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10일(토)■
(누가복음 10장)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묵상/눅 10:25-37)
◆ 영생의 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율법 교사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되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짚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닌가? 율법을 지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후에 사도 바울에게 간수가 똑같이 질문했다.
"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까?"
그러자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0-31)
예수님과 바울은 사상이 달랐을까?
아니다. 율법을 완벽히 지켜도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다. 애초에 율법 교사는 그것을 전제로 질문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만일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영생을 못 얻는다면 율법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완전하며 결함이 없다(시 19:7).
하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따라서 율법도 영생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고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까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인간이 이 시도에 성공한 예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가장 의롭다는 욥조차도 자만심이란 늪에 빠져있음을 보여주었다. 구약성경 자체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임이 드러났다(롬 3:19).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율법 외'라는 의미는 완벽한 의인만이 들어가는 학교에 지극히 죄인인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입학 전형이 생겼다는 의미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아멘, 아멘.
주님, 감사, 또 감사합니다.
◆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율법 교사는 주님께 칭찬받자, 즉시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유년주일학교 시절에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어떤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멋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이웃이라면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들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면 그것처럼 무지막지한 율법이 없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서 부터 아프리카 난민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그들은 내 이웃이니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애초에 실천할 생각도 없다면 내 이웃은 '천하 만민'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 물어본 율법사는 막상 실천하려니 엄두가 안나서 물은 것이리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다. 우리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37)이라고 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한 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이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인데, 제사장, 레위인들은 종교적으로 '선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다. 사회적 신분도 꽤 높은 사람들이라 이웃이 되었으면 좋을 사람들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디 이웃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나를 도왔다. 누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일까?
주님께서는 신분의 차별없이 이렇게 자비를 베푼 자가 진짜 '내 이웃'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면 그들이 베푼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필요 이상으로 감사하며 은혜를 갚겠다고 호들갑이다.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차별하면 안 된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해준 사람, 설사 그 도움이 지극히 사소한 것일지라도 당시에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물 한 그릇 내민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다(막 9:41). 우리는 그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설사 그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아졌더라도 우리는 그가 베푼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내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 나를 양육한 사람,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모두 내 이웃이다.
오, 자비를 베푼 자가 내 이웃임을 왜 모르는가?
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닥치고 사랑해야 옳다.
자비를 베푼 자가 자기에게 한번 잘못했다고 그 모든 은혜를 잊고 원수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다.
반면에 '강도 만난 자'는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 무조건 이웃이기 때문에 닥치고 내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적 강요가 아니라, 그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선한 결단이 요구된다.
강도 만난 자,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는 자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에게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을 이웃으로 간주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 여기에 우리 주님의 지혜가 있다.
누가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물으셨다. 적어도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내게 자비를 베푼 자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게 자비를 베푼 자의 은혜를 잊지말고,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어려운 자는 이웃이니까 닥치고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라, 그에게 이웃으로 다가갈지 말지에 대해 선택의 여지를 주셨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는 말씀은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기꺼이 고통 당하는 자의 이웃으로 다가갈 것을 교훈하심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물 한그릇 준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주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은혜도 잊지 말고 잘 기억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자에게 이웃으로 다가가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누가복음 10장)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묵상/눅 10:25-37)
◆ 영생의 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율법 교사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되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짚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닌가? 율법을 지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후에 사도 바울에게 간수가 똑같이 질문했다.
"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까?"
그러자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0-31)
예수님과 바울은 사상이 달랐을까?
아니다. 율법을 완벽히 지켜도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다. 애초에 율법 교사는 그것을 전제로 질문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만일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영생을 못 얻는다면 율법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완전하며 결함이 없다(시 19:7).
하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따라서 율법도 영생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고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까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인간이 이 시도에 성공한 예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가장 의롭다는 욥조차도 자만심이란 늪에 빠져있음을 보여주었다. 구약성경 자체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임이 드러났다(롬 3:19).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율법 외'라는 의미는 완벽한 의인만이 들어가는 학교에 지극히 죄인인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입학 전형이 생겼다는 의미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아멘, 아멘.
주님, 감사, 또 감사합니다.
◆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율법 교사는 주님께 칭찬받자, 즉시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유년주일학교 시절에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어떤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멋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이웃이라면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들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면 그것처럼 무지막지한 율법이 없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서 부터 아프리카 난민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그들은 내 이웃이니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애초에 실천할 생각도 없다면 내 이웃은 '천하 만민'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 물어본 율법사는 막상 실천하려니 엄두가 안나서 물은 것이리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다. 우리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37)이라고 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조금 더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한 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이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인데, 제사장, 레위인들은 종교적으로 '선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다. 사회적 신분도 꽤 높은 사람들이라 이웃이 되었으면 좋을 사람들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디 이웃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나를 도왔다. 누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일까?
주님께서는 신분의 차별없이 이렇게 자비를 베푼 자가 진짜 '내 이웃'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면 그들이 베푼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필요 이상으로 감사하며 은혜를 갚겠다고 호들갑이다.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차별하면 안 된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해준 사람, 설사 그 도움이 지극히 사소한 것일지라도 당시에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물 한 그릇 내민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다(막 9:41). 우리는 그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설사 그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아졌더라도 우리는 그가 베푼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내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 나를 양육한 사람,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모두 내 이웃이다.
오, 자비를 베푼 자가 내 이웃임을 왜 모르는가?
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닥치고 사랑해야 옳다.
자비를 베푼 자가 자기에게 한번 잘못했다고 그 모든 은혜를 잊고 원수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다.
반면에 '강도 만난 자'는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 무조건 이웃이기 때문에 닥치고 내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적 강요가 아니라, 그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선한 결단이 요구된다.
강도 만난 자,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는 자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에게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을 이웃으로 간주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 여기에 우리 주님의 지혜가 있다.
누가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인가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물으셨다. 적어도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내게 자비를 베푼 자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게 자비를 베푼 자의 은혜를 잊지말고,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어려운 자는 이웃이니까 닥치고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라, 그에게 이웃으로 다가갈지 말지에 대해 선택의 여지를 주셨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는 말씀은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기꺼이 고통 당하는 자의 이웃으로 다가갈 것을 교훈하심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물 한그릇 준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주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은혜도 잊지 말고 잘 기억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자에게 이웃으로 다가가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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