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제자가 되십시오 (열왕기하 12장 20-21절) < 신뢰가 중요합니다 >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미국성결교) 출신 목사로 1992년 한국에 처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당시에는 많이 외로운 처지였고 선교연맹의 비전과 정체성을 굳게 하려고 매년 총회에 힘써 참석했습니다. 총회에 참석하면 회의만 하지 않고 목회자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선교의 꿈을 키웁니다. 또한 한국에서 목회자 대표가 한 명이라도 오면 비전이 커지는 느낌이 있어서 동료 목회자들도 큰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20여 년간 미국과의 커넥션이 이어져왔습니다.
가끔 총회 참석 문제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교회에 재정적 여유가 없습니다.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고 총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하소서! 제가 자리를 비우면 초청 목사님 사례도 필요하니 그 사례비에 대한 감사헌금까지 드리고 가게 하소서!” 그 기도가 응답되어 누군가의 신비한 헌신으로 교회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감사헌금까지 하면서 매년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퍼주면 세월이 지나서 더 받습니다. 헌신의 신비한 축복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열매가 드러날 때도 많습니다.
총회에 자비량으로 참석하는 사실은 지난 20년간 교회 재정부원들 외에는 거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일부 교인들이 총회 참석 문제와 교회 재정 문제를 연관시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성도들을 따로 만나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가 “집사님! 총회는 자비량으로 참석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구차합니까? 그때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알 날이 있겠지. 성도라면 기본 신뢰는 가지고 있겠지.”
교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신뢰입니다. 신뢰란 평소의 언행으로 생기는 것이지 어떤 사실이 명백히 밝혀져야 신뢰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좋은 신뢰는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불신할 때 부모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넌 몰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사랑했던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얼마나 구차한 일입니까? 부모의 사랑이 진심이라면 진실이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 힘써 순종하십시오 >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참된 제자는 ‘신뢰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순종하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는 ‘인격에 대한 순종’도 잘해야 하지만 ‘법과 질서와 시스템에 대한 순종’도 잘해야 합니다. 받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을 잘하고, 개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순종하려고 하고, 자기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기존의 프로그램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이 참된 제자도입니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관직을 만드는 것을 ‘위인설관(爲人設官)’이라고 합니다. 위인설관은 공동체와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방아쇠가 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특정한 사람을 위해 행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위인설행’이라고 합니다. 위인설행도 역시 공동체와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방아쇠가 될 때가 많습니다.
각 가정마다 현실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남이 그 전통을 바꾸라고 쉽게 말하면 안 됩니다. 전통에 집착하는 ‘전통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전통을 존중하는 ‘전통존중’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전통 때문에 고난과 상처가 불행이 지속되거나 배움과 경험을 통해 전통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 점차 전통은 바뀝니다. 그런 시간적인 여유나 배려도 없이 전통을 빨리 바꾸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부모가 바뀔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녀는 먼저 부모님을 존중하며 사려 깊게 의견을 피력해야 합니다.
각 교회도 나름대로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외부인이나 내밀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 전통을 바꾸라고 쉽게 말하면 그것도 역시 복된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도 어차피 조금씩 변화됩니다. 바꾸려고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물론 때로는 전면적인 개혁도 간혹 필요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일단 교회의 한 식구가 되기로 작정했으면 먼저 그 교회의 법과 질서와 전통을 힘써 존중하고 적응하는 일부터 잘해야 합니다.
개혁을 추구할 때 먼저 전통을 힘써 존중한 후 추구하십시오. 먼저 힘써 존중하고 참여함으로 교회를 향한 겸손한 사랑과 기존 체제에 대한 존중심과 배려심이 있는 사람으로 먼저 인정과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그런 존중심과 배려심을 인정받는 ‘소리 없는 3년 이상의 기간’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 총회에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목회자가 큰 소리를 치거나 강력한 개혁의견을 내는 모습은 좋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먼저 시스템에 순종하고 적절한 때에 개혁 의견을 내는 성품이 복된 성품입니다.
어디서든지 먼저 힘써 참여하고 협조한 후 개혁 의견을 내십시오. 참여와 협조가 없는 사람이 내는 개혁의견을 리더가 쉽게 받아들이면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리더십의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오후 성경공부와 같은 기존 모임에 힘써 참석하는 사람이 “주중에 성경공부 모임을 가집시다.”라고 하면 “정말 말씀에 갈급한 사람이구나!”라고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기존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하면 “말씀에 갈급한 사람이라는 자랑에 갈급한 사람이구나!”라고 좋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전도도 잘하고 사랑과 섬김의 탁월성을 인정받는 사람이 “주중에 전도 모임을 가집시다.”라고 하면 “정말 영혼구원에 갈급한 사람이구나!”라고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평소에 수많은 전도 기회를 외면하는 사람이 그런 전도 모임 의견을 내서 그 모임을 시작했는데 정작 자신이 그 모임을 빠지면 “영혼구원에 갈급한 사람이라는 자랑에 갈급한 사람이구나!”라고 좋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의견을 잘 내는 것’과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는 의견을 잘 내기 전에 약속부터 잘 지켜야 합니다.
“주중의 전도 모임을 가집시다.”라고 의견을 낸 것은 “저는 그 모임에 끝까지 힘써 참여할 것입니다.”라고 무언의 약속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시작하자는 개혁 의견을 내놓고 정작 자신은 도중에 빠져버리면 그 모임을 수용한 리더는 말은 안 해도 배신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리더십도 적지 않게 훼손됩니다. 리더는 어떤 일이 될 것처럼 말한 후 “아니면 말고...”라고 하는 거짓 양치기 리더가 되어도 안 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안 되면 말고...”라고 하는 허약한 무척추 리더가 되어도 안 됩니다.
자기가 한 말을 힘써 지키려고 하십시오. 시간도 잘 지키고 약속도 잘 지키십시오. 특별히 자기가 개혁 의견을 내어서 어떤 모임이나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최선을 다해 지키고 남들이 다 이탈해도 자신만은 끝까지 이탈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말이 주로 앞서는 사람은 대개 중도 이탈도 잘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런 사람이 내놓는 개혁 의견은 리더가 쉽게 들어주기 힘듭니다. 영성을 자랑하거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그런 개혁 의견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한 것으로 진정성이 의심되면서 결국 리더를 무척추 리더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그것을 둘로 여기는 ‘영성 따로 생활 따로’의 삶은 교회의 성숙을 망치는 대표적인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어디서든지 먼저 겸손하게 힘써 동참하면서 신뢰받는 인간상을 만드십시오. 그런 모습은 동료 교우들에게나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리더에게 먼저 순종하는 법부터 잘 배우고 공동체에 참여하는 법부터 잘 배운 사람이 참된 제자가 되고 인물이 됩니다.
< 바르게 순종하십시오 >
순종하라는 권면이 명백히 잘못된 것조차 무조건 순종하라는 권면은 아닙니다. 리더가 “도둑질을 하라. 사기를 쳐라. 거짓말을 하라.”라고 하면 무조건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리더가 도둑질을 하고 사기를 치고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 분명하면 그런 리더는 오히려 멀리하십시오. 특히 성령을 내세워 기적적인 치유나 예언을 선포한 후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거짓 증거로 영혼을 미혹하면 더욱 멀리하십시오.
일반적인 거짓 증언도 잘못인데 예배나 집회 때 거짓 증언을 하면 그것은 예배나 집회를 거짓 모임으로 만드는 것이고 특히 성령님의 이름을 내세워 그런 거짓 증거를 하면 그것은 성령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 성령님을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처럼 인식시키는 최악의 무속적인 죄가 됩니다. 그런 무속적인 죄에 결코 빠지지 마십시오. 이단 교주의 거짓과 미혹에 넘어가면 자기 영혼도 죽고 자녀 영혼도 죽습니다. 그런 불행이 교회사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명백한 종교사기는 사회의 법과 제도와 시스템이 힘써 막아주도록 잘 정비해야 합니다.
거짓 증언과 거짓 약속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깨집니까? 지난 4월에는 진돗개에 영력이 있다고 하면서 진돗개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 신도가 친엄마 앞에서 3살 된 남자아이를 “악귀가 씌었다.”고 나무주걱으로 입술이 터질 정도로 때려죽이고 그 사체를 묻었다가 다시 파내어 태우기까지 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미혹되는 것 외에 엄마가 아이의 죽음을 그렇게 방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종교사기의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부가 <종교사기 고발센터>만 만들어주어도 그런 유사한 비극을 상당히 미연에 막을 수 있습니다.
1992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던 거짓 목사가 성령의 예언을 내세워 성도들은 집을 팔아 바치게 하고 자신은 그 돈으로 열심히 부동산을 샀습니다. 그런 미혹을 주의시키면 그 주의시키는 사람을 오히려 성령을 부인하거나 영성이 없는 사람처럼 공격했습니다. 입으로 “성령님이 말씀하셨어. 성령님이 역사하셨어.”란 말을 많이 하면 최고의 영성을 가진 성령의 사자입니까? 사실상 입으로 ‘성령, 성령’이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지난 몇 십 년간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통해 교회가 경험했던 현실입니다.
화려한 약속을 하는 거짓 교주의 말을 무조건 믿지 말고 말씀으로 자기 영혼을 잘 지키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던 짐 존스(Jim Jones)가 세운 ‘인민사원 기독교회(Peoples Temple Christian Church)’란 사이비 교회에 미혹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국에서 집단이주했던 남미의 가이아나에서 존스의 자살명령으로 900여 명이 집단 자살했고 그때 죽기를 거부했던 신도들은 무장경비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선택으로 멀쩡한 자녀까지 비참하게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모습입니까?
거짓 목자가 “아니면 말고.... 안 되면 말고...” 식의 거짓 증언을 하면 하루 빨리 그 공동체에서 탈출하고 분별력을 키워 다시는 그런 곳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시한부 종말론 피해자들이 주변에 수없이 많은 것을 알고도 여전히 성령을 일컬어 내세운 거짓 종말론과 거짓 예언과 거짓 치유를 성령의 역사로 믿는 것은 영적인 자살행위입니다. 성령님은 거짓말을 한 번도 할 수 없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거짓 증거에 미혹되지 않도록 분별력을 키우고 말씀 중심적인 바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결국 승리하십시오.
< 참된 제자가 되십시오 >
본문에는 처음에는 잘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무너진 요아스 왕의 기록이 나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왕정 복위 거사로 요아스는 7세에 남 유다의 8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의 멘토링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도 비교적 잘했고 성전을 보수하는 개혁도 효과적으로 성공시키면서 왕권도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왕의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130세에 죽으면서 요아스 왕도 비극의 길로 치닫다가 결국 신복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요아스 왕의 바침한 최후를 보면 멘토가 얼마나 중요하고 끝까지 겸손과 인내로 승리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웁니다. 승리를 얻는 과정에는 늘 어려운 순간들이 있기에 결국 최후 승리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믿음의 인내입니다. 상황이 잘 풀리면 교만하지 않도록 인내하고 반대로 상황이 매우 힘들면 포기하지 않도록 인내하십시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겸손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면 절망은 반드시 희망으로 바뀝니다.
가끔 자녀들은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부모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 이미 받은 사랑만 깊이 생각해도 그런 의문은 불필요합니다. 사랑이 부족하게 보였어도 부모님은 자신의 현실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철든 자녀는 “내가 정말 부모님을 사랑하나?”라고 바꾸어 질문합니다. 어떤 성도는 가끔 의문을 가집니다. “교회가 정말 나를 사랑하나?” 그러나 복된 교회생활을 원하면 이런 질문이 더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교회를 사랑하나?”
자녀가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의심해도 부모는 그 자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살인마도 자기 자녀는 사랑합니다. 미움과 속상함이 있어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왜 의심합니까? 사랑의 개념의 다르고 사랑하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도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면 내가 성공하고 건강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때로는 실패와 병을 통해서도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한 목사님 아들이 헌병대로 배치되어 주일에 말했습니다. “소대장님! 오늘은 교회에 가야 합니다.” 당시 주일에 교회에 가겠다고 말한 신병이 헌병대 역사상 없었기에 소대장이 말했습니다. “너 맞아 죽을래? 교회에 갈래?” 그 아들이 말했습니다. “맞아 죽어도 교회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놓고 무섭게 때렸습니다. 결국 기절했습니다.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자 소대장이 또 물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갈래?” 아들이 또 말했습니다. “예! 저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결국 소대장이 말했습니다. “그래! 너는 제대하는 날까지 교회를 다녀라!”
장벽 앞에서 “너무 어렵다. 너무 힘들다.”라고 하며 쉽게 물러서면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인내해야 하나님이 길도 열어주시고 응답과 축복도 주십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다 떨어져도 왜 풍성함을 느낍니까? 열매가 있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쭉정이는 바람을 날려 결국 실패하지만 알곡은 바람에 날리지 않고 결국 인내로 승리합니다.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승리하는 참된 제자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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