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분이 저의 설교에 나온 ‘장애인’이란 표현을 보고 이런 생각을 전해왔습니다. “목사님! 요새 장애인에 대해 ‘장애우’라고 많이 표현하는데, 장애인 사랑을 강조하시는 목사님이라면 표현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의 장애인을 생각하는 소중한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다시 ‘장애인’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친구로 대해주자!”는 의미의 ‘장애우’란 말이 장애인을 2류 인간으로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장애인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애우’란 단어를 쓰는 것은 장애인을 ‘나와 다른 사람’혹은 ‘나의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성 차별이 있다고 해서 “여성의 친구가 되어주자!”는 취지로 여성을 ‘여우’라고 하면 그 표현을 여성들이 좋아할까요? ‘장애우’란 단어를 쓰는 것은 취지는 좋지만 오히려 장애인의 자존감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고 말없이 돕는 것입니다. 어느 날, 프랭크(Frank)라는 신부님이 한 장애인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마침 미사 시간에 담당신부가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프랭크 신부님이 미사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로 미사를 시작했는데 곧 신부님에게 평소에 있던 신경쇠약 증세가 엄습해왔습니다. 그 뒤 미사가 끝날 때까지 신부님은 말을 계속 더듬었습니다. 간신히 미사를 끝냈습니다. 신부님은 수치감에 싸여 재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장애인들이 신부님에게 달려와 신부님을 껴안으며 감격적인 음성으로 생애 최고의 미사를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이 미사가 좋았던 연유를 묻자 장애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당신은 우리와 같아요. 감사해요.(Father! You are like us. Thank you.)” 사람은 하나임을 느낄 때 가장 행복을 느낍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 장애인들이고, 서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1995년 미스 아메리카에 뽑힌 화이트스톤(Whitestone)은 청각장애인이지만 눈치와 감정으로 발레공연을 잘합니다. 어느 날, 발레 공연 후,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청각 장애로 발레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때 그녀가 발랄하게 대답했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최대의 장애인이 아닌가요?” 장애인은 따로 없습니다. 요새는 선천적 장애인보다 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 더 많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의 가능성을 가진 예비 장애인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장애인은 하나이고, 장애인을 돕는 삶은 미래의 나를 돕는 삶입니다. 서로 부족한 존재들이 ‘하나임’을 알고 ‘하나 됨’을 지향할 때, 장애가 장벽이 되지 않는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임’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060620) ⓒ 글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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