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준호 선교사님을 처음 안 것은 1989년 선교사님이 미국 뉴욕 ‘브롱스 성도교회’에 계실 때입니다. 당시 선교사님은 뜨거운 선교 열정을 가지고 첫 아들 이름도 ‘임선교’라고 지었습니다. 결국 그 열정을 참지 못하고 1990년, 잘 성장시킨 교회를 떠나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소속 한인 2호 선교사로 필리핀으로 선교하러 갔습니다. 필리핀에서 5년 동안 선교사님은 CMA 소속 선교사 1200명 중 발군의 사역으로 신학교 및 많은 교회를 개척해 미국인 CMA 선교사들이 40년 동안 이룬 일 이상의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필리핀 선교캠프가 안정되자 선교사님은 당시 문이 열리기 시작한 몽골로 눈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만류하자 선교사님은 “이곳은 안정되었기 때문에 제가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무일푼으로 주저 없이 몽골로 떠났습니다. 1997년 3월 10일, 황량한 몽골 벌판에 도착하던 날, 엄청난 폭설이 선교사님 가족 5명을 맞이했습니다. 그 뒤 선교사님은 도착 첫날의 폭설처럼 은혜를 받아 7년 만에 선교사 가족들만 33명이 되는 거대한 선교 팀을 만들었고, 몽골 현지 교회도 6개를 개척했고, 성경학교도 건축해서 수많은 몽골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제 안정된 선교 캠프에서 몽골 선교의 총책임자로 존경받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선교사님은 중국 내의 내몽골을 방문해 그들의 비참한 형편을 보고 매일 눈물로 지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내몽골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 나이가 몇인데 개척선교를 하려느냐?”고 만류했지만 선교사님은 말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편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불쌍한 내몽골 영혼들이 저를 부르기에 떠나는 것입니다.” 결국 6개 교회의 감독 자리와 성경학교 학장 자리를 미련 없이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종교탄압이 심한 내몽골로 들어가려고 ‘우물 파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도심의 큰 교회 목사가 농촌목회를 위해 무일푼으로 떠나는 격입니다. 그 모습이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선교사님은 ‘달리 생각하는 사람(Andersdenkender)’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런 분이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한 세상입니다. 선교는 이기심이라는 나바론의 요새에 사랑의 하늘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선교하면 큰 가슴을 가지게 됩니다. 서울 마포의 양화진에는 한국에서 순교하신 큰 가슴을 가진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한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든 생명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임 선교사님도 내몽골 사역에 헌신하며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기도의 손길로 저희들의 붙들어주신다면 저희는 더 손을 펴 불쌍한 내몽골 영혼을 사랑하는데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키스(kiss)와 허그(hug)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이도 줄 수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주게 되어 있습니다. 최고 사랑은 ‘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주는 것은 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선사합니다. 주는 삶이 곧 받는 삶이고, 이루는 삶이고, 채우는 삶입니다.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세실리아(Cecilia)가 부른 기도(The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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