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를 통한 3대 역사 (미가 5장 1-9절) < 메시야의 정체성 >
미가는 예루살렘 군대가 이방인의 군대에 의해 에워싸이고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막대기로 뺨을 맞는 수치를 묘사한 후 바로 이어서 반전의 역사를 이룰 메시야의 등장을 예언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3가지 정보를 줍니다.
첫째,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에브라다는 ‘떡집’의 뜻을 가진 베들레헴의 옛 지명입니다. 옛 지명을 첨가한 것은 스불론의 베들레헴(수 19:15)과 다른 장소임을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야는 유다 지파의 작은 족속 거주지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메시야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의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다릅니까?
예수님의 초라한 탄생은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 비범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 대해 너무 쉽게 기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통해 예상치 못한 일을 이루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는 일은 작은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둘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됩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최종 승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비극적인 역사도 동반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자 헤롯왕은 위협을 느끼고 메시야의 탄생지를 알아오게 했습니다. 그때 어용 성경학자들이 본문 2절을 통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주자 잔인한 명령을 내려 베들레헴 경내 안에 있는 2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은 이미 이집트로 피신한 후였지만 결국 수많은 천사 같은 아기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 비극이 밑거름이 되어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승리의 역사나 인물의 역사는 그 시작이 초라하거나 안 좋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결국 승리합니다. 메시야의 시작은 초라했지만 마지막은 창대했습니다. 성도도 시작은 초라하지만 마지막은 창대해집니다. 믿음은 얼마든지 흙수저를 금수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셋째, 메시야는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메시야의 근본이 상고 및 영원에 있다는 말씀은 메시야가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구원과 능력의 최대 근거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야 잉태 소식을 듣고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했기에 위대한 여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자기를 드리면 누구든지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고 초라한 쪽박인생도 찬란한 대박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마리아처럼 위험과 시험 중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큰 죄인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그때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그런 역사가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 메시야를 통한 3대 역사 >
메시야의 탄생과 관련된 구약 예언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예언인 본문 2절 말씀은 결론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메시야는 초라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영적인 의미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야를 통해 어떤 역사가 생깁니까?
1. 구원의 역사
메시야가 구원의 역사가 이뤄집니다(3절). 더 나아가 성도는 구원을 통해 천국에 가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 사실을 다 알지만 영생과 천국의 구체적인 실체는 거의 모릅니다. 그래도 그 실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위대한 존재지만 지금까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지구 안에서 한정된 존재로 매여 있습니다. 부활한 영광체도 지구에 매인 존재로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지구에 매인 존재에서 해방되어 우주로 향하는 역사도 포함될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꿈입니까?
성경 및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천국의 삶’과 관련된 신학적인 2대 진리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천국은 우주 안에 어떤 장소에 그 실체가 분명히 있다.”는 진리와 “구원받은 성도는 궁극적으로 유령 상태로 지내지 않고 몸으로 부활한 영광체로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인정한다면 구원의 역사가 지구에 매인 존재에서 해방되는 역사도 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과 천국을 생각하면서 미래 천국생활의 터전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우주도 꿈꿔야 합니다.
우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합니다. 사람이 우주 저편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광대한 우주를 있게 하셨다면 우주 저편에도 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두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과학발전을 통해 우주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결코 교만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유의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사람이 과학을 계속 발전시켜서 병을 하나씩 정복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지금 과학으로는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항성조차 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항성 간의 여행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빛보다 빠른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할 때 빛보다 훨씬 빠른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빛보다 빠르십니다. 부활한 영광체도 빛보다 빠를 것입니다. 천국의 삶은 부활한 영광체로서 우주를 만끽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광대한 우주는 공간 낭비가 됩니다. 만약 그런 우주의 공간 낭비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는 모순되는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꿈과 시각은 이 땅 혹은 지구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내일의 찬란한 꿈과 우주적인 광대한 시야를 가지고 지구상의 작은 땅 하나 차지하겠다고 너무 아등바등 싸우지 말고 너무 소유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살되 종말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도에게 종말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메시야를 통해 이뤄진 구원과 해방의 역사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축복을 내포합니다.
2. 평화의 역사
메시야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평화롭게 다스릴 것이고 그 평화가 확산되어 세상 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4절). 본문 5절절에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란 표현은 이단들의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이단들은 이런 표현을 보면 명단을 열거하며 신령한 척 행세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히브리인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평강의 왕 메시야가 소수의 인물들을 일으켜 앗수르를 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땅과 니므롯(바벨론) 땅을 황폐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6절).
예수님 당시는 팩스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였습니다. 그 평화는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예속을 통한 거짓 평화였습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영혼의 담이 무너지고 남을 위한 여백의 삶이 생깁니다. 사람에게 나눔이 없는 것은 시간과 물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곳을 보면 화려한 도시에는 담이 높지만 초라한 마을에는 담이 낮습니다. 담장의 높이는 불안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요즘은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점차 고급 아파트나 중요한 건물에는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두께 1미터, 높이 8미터의 거대한 시멘트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런 각종 분리의 장벽들을 허무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을 깨뜨리심으로 벽을 깨뜨리심으로 소통의 통로가 되셨고 상대의 아름다움과 장점과 보는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공기 중의 영양소를 땅에 녹아지게 해서 땅을 기름지고 부드럽게 만드는 이슬처럼 예수님은 영혼을 기름지고 부드럽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는 님’입니다. 세상은 나누지만 예수님은 하나 되게 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는 초석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3. 승리의 역사
본문 7절에서 ‘야곱의 남은 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이나 풀 위에 내리는 단비처럼 사람 혹은 인생을 기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짐승 중의 사자’나 ‘양떼들 중의 젊은 사자’처럼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한 존재가 되어 모든 대적들을 물리칠 것입니다(8절). 메시야는 ‘사랑의 목자’임과 동시에 ‘공의의 사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을 보면 메시야를 ‘유다 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결국 메시야는 대적을 물리치고 최후 승리를 주십니다(9절).
리더는 목자도 되고 동시에 사자도 되어야 합니다. 리더에게 목자의 모습이 없이 사자의 모습만 있다면 공동체가 전진하는 것 같지만 후퇴합니다. 반대로 리더에게 사자의 모습이 없이 목자의 모습만 있다면 공동체가 질서를 잃고 혼돈에 빠집니다. 리더는 유연함과 단호함을 겸비하고 사랑과 공의를 겸비하고 은혜와 심판을 겸비해야 합니다. 리더에게 공의의 심판을 행하는 사자의 모습이 나타날 때 무조건 “왜 저 리더가 저렇게 사랑도 없어?”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오해 및 자기 사랑의 과시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게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공의대로 무섭게 심판하신다고 사랑이 없는 분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된 것을 아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잠시 문제와 패배도 허락하시고 때로는 외면도 하십니까?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인본적인 무신론자들은 지진이나 홍수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내가 이런 잔인한 하나님은 어떻게 믿는가?”라고 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처럼 성도가 고난과 문제와 외면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 더 이상 당신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라는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선언이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오해입니까? 고난과 문제와 외면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감사를 잃지 않고 제 자리를 고수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의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 최종 승리를 확신하십시오 >
성탄의 의미를 알면 고난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고 자신의 죄와 허물에 비해 더 큰 고난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탄절을 주신 것은 자신이 포기한 자신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는 무한합니다. 잠깐 고난과 문제와 외면의 순간을 허락해도 하나님은 최후 승리를 예비하시고 여전히 기대하시고 기다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고쳐서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는 변함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손길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람의 고집은 하나님의 끈기를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아직도 우리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죄와 허물이 있어도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고 최종 승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의 밤이 깊어도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은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약점과 미숙함은 강점과 성숙함이 되고 상처는 진주가 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최후 승리의 증표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패배가 아닌 승리이고 절망이 아닌 희망입니다. 또한 불안이 아닌 평안이고 변질이 아닌 변화이고 성취가 아닌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역전의 역사를 이뤄내실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작은 족속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사실은 그 진리를 잘 말해줍니다.
어느 날, 한 성도가 몇 달째 가물어 벼들이 죽어가는 논에 밤새 양수기로 논물을 댔습니다. 다음날 보니까 아랫집 논으로 물고가 터져서 물이 다 흘러 내려갔습니다. 화가 났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그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자 마침내 그가 목사님을 찾아가 그 상황을 다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세 번 물을 빼앗겼으니 한 번 더 빼앗긴 셈 치고 이번에는 아예 그 논에도 물을 대 주세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리면서 분노가 다 풀렸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기 논에 물을 댈 때 아래 논에도 물을 대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래의 논 주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아무개 씨! 교회 다니면 다 그렇게 됩니까?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교회에 가보고 싶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 고약한 사람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늘 예수님을 꼭 붙잡고 최후 승리의 역사를 바라보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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