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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1-4 /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by 【고동엽】 2022. 12. 17.
■2022년 12월13일(화)■
 
(누가복음 11장)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묵상/눅 11:1-4)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묻자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다. 이 기도가 오늘날 '주기도문'으로 불리며 모든 성도가 의무적으로 외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기도를 가르치심은 앵무새처럼 외워서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하라는 의미다. 정 기도가 안 되면 주기도문을 그냥 외우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도할 때 그 의미를 새기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주문처럼 외우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 아버지여
 
(2)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지만 사실 가장 안 지켜지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금 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있지 않다. 만일 정말로 믿고 있다면 그렇게 중언부언하고 장황하며 심지어 자기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쳐다보시고 귀를 기울이심을 인식하는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다시 시작하라. 그 믿음이 생길 때까지 '아버지여'라고 불러라.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을 보다 분명히 의식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정말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도하는 것도 좋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요 17:1)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눈을 감고 하늘을 상상하고 우러러본다. 그러면 실제로 하늘을 보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다.
 
'아버지여'
이 관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아직 기도를 시작하지 말라. 누가 내 기도를 듣는지에 대한 믿음 없이 기도를 시작하면 독백으로 전락한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해 경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의 기도가 오로지 자기 필요를 채워달라는 요구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는 하나님께서 이해하시고 들어주시지만,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선행해야 할 것이 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예배자의 고백이고 극진한 존경의 표시다. 우리 기도 속에 이런 경배와 찬양이 어떤 요구보다도 먼저 되어야 한다.
 
주일날에 모여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내가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 우리는 바로 예배자가 되어서 그 앞에 있는 것이다.
 
예배는 성도의 기쁨이다. 오, 그 앞에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며 가장 복된 행위가 예배다. 전도, 봉사, 헌금 등 각종 행위보다도 앞서는 것이 예배다. 감옥 독방에 가두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성도가 드리는 예배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
 
◆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여기에 언급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다.
나라는 '통치'개념과 동일시된다.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 속에는 현재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며,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기도를 하면서 '선교'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고 위선이다. 이 기도가 진실하여지려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꼭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만이 전도가 아니다. 인터넷상에서도 얼마든지 이름 없는 전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오늘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쌀이 없어서 굶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부분 이 기도가 별로 와닿지 않으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는 영적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해도 멋있다.
 
그러나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기도다. 사실 우리에게는 단순히 양식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이 많다.
 
특히 일 년 치 양식이 아닌 일용할 양식을 말씀하심은 매우 의미가 깊다.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생존을 위한' 또는 '필요한'이란 의미를 가진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당장 굶게 된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필요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심은 '욕심'을 구하지 말고 '필요'를 구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내가 구하는 것이 욕심인지, 필요인지를 구분하자. 욕심을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필요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우신다.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고, 용기가 되는지!
 
 
◆ 죄를 사해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미처 알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허물이 허다하다. 자백해야 용서받는다고 배웠을 때 나는 내 죄를 파악하기 위해서 몹시 애를 썼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얼마나 편협하게 자백했는지! 그것은 복음적인 견해가 아니다. 그런 식의 삶은 언뜻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심약하고 종교적인 삶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사해 주시옵고'라고 간청함은 지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오직 죄 사함의 권세와 은총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기도다. 인간의 삶 자체가 허물의 연속인데, 어떻게 그것을 다 파악해서 일일이 자백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받고 살고 있다.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빌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용서받은 자다(롬 5:1).
 
주님께서 우리에게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를 기도하게 하심은 우리가 매일 이런 용서의 은총 가운데 사는 자임을 인식할 것을 교훈하심이다. 그리고 이런 용서를 받는 자로서 마땅히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를 예배합니다. 찬양합니다.
아버지의 통치를 받아들입니다.
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날마다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매 순간 나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매일 몰려오는 유혹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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