 오히려 장애인을 2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장애인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란 말은 비하적인 표현이 아닌 보통명사다. 반면에 ‘장애우’란 단어를 쓰는 것은 장애인을 ‘나와 다른 사람’ 혹은 ‘나의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장애우’란 단어를 쓰는 것은 취지는 좋지만 오히려 장애인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고 말없이 돕는 것이다. 선진국은 단순히 돈이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시설과 배려와 편견 없는 시선을 가진 것이 바로 선진국의 지표다.
어느 날, 프랭크(Frank) 신부가 한 장애인 공동체를 방문했다. 마침 미사 시간에 담당신부가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대신 미사를 인도하게 되었다. 기도로 미사를 시작했는데 곧 자신에게 평소에 있던 신경쇠약 증세가 엄습해왔다. 그 뒤로부터 신부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말을 계속 더듬었다. 간신히 미사를 끝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감에 싸여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장애인들이 그에게 달려와 그를 껴안으며 감격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신부님! 오늘 저희들은 생애 최고의 미사를 드렸어요.” 신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반응에 깜짝 놀라서 미사가 좋았던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애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부님! 당신은 우리와 같아보였기에 특히 좋았어요. 감사해요.”
사람은 하나임을 느낄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 장애인들이고 서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다. 1995년 미스 아메리카에 뽑힌 화이트스톤(Whitestone)은 청각장애인이지만 눈치와 감정으로 발레공연을 잘했다. 어느 날, 발레 공연 후, 한 기자가 물었다. “청각 장애로 발레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때 그녀가 발랄하게 대답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최대의 장애인이 아닌가요?”
장애인은 따로 없다. 요새는 선천적 장애인보다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 더 많다. 누구나 장애인의 가능성을 가진 예비 장애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장애인은 하나이고, 장애인을 돕는 삶은 미래의 나를 돕는 삶이다. 서로 부족한 존재들이 ‘하나임’을 알고 ‘하나 됨’을 지향할 때, 장애가 장벽이 되지 않는 세상이 펼쳐진다. ‘하나임’을 알고 하나 되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다.<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 이웃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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