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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로마서 1:17).

by 【고동엽】 2026. 1. 25.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로마서 1:17).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이 무엇인지 그 심장부를 단 한 문장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한 절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문을 열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관통해 성도 한 사람의 내면을 새롭게 여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제목,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자는 격려가 아니라, 복음이 실제로 사람을 어떻게 살리고, 어떻게 자라게 하고, 어떻게 끝까지 붙들어 완성하는지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고통 가운데 하나는, ‘나는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흔들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떤 날은 기도도 술술 나오고, 말씀도 달고, 찬송이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데, 또 어떤 날은 같은 입술이 무겁고, 마음은 건조하고, 죄의 유혹은 너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다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나? 왜 내 믿음은 이 모양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장 17절은 그런 우리의 혼란을 향해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게 말합니다. 복음은 ‘내 믿음의 크기’로 나를 구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나를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그 의는 믿음을 통해, 다시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니 믿음의 성장이라는 말은, 내 힘으로 점점 강해지는 정신력의 상승 곡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나를 붙드시는 방식이 점점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실제가 되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복음은 단지 ‘좋은 소식’이라는 단어 뜻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의’라고 하면 도덕적 의로움을 떠올립니다. 착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양심을 지키는 어떤 성품이나 태도를 말입니다. 물론 성도는 거룩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한 윤리적 품성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셔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며, 더 나아가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서게 되는 법정적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너도 노력하면 의로워질 수 있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의를 이루셨고, 그 의를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신다”라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빛나는 중심이 드러납니다. 의는 우리 안에서 길러 올리는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의를 제출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얼룩이요, 우리의 마음은 굽었고, 우리의 동기는 혼합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좋은 일을 할 때에도, 그 안에는 ‘인정받고 싶음’과 ‘자기 의’의 그림자가 끼어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내미는 손에는, 사실상 빈손만 들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빈손을 부끄러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네 손을 펴라. 그리고 받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순종으로 이루신 의, 십자가의 피로 성취하신 의, 부활로 확증하신 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문은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입니다. 직역하면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고 이해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전적으로 믿음으로만”이라는 강조로 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으로”라는 방향성을 읽어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믿음’이라는 한 길을 두 번 겹쳐 말함으로써, 복음이 작동하는 방식 전체를 믿음으로 묶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시작이 믿음이고, 과정이 믿음이고, 열매가 믿음이며, 끝도 믿음입니다. 의는 율법의 공로로 시작되지 않고, 의는 인간의 결심으로 굴러가지 않으며, 의는 인간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나의 심리적 확신”이기 전에, “그리스도를 붙드는 도구”입니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손입니다. 믿음이 크면 구원이 커지고, 믿음이 작으면 구원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손이 그리스도를 붙들어 그분의 충만을 받는 통로입니다. 손이 떨려도 붙들면 살고, 손이 약해도 매달리면 삽니다. 왜냐하면 붙드는 대상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로마서 1장 17절이 말하는 믿음은 정지된 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관계이며, 자라나는 호흡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은, 단지 정보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내 존재의 중심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 우리는 주로 ‘죄 사함’의 기쁨을 붙듭니다. 죄가 씻겼다는 놀라움,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신다는 위로가 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은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죄 사함을 넘어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배우고, 의롭다 하심을 넘어 ‘양자 됨’의 사랑을 배우며, 양자 됨을 넘어 ‘성화’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신실하심을 배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도는 ‘영화’의 소망, 곧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워질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견딥니다. 이 모든 여정이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연결된 생명의 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랍니다. 자란다는 것은 ‘내가 더 대단해진다’가 아니라, ‘내가 더 그리스도께 의존하게 된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고, 신자의 영광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말할 때, 우리는 자주 ‘강해지는 나’를 꿈꿉니다. 흔들리지 않는 멘탈, 유혹에 지지 않는 의지,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상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성장은, 자신감의 팽창이 아니라 의존의 깊어짐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믿음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믿음을 지키고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도해서 버티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길입니다. 내 주관적 체감으로는 위로 올라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더 낮아져서 은혜의 깊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이 곧 높아짐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낮은 곳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약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이는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은 혼란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폭력과 불의가 성 안에 가득했고, 선지자는 하나님께 “왜 잠잠하십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심판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조차 하박국에게는 또 다른 질문을 낳았습니다. “더 악한 자를 들어 심판하신다니, 그럼 의인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주신 답이 이것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상황이 납득되지 않을 때, 시대가 어두울 때, 현실이 흔들릴 때, 의인은 계산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내가 이해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삽니다. 믿음은 상황을 지배하는 열쇠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사는 생명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박국을 끌어오는 것은, 복음이 단지 개인의 내면 위로가 아니라, 역사의 폭풍 속에서도 성도를 살리는 방식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시대를 이기는 힘이며, 그 힘은 믿음으로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어떻게 성장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성장은 ‘원인’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즉 우리는 성장함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성장합니다. 의인이 되는 근거는 그리스도이며, 의인이 되는 통로는 믿음이며, 의인이 되는 선언은 하나님의 법정적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성장은 그 판결을 보완하는 추가 서류가 아닙니다. 성장은 그 판결이 삶 속에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열매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신앙은 즉시 불안과 교만 사이를 오갑니다. 잘 될 때는 교만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무너질 때는 절망합니다. “내가 이 정도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겠지.” 그러나 복음의 순서를 붙들면, 잘 될 때도 겸손합니다. “이 열매도 은혜로 주셨군요.” 무너질 때도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다시 일으키시겠지.” 이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이 성장할수록 은혜의 순서가 더 분명해져서, 마음이 더 자유로워집니다.

믿음의 성장은 또한 복음의 중심이 ‘나’에서 ‘그리스도’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신앙을 내 문제 해결의 도구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건강, 평안, 성공, 관계의 회복,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많은 경우 그런 필요들을 만지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을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삶의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이시며, 복음은 내 행복을 위한 부속물이 아니라 내 존재를 다시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이 전환이 일어날 때, 성도는 비로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무게를 알게 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성장은 기독교의 성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무엇으로 의롭게 되는지,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지,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의 가장 분명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내 의를 끝장내고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내 자랑을 꺾고 하나님의 자랑을 세우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내 기대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세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하나님은 잔인하게 우리를 몰아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 안으로 더 깊이 들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오면 즉시 “왜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성경에도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할수록 질문의 결이 바뀝니다. “왜입니까”에서 “주님, 이 자리에서 제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로 바뀝니다. “이걸 없애주세요”에서 “이것 속에서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해주세요”로 바뀝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골짜기를 건너야 했습니다. 아래는 안개가 자욱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바람은 거칠게 불었습니다. 그는 다리 앞에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때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이 다리는 튼튼합니다. 건너가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다리의 흔들림만 바라보며 두려워했습니다. 안내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다리가 아니라 당신의 시선입니다. 다리를 분석하느라 한 발도 못 떼고 있군요.” 결국 그 사람은 떨리는 다리로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발이 흔들렸습니다.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몇 걸음 더 내딛자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 다리가 튼튼해서 건너는 것이 아니구나. 다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건너는 것이구나.’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다리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다리로도 무너지지 않는 그리스도를 딛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내 다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리이신 그리스도를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믿음에서 믿음으로” 건너온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여정 전체가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을 말한다고 해서,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커지는 감정’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분명히 선물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공동체를 통해 자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관계로 부르셨고, 관계는 양육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는 호흡입니다.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를 붙든다”라고 찍어 주시는 인치심입니다. 공동체는 서로의 믿음을 끌어올리는 인간적 동아리가 아니라, 한 몸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내가 혼자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은혜가 흘러와 내 안을 적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지 과거의 큰 죄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며, 자기 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회개는 더 섬세해집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죄를 회개합니다. 거짓말, 분노, 음란, 탐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성장할수록 마음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실제로는 자기 안전을 더 사랑했던 마음, 하나님께 순종한다면서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거룩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자기 우월감을 즐겼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더 성장하면,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은혜를 ‘익숙함’으로 바꿔버린 마음을 회개합니다. 예배가 감동이 없다고 불평했던 마음, 말씀을 가볍게 여겼던 마음, 십자가를 지식으로만 다뤘던 마음을 회개합니다. 이 회개의 깊어짐이 바로 믿음의 깊어짐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절망이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오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깊어질수록 복음은 더 달아지고, 은혜는 더 크게 보이고, 그리스도는 더 귀해집니다. 그래서 회개는 성장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성장을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은 또한, 확신의 성숙을 포함합니다. 확신은 단지 감정의 고조가 아닙니다. 참된 확신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뿌리내립니다. 우리는 때때로 “오늘은 마음이 뜨거우니 구원받은 것 같고, 내일은 마음이 차가우니 버림받은 것 같다”는 식으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심장 박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내 기분을 근거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내 기분을 다스리는 습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음성은 자주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내 감정이 좋을 때만 참이 아니라, 내 감정이 바닥일 때도 참입니다. 성도는 이 진리를 배웁니다. 그래서 믿음은 점점 더 ‘안정된 기쁨’으로 자랍니다. 웃음이 많아서가 아니라, 흔들려도 붙드는 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의 성장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은 결코 차가운 교리가 아닙니다. 참 교리는 항상 경배를 낳고, 경배는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순종을 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전가로 받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으면, 우리는 더 이상 남을 짓밟아 나를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셨는데, 사람의 인정이 왜 그렇게 절대적이겠습니까. 이미 그리스도가 내 수치를 덮으셨는데, 왜 남의 수치를 들춰 내 의를 세우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으셨는데, 왜 세상의 자리와 비교로 내 가치를 증명하려 하겠습니까. 믿음이 성장할수록, 성도는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정직해지며 더 담대해집니다. 부드러움은 은혜를 경험한 자의 표정입니다. 정직함은 자기 의를 내려놓은 자의 자유입니다. 담대함은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의 걸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공로가 아닙니다. 사랑은 열매입니다. 열매는 가지가 자랑할 것이 아니라, 뿌리의 생명을 증거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나는 왜 이렇게 더디게 자라는가”라는 탄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직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급하게 자라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급한 성장은 종종 교만을 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빨리 세우시고, 어떤 성도를 오래 다듬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장은 내 의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는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싸움의 바닥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꾸시기 위해 나를 싸움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노력’과 ‘은혜’를 갈라놓지 않습니다. 노력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고, 은혜는 노력의 근거입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율법주의로 가거나 방종으로 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그 사이의 왕도(王道),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며,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견디는” 길로 인도합니다.

이제 믿음의 성장이라는 주제를 우리의 삶 깊숙한 자리로 가져가 봅시다. 믿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월요일 아침에 자랍니다. 일터에서 억울함을 만날 때, 가족 안에서 오해를 겪을 때, 몸이 약해지고 병원이 가까워질 때, 계획이 무너질 때, 사람의 말이 마음을 찌를 때, 그 자리에서 믿음이 시험받고, 그 자리에서 믿음이 연단되며, 그 자리에서 믿음이 더 순수해집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말씀을 주시지만, 삶을 통해 말씀을 새깁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은 현실을 회피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더 실제로 의지하는 성숙입니다. 고난이 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겪나”라고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이 자리에서 제가 어떤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바로 성장입니다. 죄의 유혹이 강할 때 “나는 왜 이렇게 약한가”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제 의를 세우려는 마음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가 저를 붙들게 하소서”라고 나아가는 것이 성장입니다. 믿음은 패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자리에서도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말은 “살리라”로 끝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은 단지 ‘옳은 교리를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살아낸다는 것은 성도의 삶 전체가 복음의 빛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돈을 대하는 방식, 관계를 맺는 방식, 분노를 다루는 방식, 시간을 쓰는 방식, 고통을 견디는 방식,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믿음은 삶의 모든 결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 삶의 변화는 자기개선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흐르고, 그 생명이 우리의 선택을 바꾸며, 그 선택의 누적이 성화를 이루고, 그 성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더 나은 내가 되자”가 아니라, “더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자”입니다. 더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할수록, 우리는 더 깊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삶은 결국 하나님께로 향하는 찬송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완벽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손은 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붙들린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걸음은 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성장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긴장보다, 그리스도께 더 깊이 기대는 안식에서 자랍니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기도는 작은 믿음의 탄식이 아니라, 가장 복음적인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 위에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에서 믿음으로”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케 하고,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여러분의 마지막 숨까지 붙들어,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주님을 뵙는 그 날까지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요약
로마서 1:17은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의 의”이며 그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선포합니다. 의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며,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붙드는 도구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성장은 자기강화가 아니라 그리스도 의존의 깊어짐이며, 하박국의 말씀처럼 혼란한 현실에서도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내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성장은 원인이 아니라 열매이며, 은혜의 방편(말씀·기도·성례·공동체) 가운데 성령께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믿음 성장을 위한 중심 자리로서, 고난과 회개 속에서 복음은 더 깊이 실제가 됩니다.

묵상 포인트

  1. 나는 ‘내 믿음의 크기’로 안심하려 합니까, ‘그리스도의 의’로 안식하려 합니까.
  2. 내 신앙의 흔들림은 ‘구원의 부재’입니까, ‘의존의 훈련’입니까.
  3. 고난 앞에서 나는 “왜”만 묻습니까,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묻습니까.
  4. 회개가 나를 짓누르는가,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문인가를 점검하십시오.
  5. 은혜의 방편을 ‘의무’로만 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로 합니까.

강해
바울은 로마서 1:16에서 복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밝히고, 17절에서 그 능력의 내용이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구원의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를 근거로 한 법정적 선언입니다.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표현은 복음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을 모두 믿음의 길로 묶으며, 의가 나타나는 통로가 전적으로 믿음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하박국 2:4 인용은, 의인이 현실의 불안정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성장은 ‘의롭다 하심’을 보완하는 공로 쌓기가 아니라, 의롭다 하심의 은혜가 삶 전체에 확장되는 성화의 열매입니다.

주석
“복음에는”은 복음 안에, 복음의 영역에서라는 의미로 복음이 의의 계시가 되는 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윤리적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루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구속사적·법정적 의미가 중심입니다. “나타나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그리스도 사건(성육신·십자가·부활) 안에서 의가 공개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내포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는 믿음의 기원과 종착을 모두 믿음으로 연결하는 수사로, 율법적 공로를 배제하고 복음적 수납의 길을 강조합니다. “오직 의인은… 살리라”는 의인의 삶이 믿음으로 규정되며, 종말론적 생명(현재의 삶과 최종적 구원)을 포함합니다.

원어 주석(헬라어-신약)

  •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디카이오쉬네 데우,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 속한 의’로서 하나님의 성품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를 이루고 의롭다 하시는 행위 및 그 결과로서 신자에게 전가되는 의를 포괄합니다(문맥상 복음-구원과 연결).
  • “ἀποκαλύπτεται”(아포칼뤼프테타이, 나타나다/계시되다): ‘드러내다’의 현재 수동/중간형으로, 복음 선포 가운데 계속해서 의가 계시되는 역동성을 암시합니다.
  •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믿음에서 믿음으로): “~로부터 ~에로” 구조로, 전 과정이 믿음의 범주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믿음으로).
  •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의 생명이 믿음으로 규정됨을 선언하며, ‘살다’는 현재적 삶과 종말론적 생명을 함께 함축합니다.

원어 주석(히브리어-구약: 하박국 2:4 핵심)

  • “צַדִּיק”(짜딕, 의인): 하나님 앞에서 옳다 여김을 받는 자,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 “אֱמוּנָה”(에무나, 믿음/신실함): 단지 심리적 확신이 아니라 ‘붙듦, 신뢰, 지속, 성실’의 뉘앙스를 지니며,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뢰의 지속을 포함합니다.
  • “יִחְיֶה”(이흐예, 살 것이다): 단순 생존을 넘어, 하나님이 보존하시는 생명과 궁극적 구원을 내포합니다.

금언

  •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손이며, 손의 가치는 붙드는 그리스도의 가치에서 온다.
  • 성장은 강해지는 내가 아니라, 깊어지는 의존이다.
  • 흔들림이 끝이 아니라, 붙드심이 시작이다.
  • 회개는 절망의 증거가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오는 문이다.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해의 승리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의 항복이다.

신학적 정리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며, 믿음은 그 의를 받는 도구입니다(오직 믿음). 성화는 칭의를 보완하는 공로가 아니라 칭의의 열매로서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방편을 통해 진행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복음의 시작·과정·완성이 믿음으로 연결됨을 드러내어 율법주의(행위로 의를 세우려 함)와 반율법주의(순종을 무가치하게 여김)를 동시에 배격합니다. 의인의 삶은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현재를 견디는 믿음의 삶으로 규정됩니다.

주제별 정리

  • 복음: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의 능력.
  • 믿음: 그리스도를 붙드는 도구, 관계적 신뢰의 지속.
  • 성장: 은혜의 방편 속에서 의존이 깊어지고 순종이 열매 맺는 과정.
  • 고난: 십자가의 능력 안으로 더 깊이 이끄는 연단.
  • 회개: 자기 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돌아서는 방향 전환.

목회적 정리
성도의 흔들림은 곧바로 폐기 판정이 아니라, 믿음이 훈련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확신은 감정이 아니라 약속에 뿌리내리며,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로 보증됩니다. 신앙의 더딤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은혜의 방편을 통해 지속적으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성도를 자기 의의 채찍으로 몰아붙이기보다, 복음의 질서(칭의가 뿌리, 성화가 열매)를 반복해 심장에 새기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나는 오늘도 내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나는 흔들리는 날마다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마음을 붙들겠습니다.
나는 회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를 통해 복음으로 더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례와 공동체를 은혜의 길로 붙들며 믿음의 호흡을 회복하겠습니다.
나는 고난의 자리에서 “왜”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묻는 믿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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