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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문을 극복하는 믿음

by 【고동엽】 2022. 12. 22.

인생의 의문을 극복하는 믿음          욥19:25~27         출처보기

 

※맨 마지막에, 스펄전 목사님의 예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씀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편.

 

◑서론/ 인생에게 다가오는 의문들

 

우리는 살면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만납니다.

믿는 우리들도 그런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 일들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진정 저와 함께 하십니까?"

 

마음속에 그런 의문은 있지만, 속으로 그런 의문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또 고민합니다.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는가?"

그래서 의문을 애써 부인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의문을 품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도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문이 다가올 때, 지혜롭게 그 의문을 대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가오는 의문의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원리를 꼭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의문은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의문은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의문(honest doubt)'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해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새로운 차원에서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은 의문(dishonest doubt)'은

불신 상태에 머물기 위해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정직한 의문'은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의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변명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이해하려고 씨름하는 것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으라고 하니까, 수동적으로 그냥 덮어놓고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덮어놓고 믿는 사람'보다 '성경을 펴놓고 믿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보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이 더 낳습니다.

 

왜냐하면 무관심한 모습은, 결코 영적인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철저히 계획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계획이 통하지 않는 인생의 절벽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앞뒤가 막힌 얍복강에서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기필코 축복을 얻어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의문을 품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려고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그런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

내게 주어진 어려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고, 지혜와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약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우리 각자를 온전하고, 구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게 고난이 필요했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지면서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누구에게 이처럼 의문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주어질까요?

무엇보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침노하는 자는 얻는다(마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대했을 때,

어떻게 예수님께서 "천국을 침략한다"는 과격한 표현을 쓰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간절히 사모하는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천국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더욱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이 전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문 중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정직한 의문은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하고 대답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의문이 다 풀어져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겠다고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책상을 펼치시고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신다고 해도, 우리들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수학문제만 봐도 이해를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다 설명해 주신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답을 다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 삶을 먼저 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답을 구하고야 말겠다는 자세를 버리고

최선을 다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겠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는 모험도 필요하고, 위험도 따르고, 대가도 치러야 합니다.

다 알고, 다 이해되는 상황에서 믿으려고 하면

진정한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축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고, 대가도 치러야

믿음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할 수 있고 믿음도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은 근육과 같아서, 사용하면 할수록 더 강한 믿음이 됩니다.

Faith is like a muscle. The more you use it, the more powerful it becomes.

 

이번에 교회 이전을 하고 나니 조금 더 믿음이 자란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근육이 강해졌구나!" 하는 생각에 참 기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1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큰 일을 행하심을 믿고,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요새 새벽기도에, 하나님께서 많은 분들을 보내주십니다.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나?" 꿈꾸는 것 같습니다.

 

이전 예배 처소에서는, 새벽 기도에 거의 새로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몇 명 인원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새벽기도회 말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몇몇 주위 친구 목사님들은 저보고 웍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이라고 오해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매일 새벽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 내공들을 한 곳에 모아 주일 낮 예배에 탁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마음을 붙잡고 새벽예배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자의 능력이 없어서, 새벽기도 식구를 늘리지 못한다고 생각해도

저는 꾸준히 새벽기도의 비전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기도 식구들을 계속 보내주십니다.

 

요새 새로운 기도식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시간차 은혜!"에 그저 놀라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3년 전에 새벽기도를 위해 기도한 것도

마치 어제 기도한 것처럼 응답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오늘 새벽에 또 사람을 보내주셨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는 외상이 없다"고 합니다. 현찰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외상일 뿐입니다. 반드시 현찰화 됩니다.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순결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는

신비한 영적 회오리의 원천이 되어 언젠가 반드시 큰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만 보고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길에는 때로 위험도 따르고, 때로 의문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다 섭리하시고 세상은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은 언젠가 귀한 자산과 열매가 되어 우리들에게 안겨지게 될 것입니다.

 

 

◑3. 인생의 의문이 생길 때, 영혼이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냉소입니다.

냉소적인 영혼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문을 가지되, 냉소는 가지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도 '진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하나님께 의문을 품은 때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진정 메시야인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 부활하셨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도마는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런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냉소는 처음부터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명적인 것입니다.

냉소도 질문을 하긴 하지만, 문제를 풀려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직한 의문이 아닙니다.

그저 조롱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냉소는 능글맞은 미소를 가지고, 의심을 즐겨하며 항상 의심으로 가는 길을 찾습니다.

냉소적인 영혼은 의심해야 만족을 느낍니다.

 

또한 냉소적인 영혼은, 믿는 사람들에 의해 받은 상처의 경험들을 오래 기억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포기하기 위한 변명으로 그 경험들을 활용합니다.

 

그리고 냉소적인 영혼은, 믿는 사람들의 실패를 지적하는 선수입니다.

그들은 불일치를 찾고 모순을 찾으면서 희열을 느끼고,

검사가 죄인을 심문하듯이, 하나님을 피의자처럼 심문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으로 "내 질문에 대답만 하세요!"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정의로운 질문에 답해주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증거를 보여주어도, 냉소적인 영혼은 그 증거를 외면합니다.

요12:3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냉소는 정직하지 못한 의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태도를 '완악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스클레로카디아'라고 합니다(막16:14).

 

'카디아'란 말에서 심장이 마비된 상태인 '카디액(cardiac)'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냉소는 영적인 심장마비와 같습니다.

 

그래서 ‘의문’에는 치료의 길이 있지만

‘냉소’는 참된 믿음을 방해하는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입니다.

 

냉소는, 항상 대답보다, 더 많은 반론을 일으키는 마음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냉소처럼 자기 영혼을 죽이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요하다면 의문을 가지십시오. 그 의문과 씨름하십시오.

심지어는 하나님과 씨름하십시다. 조사도 해보시고 여기저기 살펴보기도 하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냉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냉소주의자도 조사는 합니다. 그러나 '해답(answer)'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error)'을 발견하려고 하는 눈으로 조사를 합니다.

 

냉소는 조사는 시작할지라도 이미 의심하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냉소는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본문에 욥도, 엄청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21-22절).

그러나 그는 의문을 극복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그 날을 초조하게 기다린다는 뜻)"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후일에는 반드시 모든 서러움을 씻어주시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된 자리로 자신을 이끄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존재로 서는 것!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이 잘되는 것을 가지고 마음이 높아지지 말고,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는 것을 가지고 마음이 비참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얼마나 잘 하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잘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시면, 걱정될 사람이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게 잘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견고하고 끈질긴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내 삶이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의문을 품고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 자신이 사랑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보다 조금만 나으면 잘난 체하고, 음흉하고,

속이기 잘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잘 삐치고, 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다 나이롱 신자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마땅하지요."라고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대부분의 성자들은 자신을 '나이롱 신자'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자 중에 자신을 '성자답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자신을 나이롱 신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로 알았고,

어떤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어려움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성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쓰라린 경험을 했어도

냉소적인 영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름더미에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고, 성숙하게 됩니다.

 

과거와 실패와 상처를 묻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과거가 우리들을 묻을 것입니다.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암과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잊고, 분노를 잊어버린다면

시간은 영혼의 강장제와 같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분의 계획을 착착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누가 행복한 인생입니까? 냉소에 젖은 인생입니까?

지나치게 논리를 앞세워 따지며 사는 야곱 같은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까?

 

물론 사람은 논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논리를 전혀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논리가 없는 믿음은 지혜가 없는 열정처럼 위험합니다.

 

우리는 논리적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아는 지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영적인 차원의 삶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논리는 무거운 짐과 같아서,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에

항상 믿음이 논리보다 더 강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Reason carries much excess luggage, and would dwarf growth.

Faith must become stronger than reason.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옛날에 한 동네에 믿음과 논리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건강했기에, 하루에 30마일 이상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리는 유아와 같았기 때문에, 하루에 3~4마일밖에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걷는 동안에도 계속 불평하니까

동네 사람들은 논리와 함께 다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논리가 믿음과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요청했습니다.

믿음이 말했습니다. "논리야! 너 혼자 놀아라! 너는 나와 함께 걸을 수 없어.

우리는 걷는 속도가 다르잖아!"

 

그러나 논리는 완강하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논리는 도저히 믿음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논리는 모든 가능성을 다 꼽고 가니까

한참 뒤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녁 무렵 그들은 강가에 도달했습니다. 논리가 말했습니다.

"믿음아! 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 같아. 누가 다리를 놓을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믿음은, 아무 말 없이 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논리는 질겁을 하고 따라갔지만, 따라가 보니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강이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자, 높고 큰 산이 나타났습니다. 절망에 빠져 논리가 말했습니다.

"믿음아! 산이 너무 높아! 우리는 이 산을 오를 수 없어! 아마 다른 길도 없을 거야!

우리 여기에 앉아서 상황을 분석해보자! 아니면 그냥 돌아가자!"

 

그때 믿음은 논리를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논리야! 힘내!"

그리고 논리가 뒤쳐지지 않도록, 논리를 격려하며, 산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논리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논리는 인생의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영적 성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논리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믿음이 논리보다 더 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마틴 루터 킹의 글을 읽었습니다.

흑인 인권 운동을 하다 보니까, 너무 분노가 생기고,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감정대로 반응을 하니까, 뜻을 펴기도 전에 자기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사랑을 가지고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미움은, 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I have decided to stick with love. Hate is too heavy a burden to bear.

 

그렇게 다짐하고 사니까,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인권 운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인생을 불신과 의문을 가지고 산다면 너무 짐이 무겁게 됩니다.

    때로 생의 의문이 생길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밀어붙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살아갈 용기가 생길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증해 주시고, 선한 열매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항상 건전한 믿음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행복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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