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비판 약 4:12 이한규 목사, 정리
▲피해자(↔가해자)의 잘못이 더 큰 경우
가족들 모임이 있어서 두 딸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승용차 뒷좌석에서 둘째 딸이 짓궂게 장난을 계속 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첫째 딸이 약이 올라서 큰 소리로 짜증 섞인 고함을 쳤다.
“하지 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첫째 딸 보다 둘째 딸의 잘못이 명백히 더 컸다.
그러나 저는 부모 입장에서,
부모 앞에서 함부로 큰소리치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함지른 첫째 딸을 더 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그때 두 딸 사이에 벌어진 일을 통해서,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깨달았다.
두 딸 사이에 잘못은 분명히 둘째에게 있었다.
그래서 첫째는, 큰소리로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 보면,
둘째의 잘못보다,
잘못한 형제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부모 앞에서 큰소리친
첫째가 더 큰 잘못으로 보였다.
그래서 첫째가 더 큰 야단을 맞았던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분쟁관계에서 7대3, 8대2의 가해자가 피해자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사방에 고함지르고 떠든다면,
하나님께서는 가해자의 잘못보다,
피해자의 용서하지 않는 잘못을
더 엄하게 보실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가해자보다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에게 더 크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판하는 권세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여러 가지 권세가 있는데
그 중에 절대로 위임하지 않으신 것이 한 가지 있다.
- 바로 심판하는 권세, 원수 갚는 권세이다.
심판하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잊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인간이 나서서 심판을 하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빼앗는 것이 된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복음 증거하는 사명, 사랑하는 사명 등은 우리에게 주셨지만
심판의 사명은 결코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내가 심판하면 -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의 극치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약 4:12
심판자가 문밖에 서 있다고 했다. 약 5:9
우리가 내가 심판자가 되는 길을 버리고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최상의 복수이다.
우리는 원수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 대신에 우리가 할 일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우는 일이다. 롬 12:20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는 넘치는 감사와 평안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진짜 신앙은 원수라도 자기 친구 삼을 줄 아는 것이다. 다윗이 그랬다.
원수 사울의 입에서, 다윗에 대한 찬사가 나오게 만들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인간은 사귀면 사귈수록 실망이 되니까
그래서 관계를 끊고, 대신에 애완견과 사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참 믿음은,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라.
▲자석에서 얻는 교훈
보통 그의 단점은, 그 사람의 장점이 너무 과도하게 나타났을 때이다.
축구를 잘 하는 사람이, 단독 드리볼을 자주 하는 것이 - 단점이 된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 단점이 된다.
막대자석에는 N극과 S극이 있다.
한 쪽은 끌어당기는 힘(장점)이 있고, 반대쪽은 배척하는 힘(단점)이 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장점과 단점을 한 몸에 지닌 것과 같다.
그런데 배척하는 힘(단점)이 밉다고, 막대자석을 절반으로 잘라보자.
그러면 끌어당기는 힘(장점)만 남는가?
아니다. 잘라진 자석은 여전히 N극과 S극을 가진다.
자석의 전체적인 힘만 약화될 뿐이다.
그러니까, 남의 단점을 위축시키는 비판은,
오히려 그의 장점까지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단점을 위축시키기 보다는,(비판적인 비판)
그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서 많은 효과를 거두어야겠다.(칭찬)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라
가끔 보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해!”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용기 있고, 정확하고, 빈틈이 없고, 깨끗한 분이다.
그런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는 더 꼬이고 교회는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분들은 자기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른 비판’(?)을 했는데 무슨 잘못이냐는 것이다.
비판은 지혜롭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바른 비판도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비판의 효과는 없어진다.
머리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을 여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감정이 뒤틀리면 이성도 뒤틀리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상대방의 약점만 찾아 비판하는 비판중독자가 되면 안 된다.
올바른 비판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비판 중독자는 남의 허물을 찾으면 기뻐한다.
우리는 누군가 비판할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의 장점도 함께 생각하자.
그래야 그 비판이 건전한 비판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멋진 비판
남을 정죄하는 것은 “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는가?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본능이다.
그러나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은 무서운 착각이다.
사실 비판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비판보다 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격려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비판의 목적이라면
가장 좋은 비판은 바로 격려다.
어느 날, 여리고에서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부르셨다.
(뽕나무는 잎이 많아서 거기 숨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자신을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말에 삭개오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고,
자기가 잘못을 네 배로 갚아 보상하겠다고 했다.
문제를 고치는 것이 비판의 목적이다.
예수님도 삭개오의 잘못을 아셨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고 “회개하라!”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멸시하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머무시겠다고 했다.
그 말씀에 삭개오는 마음이 녹아 내렸다.
얼마나 좋은 비판인가?
가장 좋은 비판은 약점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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