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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간증(24)

by 【고동엽】 2022. 12. 7.
[처음 목차 돌아가기]
 
 

1.굿판을 깨뜨린 예수님

교회를 개척할 때이다. 내가 교회를 개척 한 것은 80년대 초인데 그 곳은 지금은 다리를 놓아 차들이 자유롭게 왕래를 하지만 개척하기 얼마 전까지도 마을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험한 산이 두르고 있어서 마을이 육지 안에 있는 섬이었다. 이런 지역이고 보니 자연히 미신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말에 입당예배를 드리고 나니 곧 겨울이 되었다. 이곳은 겨울이면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이 전통이고 마을 할머니들은 굿을 구경하며 점괘를 듣는 것이 긴 겨울을 보내는 유일한 낙이었다.
 교회를 개척하던 그 겨울도 무당이 와 굿을 시작하는데 마침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교우의 큰 집에서 첫 스타트 테이프를 끊게 되었다. 그 날이 수요일이라 예배를 드리려고 막 사택 문을 열고 나서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교우가 "전도사님, 오늘 저녁에 저희 큰 집에서 굿을 하는데 형님이 전도사님을 놀러 오시랍니다"하고 초대했다.

 되는 집안에는 가지 나무에서도 오이가 열린다고 했던가? 그런 일이라면 그렇잖아도 가보아야 하는데 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다니 더욱 잘된 일이었다. 예배 후에 굿하는 집으로 갔다. 방안에서는 족집게 굿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래서 신바람이 나 있었다. 우리가 방안에 들어서자 아랫목에 앉아 계시던 마을 할머니들께서 "아이구 전도사님 오시네"하면서 자리를 내어주고 윗방으로 올라가셨다.

그래서 그 무당 바로 등 뒤에 내가 안고 좌우로 아내를 비롯한 교인들이 빙 둘러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집안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징과 북을 나긋나긋하게 치면서 조용조용히 하던 굿판이었는데 웬일인지 우리가 들어서고 나서는 집안이 떠나갈 듯이 굿을 했다. 속으로 "내가 가짜인가?"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무당이 굿을 하는 자리에는 주일학교 어린이 한 명만 가도 무당이 나뒹굴면서 굿을 못한다는데 이건 우리가 들어올 때보다 더 신나게 굿을 하니 내가 가짜가 아니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생각도 잠시 무당이 점괘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마다 틀리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귀신같이(?) 맞던 점괘가 자꾸만 틀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크고 쎈 귀신을 불러들이느라 있는 힘을 다해서 울렸던 것이란다.

 연신 빗나가는 점괘를 내뱉으면서 징과 북을 얼마를 두드렸던지 땀이 무당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렇게 쌩심(온힘)을 쓰면서 몸부림치는 무당이 안쓰러웠던지 옆에 앉아 계시던 교우가 측은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주여'를 불렀다.

 순간 우리의 정체는 드러났고 신명나던 굿판은 일순간 깨졌다. 우리가 더 이상 앉아 있기가 민망했다. 그래서 잘 마무리하시라는 인사를 정중히 드리고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온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다. "무당 귀신보다 예수 귀신(?)이 더 쎄다"고. 무안함을 톡톡히 당한 무당은 그 날로 줄행랑을 쳤고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 굿을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할렐루야! <포도원교회 최병창 목사님 간증 중에서>
 

 

 
 

2.하나님 은혜로 공장공원에서 사법시험 합격한 김미애씨 인생

김미애 씨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그녀는 고등학교 중퇴, 방직공장 공원, 초밥집 사장까지 수많은 반전을 겪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 버린 듯 허전하다”며 인터뷰를 꺼리는 김미애 씨를 설득해 만났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녀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수업이 끝났는지 사법연수원에서는 많은 연수원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한 손에는 법전을 든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김미애(34) 씨는 정장을 차려입고 쑥스러운 듯 다가왔다.

자궁암 말기, 어머니는 핏기 없이 누워 있었다
김미애 씨의 고향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의 작은 어촌마을이다.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의 가정에 큰 변화가 온 것은 12세가 되던 해 봄이었다.
“아버지는 배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망해 빚만 잔뜩 지고 잠적했습니다. 어머니가 해녀로 살면서 저희를 먹여 살렸죠.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병원에 갔습니다. '집 잘 보고 있거라' 하고 엄마 옷을 챙겨 들고 가시는데, 직감적으로 큰일이구나 싶었습니다. 결국 몇 달 후에 돌아온 어머니는 자궁암 말기였지요. 길어야 세 달이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그녀에게 함께 교회에 다니자고 했다. 오로지 어머니 병을 낫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구역예배를 다녔고 인근 7∼8개 교회 부흥회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리어카에 어머니를 태운 채. 걷지도 앉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난로 옆의 마룻바닥에 누워서 예배를 봤다.
“어머니는 그러고도 4년을 더 살고 돌아가셨습니다. 중2 때 돌아가셨으니 무려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엄마가 옆에 있는 것 같아요. 힘들 때마다 늘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우울했던 포항여고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명문인 포항여고에 입학했으나 입학금만 겨우 낼 수 있었다. 매일매일 학교 갈 차비가 없어 아침마다 남의 집에 차비 빌리러 다니는 게 일과였다. 참고서를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오직 한 분, 고향 교회의 류광하 목사님만이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돈을 털어 주었고, 그 돈으로 일주일을 겨우 버텼다.
“그때 저는 너무 우울했습니다. 친구가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도시락을 못 싸가서 늘 방황했고, 성적도 점점 떨어졌습니다. 의미 없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죠.”
그해 5월 김미애 씨에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불우이웃 돕기 시즌이었는데, 반 친구들이 그녀에게 나가 있도록 권했다. 돈을 모아 건네줬다. 전교생이 모여 있는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은 반 아이들과 담임선생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학교를 그만뒀다.
“제가 원했던 것은 평소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고, 관심이었는데….”
김미애 씨는 그 길로 교회 친구들이 일하고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녀도 방직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며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먼지가 너무 많은 곳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하고 학교에도 다녔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서 일해봐야 별로 내 인생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월을 낭비했지요.”

스물네 살에 초밥집 사장이 되다
“나이 스물둘이 되자 위기의식이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싶었죠. 관광 통역가이드가 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무척 열심히 했어요. 통역가이드는 제 길이 아닌 것 같아 일본인 관광객 대상 쇼핑센터에서 일했습니다. 월급이 50만 원이었는데, 3년 동안 이 악물고 1,000만 원을 벌었습니다.”
그 돈을 밑천 삼아 부산에서 15평짜리 초밥집을 냈다. 그녀의 나이 24살이었다. 시장도 직접 보고 초밥도 만들었다. 잠도 안 자고 혼자서 다 하다보니 일주일 만에 살이 5㎏이나 빠졌다. 직접 찾아다니면서 홍보를 했더니 사람들은 “나이 어린 아가씨가 기특하다”며 자주 찾았고 단골도 생겼다. 한 달에 300만 원을 벌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
“돈을 많이 버니까 친구들 만나서 나이트클럽에도 자주 갔습니다. 엄청나게 잘 놀았죠.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난 공부하는 게 참 좋은데, 어릴 때 내 꿈은 이게 아닌데 어쩌다 여기 있는 걸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죠.”
어느 날 부산 부전시장에서 장을 본 후 가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지하차도로 내려가는 순간 양 벽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죽음이 떠올랐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곤 9년 동안 다니지 않던 교회에 다시 나갔다. “지금 하는 것 다 청산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했다.

동아대 법대생,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말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찾게 해달라고요. 선교사를 할까, 법관을 할까 고민하다 법대를 선택했습니다. 그동안 장사하면서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을 많이 봐왔죠. 결정한 후에는 뒤도 안 돌아봤습니다.”
27살에 대입 수능 공부를 시작해 동아대 법대에 입학했다. 학교 고시반 입실시험에서 1등을 해 숙식 면제와 보조금 혜택을 받았다. 김미애 씨는 “수석 해야만 장학금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식할 정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졸업반 때를 제외하고 내내 수석을 차지했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수업시간이 스트레스 해소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고 공부한 것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좋아서 혼자서 웃고 다닌 적이 많았습니다. 태양이 나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 5시 30분이면 학교에 나와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기도하고 성경책을 읽고 난 후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책상에 앉아 있었다. 2001년 1차 시험에 합격해 동아대에서 매달 보조금 42만5,000원을 받았다.
“2차 시험 준비를 할 때에는 서울 신림동에 올라와 고시원에서 생활했거든요. 그때 온몸은 안 아픈 데가 없었고,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제 책상 위에 쓰여 있던 단어가 1)엄마 2)내 고향 바다 3)조카 이름이었거든요. 그걸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죠.”
김미애 씨는 결국 2002년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하던 날, 그녀는 휴대폰도 꺼놓은 채 PC방에 가서 혼자서 결과발표를 봤다. 확인 후 휴대폰을 켜니 축하한다는 음성이 이미 많이 남겨져 있었다.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 주고 싶다
“시험 합격 후 고향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시골 교회에서는 잔치가 벌어졌고 도로변에 '장길교회 출신 김미애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습니다. 동아대에도 보답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형법 무료특강을 해줬습니다.”
그녀는 지난 2월 21일 서른다섯에 학사모를 썼다. 3월부터 연수원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에서 영어회화를 공부하리라 마음먹었건만 수업 따라가기도 바쁘단다.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이라는 김미애 씨의 말에서 연수원생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엿볼 수 있었다.
김미애 씨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그녀는 1년 동안 한 학생에게 매달 조금씩 후원해준 적이 있다. 절대 학생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가끔씩 집에 들러 먼발치에서 학생의 모습을 지켜만 봤다.
“저는 깨끗한 부자가 되어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한비야 씨처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프리카에 가서 난민들에게 선교도 하고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요.”
“결혼은 안 할 거냐”는 질문에 “하겠죠 뭐”라며 웃었다. 
 

 

 
 

3.어느 목회자의 피맺인 절규

가르침과 정반대로 가는 한국교회…예수에게로 돌아가자
지금부터 35년 전의 일이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중에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예배를 마친 후에 회의가 있으니 학생들은 다 나가라는 것이다. 어른들끼리 모여 무슨 중대한 의논을 하는가보다 생각했었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끼리 교회마당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교회 현관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었고, 종각(鐘閣)에는 큰 별이 달려 있었다. 이제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다.

그 시절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키는 매우 작았고, 성격도 소심했지만 호기심만큼은 강했다. 말도 떠듬떠듬하면서 엉뚱한 상상과 질문을 많이 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서 친구들과 까불며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회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우리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모두 교회 창문으로 달려가 까치발을 하고 교회 안을 살폈다.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 여자 권사님이었다. 사회석에 서 계신 목사님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똑똑히 들은 소리는 이랬다.

“야, 당신! 당신이 그러고도 목사야! 목사질 하려면 똑바로 좀 해!”
시간이 지나자 예배당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것 같지는 않은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은 분들 중에는 교회학교 교사들도 있었다. 충격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집안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나는 아버지께 “왜 어른들은 예배당 안에서 욕하고 싸우느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런 일이 종종 있었고 그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었다.
어느 때인가는 예배 도중에도 소란스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목사님은 자주 바뀌셨다. 나는 목사님네 이삿짐 싸는 일을 여러 차례 거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이삿짐을 꾸리는 목사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고, 사모님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내가 경험한 교회 모습의 한 단면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말과 행실이 같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대표기도를 할 때는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다.

말끝마다 냉랭한 교회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사랑, 사랑을 외치면서…. ‘예배당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니 뛰어다니면 안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곤, ‘어떻게 예배당 안에서 싸울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를 이루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생활이 뒤따르지 않는데 기도와 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의 이런 의문은 점점 커져 갔다.
나는 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목사가 되었다. 평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신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이름하여 교육전도사였다. 그것이 1980년부터이다. 그러니 거의 24년 동안 교회에서 선생 노릇을 한 셈이다. 교회에 정식으로 파송을 받아 담임만 18년을 했다.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설교를 했다.
그동안 내가 강단에서 설교한 숫자를 계산해볼까 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서 그만두었다.
지난 20여 년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의 현실에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한 설교를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수십 권의 노트와 파일이 남아 있다.

그것이 목사의 치적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
수천 아니 수만 페이지의 설교 중 단 몇 페이지가 제대로 실천되었을까? 그것이 나의 의문점이다. 나는 '한동안 교인들은 왜 변하지 않는가', '일주일에도 주일 낮, 저녁, 수요일, 속회,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열 번 이상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왜 교인들의 인격이 성숙해져 가지 않는가' 하는 문제로 갈등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선 전매특허라도 낸 것처럼 독점하면서, 왜 실천이 없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자녀 여러분,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 3;18)

꼭 10년 전이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포천에 있는 은성수도원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은성수도원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나는 조립식으로 만든 간이기도실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사흘 째 되던 날 문틈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투명한 빛에 내 온몸이 포로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작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내 온 몸이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떨렸다.
그 때 까까머리 중학교 때부터 갖고 있었던 나의 의문점이 풀리기 시작했다.
꽁꽁 닫혔던 내 영혼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에, 내 삶에, 내 영혼에 그리스도가 부재(不在)했기 때문이었다.

왜 교인들이 사랑을 말하면서 싸우는가? 왜 신앙과 생활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왜 교인들이 수없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성숙한 인격을 갖지 못하는 것인가? 단 한마디로 예수를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오래된 수수께끼는 이렇게 해서 풀리게 되었다. 내 의문이 풀리자 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도저히 방 안에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산으로 허위단심 뛰어올라가 눈사람처럼 굴렀다. 그리고 미친 듯이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의 새로운 이상향(理想鄕)이 있는가? 나는 그 모든 핵심이 ‘예수’라고 본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를 설교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가?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에 예수가 계신가?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온갖 행사를 하는데 그 속에는 예수가 없는 듯하다.

왜 예수가 없는가? 예수를 바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모시지 못하고 모신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없는 기도, 예수가 없는 예배, 예수가 없는 행사, 예수가 없는 신앙, …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알버트 노울런(Albert Nolan)’의 「그리스도 이전의 예수」에서의 표현대로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듯하다.

교회의 새로운 모델은 '예수 바로 모시기 운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신앙의 지름길을 택해 왔다. 진리나 신앙의 길에는 지름길이란 없다.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넓은 길로 가는 방법만 시도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교회를 양적인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하는 수단으로 이용돼서는 안된다. 그 말은 예수에게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현상만 쫒아서는 안된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 진수로 돌아가야 한다. 성령을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해서 안된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께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감독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감투 싸움은 없어질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여보게,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눅 4:10)

오히려 가장 가난하게 사는 목사가 존경받는 목사가 될 것이고, 감독이나 총회장은 시골구석에서 수십 년동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섬기며 살아온 목사가 추대될 것이다. 지금처럼 돈으로 표를 사고파는 그런 사기행각은 없어질 것이다.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교인 빼앗기 쟁탈전도 사라질 것이다.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모습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바치신 기도의 내용과 같이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연대의식과 형제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의 자랑은 교인 숫자나 헌금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며 영혼구원과 공익을 위한 선교와 봉사의 체제로 전환하는데 있으며, 그것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하게 실천되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도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할 것이다. 예수를 이미 모시고 살게 되면 많은 설교가 필요 없지 않은가. 설교가 잔소리가 되면 안된다. 목사의 준비되지 않은 엉터리 설교가 예수를 상실한 교회와 교인을 만드는데 한몫 했으므로…. 목사의 설교는 성직자의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가장 겸손한 도구로 낮아져야 한다.

농촌교회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도시교회는 농촌교회에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
도시교회는 교인들에게 일년에 한 번은 농촌 모 교회로 십일조를 보내도록 한다.
그리고 봄이나 가을철에 시골 모 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한다. 상상해 보라. 이 때는 시골교회 예배당이 교인들로 가득찰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나와 일손을 돕는다. 이런 모습은 이벤트나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골교회와 도시교회가 형제교회로서의 일체감을 갖게 하는 공동체의식의 발현(發顯)이다.
지금도 내 서재의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방안 전체를 환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교회가 예수를 바로 모시기만 하면 교회의 모든 병폐와 모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상상이 내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다 

 

 
 

4.김혜자의 글 소개-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우리는 배우 김혜자씨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 10년간의 기록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곳에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눈곱을 파먹는 파리들, 온통 더러운 길바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지참금 때문에 딸을 낳으면 독초를 먹여 세상에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된 아이를 숨지게 해야 하는 비정한 엄마들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진 50달러의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 하루 종일 코코넛 껍질로 밧줄을 꼬고 잎담배를 말아야 하는, 눈이 커다란 소녀들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진 50달러의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 하루 종일 코코넛 껍질로 밧줄을 꼬고 잎담배를 말아야 하는, 눈이 커다란 소녀들도 보았습니다.

먹을 게 없어 돌산에서 자라는 시금치 비슷한 풀을 뜯어먹고 입술과 얼굴까지 초록색으로 변한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손에는 여전히 그 풀을 움켜쥐고 있는 아이들을……. 네 살짜리 아이가 마대 같은 것을 들고 제 오빠와 함께 먹을 풀을 캐러 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발이 시려워 엄지발가락을 잔뜩 꼬부리고서.
나는 삶에 대해 잘 모릅니다. 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 김혜자는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잘살고 있는데, 왜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이 8백 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장님이 되어야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 있는 아빠의 배 위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어가야 하는 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내 머리로는 이 엄청난 불평등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왜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걸까요?
특히 그는 소말리아에 갔을 때 인간의 사랑이 식지 않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소말리아에 갔을 때는 '피부가 거의 백 살이나 된 것처럼' 쭈그러든 소년을 보았습니다. 사과를 주니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가더군요. 거기에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소년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동생한테 사과를 주고 먹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 들려온 이야기로는 결국 소년은 동생을 살리고 숨졌다는군요." 

 
 
 

5.꼴찌를 1등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

<빽이 도대체 누구야>라는 책에서 저자 다니엘 명의 간증입니다.
◇빽이 도대체 누구야/다니엘 명/상상북스(02-2607-2783)

1996년 미국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취업 준비중이던 저자는 당시 미국 최상위 회계법인 6개(빅6) 중에서 4곳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다. 그 중에는 1위 회사로 모든 회계학 전공자들의 꿈인 ‘아서 앤더슨’도 있었다.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면접 후 고민에 빠졌다. 주일성수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회계법인들은 연봉은 많지만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을 하고 주일에도 쉴 수가 없다.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저자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빅6 중 6위인 ‘쿠퍼스 & 라이브랜드’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면접 책임자는 “자네를 우리 회사에 오게 하려면 어떤 조건이면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주일에는 일을 못하겠습니다”는 대답에 책임자는 흔쾌히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내가 보장해주겠네”고 답했다. 알고보니 그도 크리스천이었다. 저자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했다. 친구들은 “제 정신이냐?”며 별난 사람 취급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게 평안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더니 아서 앤더슨은 2001년 ‘앤론‘이라는 회사의 회계부정 사건에 휘말려 문을 닫고 말았다. 반면 저자가 다닌 회사는 98년 빅5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와 합병하며 일약 넘버1 회사로 올라섰다. “나는 꼴찌를 선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꼴찌를 1등으로 만들어주셨다.” 

 

 
 

 

6.상실은 있어도 상처는 없다

남편의 투병일기 ‘행복일기’되기까지… 상실은 있어도 상처는 없다

“이 땅에서 한평생 줄 사랑을 10년 동안 다 주고 지금도 천국에서 파이팅을 외쳐줄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흔이 채 안된 평범한 한 가장에게 돌연 뇌종양 진단이 떨어졌다. 올망졸망한 세 딸과 함께 아내의 뱃속에서는 넷째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교회에서는 찬양 리더로 일하면서 시간만 나면 소외된 이웃을 찾아 봉사를 하던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주인공은 어떤 의류 브랜드 회사의 본부장이었던 고창용 집사. 의류 브랜드들 중에서 꼴찌를 기록했던 회사를 1년만에 10배 넘게 성장시켰던 그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미처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책 ‘상실은 있어도 상처는 없다’(생명의말씀사·02-738-6555)는 고 집사의 아내 장주연씨가 홈페이지에 올렸던 투병일기와 그후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남편에게 내려진 뇌종양 진단은 그동안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하나님을 원망스럽게 했습니다.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무의탁노인 고아 등 소외된 이웃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던 남편,힘든 회사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몸을 불태우던 남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이렇게 갚으실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믿음을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습니다.”

이런 고백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를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하셨나 보다. 절망에 빠져 있던 장씨를 일으킨 것은 교회의 형제자매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교회에서는 남편의 홈페이지를 급히 만들어주셨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남편 소식을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 올린 글들은 투병일기가 되었습니다.”

고 집사 부부가 출석하던 광염교회(담임 조현삼 목사)는 고 집사의 쾌유를 위해 금식 릴레이와 365일 철야기도팀을 구성하기도 했다.

조현삼 목사는 고 집사의 사투를 ‘투병 축제’로 이름짓고 지속적으로 격려했다. 불치병을 이겨낸 경험이 있는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도 병실을 방문해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투병 끝에 고 집사는 결국 하나님 품으로 떠났다. 고 집사는 수의 대신 병에 걸리기 전 그토록 열정을 쏟아부었던 ‘푸마’의 옷을 입고,장갑을 끼고,신발을 신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가족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웅웅거리듯 들렸습니다. 그렇게도 믿고 기도했는데 한 번도 절망하지 않고,아니 절망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희망을 향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달려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너무 허탈했습니다.”

장씨는 절망밖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씨가 허망함에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본 남편의 영정은 활짝 웃고 있었다. “장주연,파이팅!” 이렇게 속삭이는 듯한 밝은 얼굴을 보면서 그 역시 웃음을 지어볼 수 있었다. 견고한 신앙 속에,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속에 살았던 남편이었기 때문에 장씨는 그를 잃고도 소망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보,사랑해. 우리 나중에 만나. 아이들 걱정 말고 평안히 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나 잘 키울 수 있어. 사랑해,여보.”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인 큰딸 은비,올해 초등학생이 된 둘째 은송,유치원생인 셋째 은수,이제 돌을 넘긴 막내 은지,이렇게 네 딸과 함께 장주연씨는 남편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밝고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남편의 투병일기를 올리던 장씨의 홈페이지 ‘장주연의 행복만들기’(http://osmission.com)에는 이제 날마다 ‘행복일기’가 연재되고 있다 
 
 
 
 

 

7.오정현 목사, '작은교회 극복론'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12명으로 교회개척을 시작하여 작은 교회를 극복하고 교회 성장을 이끌었던 내용을 짧게 소개했다. "30-40명이 모일 때였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등록하라는 말은 못하고 월요일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등록은 못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 '등록은 못하겠다'고 한다.

'아이들이 주일 학교에 갈 수 없어서'라는 이유다. 작은 교회라는 이미지가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오정현 목사 자신이 12명으로 개척을 시작한 미국 남가주사랑의교회가 '작은교회'의 이미지를 벗지 못해 괴로워 하던 시기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생명에게 제대로 관심을 갖기만 한다면 좌절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개척과정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40대에는 분명한 목회 비전이 필수적이다.
불타는 소명, 불타는 목회 철학이 필요하다.
100명 될 때까지 죽어라 심방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것이다.
200명은 죽어라 기도하면 모인다. 매일 기도제목 나누어 주었다. 짝기도 합심기도 등 기도에 집중한다.
300명 예배가 신선하면 모인다. 무엇인가가 달라야 한다. 예배가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서 광고도 잘해야 한다. 광고는 제 2의 메시지였다. 출애급 시 몇 명은 '광고를 못들어서' 빠져 죽었다. 찬송을 철저하게 적절히 선택한다. 축도도 잘해야 한다."
또한 그는 특별새벽기도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에게 은혜롭게 고통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 사람들은 어려울 때, 은혜를 받는다. 내가 오자마자 특별 새벽기도회를 했다. 나는 죽어라 힘이 드는데,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힘들면 은혜가 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목사는 21세기 교회의 시스템을 강조하기도 했다.
"20세기에는 열심히 하면 교회가 다 자랐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창조력의 문제다. 그리고 재생산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양대 산맥, 즉 순복음 교회 성령운동과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이 두가지 모두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8.지옥에서의 48시간

여태껏 나에게 알려진 가장 흥미로운 소생(거의 죽기직전 살아남)의 사건들 중의 하나는 George Lennox의 경우였다.

그는 Jefferson County에서 악명 높은 말 도둑이었다.
그는 두 번째 형기를 복역하고 있었는데 Sedgwick County도 처음 죄목과 같은 말 도둑 범죄자로 그를 투옥시켰다.

1887년과 1888년 사이의 겨울동안 그는 광산에서 근무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장소는 위험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책임소장에게 보고하여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소장은 그 장소가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Lennox에게 돌아가서 일할 것을 명령했다.

순종은 했지만 그 죄수는 1시간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그는 완전히 매몰되었다.
이런 상태가 2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죄수가 오지 않자 수색을 실시했고 곧 장작더미 아래서 그가 발견되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지상으로 옮겨져 교도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지만 의사는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의 유물들이 병원으로 옮겨졌고 몸을 씼기고 옷을 입혀 매장할 준비를 했다.
또 그의 관이 만들어져 병원에 이송 되었고, 목사가 장례식에 앞서 마지막 애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도착했다.
병원집사는 두명의 죄수에게 바닥에 있는 시체를 들어서 그 방을 가로질러 가지고 온 다음, 관속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그 지시를 따라서 한명은 머리를, 다른 한명은 다리를 들어 그 방에서 나와 반쯤 걸어 나왔을 때였다.

머리 쪽을 들고 있던 죄수가 실수로 타구(침이나 소변 따위를 담는 그릇)에 걸려 비틀거렸고, 중심을 잃고 그 시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머리가 마루바닥에 부딪쳤는데, 순간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깊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의 눈이 떠졌고 다시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시 주위에 있던 사람이 의사를 부르러 갔고 약 30분 뒤에야 의사가 도착했다.
그 때는 그 죽었던 죄수가 물 한 컵을 요구해서 마시고 있던 중이였다.
곧바로 관이 치워졌고 후에 다른 죄수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의 장례복장도 치워졌는데 나중에 죄수복으로 대용했다.
검진 중에 그의 다리 중 하나는 부러졌고 다른 하나는 타박상을 입었음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병원에 약 6개월 동안 입원해 있다가 다시 일하러 나가게 되었다.

나는 동료 광부로부터 분명히 죽었지만 다시 소생했다는 그의 특별한 경험을 듣게 되었다.

호기심이 자극되자 나는 Lennox와 아는 사이가 되어 직접 그의 입으로부터 경험담을 듣고 싶어졌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그 광산이 없어지고 난 후, 나는 매년 서류를 보관하는 교도소 사무실 중 하나를 찾아가서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자 어느 한 날에 그 사람의 소생에 관하여 의논이 된 서류가 발견되었다.
때마침 그 사람이 우연하게도 이 사무실을 지나쳤는데 날 지적하는 것이었다.
나는 곧 그 노트를 그에게 쥐어 주었고 내가 일하는 곳으로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부탁을 들어주었고 우린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입으로 놀라운 경험을 말해 주었다.

그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30살 남짓 보였다.
그는 상습범이었지만, 교육은 잘 받았고 천성적으로 매우 영리해 보였다.

그의 경험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가 죽어 있을 동안에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속기사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아침 내내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무서운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죠.
난 정말 감정이 너무 불안해서 나의 광산 사장인 Grason씨에게 달려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말했고, 석탄을 파고 있는 곳에 와서 조사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조사를 한 것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나보고 돌아가서 일을 계속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은 전혀 없다면서 말이죠.
그는 내가 성미가 까다로워졌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나는 돌아가 일을 했고 1시간 가까이 뭔가를 계속 파내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매우 어두워졌어요.
그 때, 거대한 철문이 휙 열리더니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내가 죽었고 다른 세상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어요.
내가 모르는 뭔가에 의해 나는 그 입구로부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먼 거리를 걷고 나자 어떤 넓은 강의 강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이 떠있는 밤 정도의 그런 밝기 정도였죠.
나는 이 강둑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곧 바로 물에서 노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룻배에 어떤 사람이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노를 저어 왔죠.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날위해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트에 타서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 가게 될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곤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가 계속 됬어요.

나는 그에게 그가 누구이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져 있는것 같았죠.
나는 단 한마디조차도 말할 수 없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반대쪽 물가에 다다랐고
난 보트에서 내렸는데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남겨지게 되었고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내 앞을 바라보자 어두운 계곡으로 통하는 두개의 길을 보게 되었죠.
하나는 넓은 길이었는데 걷기에 잘 닦여진 것 같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좁은 길이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죠.
나는 본능적으로 잘 닦여진 길을 쫓았습니다.

멀리 가진 않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죠.
가끔 빛이 먼 거리에서 섬광처럼 번뜩였지만
이런 식으로 나는 안내되어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는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불가능한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그가 무시무시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약간의 idea만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다소 닮기는 했지만 내가 보아왔던 인간들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는 키가 최소 3m는 되어 보였고 등에는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팠었던 석탄만큼이나 검었고 완전히 걸친 것이 없는 상태였죠.
그의 손에는 창이 있었는데 창자루가 무려 4.5m나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숯불처럼 빛났고
그의 이는 진주처럼 하얀색이었는데 길이가 1인치나 되는 것 같았어요.
그의 코는(그것을 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우 크고 넓고 납작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매우 거칠고 굵고 길었죠.
그것은 그의 육중한 어깨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동물원에 있는 사자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보다 훨씬 더 컸는데,
실제로 그런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그를 첨 본 것은 섬광의 번쩍임 동안이었죠.
나는 그를 보자마자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습니다.
그는 마치 창으로 날 관통시키려는 것처럼 그것을 들어 올렸습니다.
갑자기 내 몸이 굳어졌습니다.

그는 내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름끼치는 음성으로 자기를 따라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나의 여정을 인도하려고 보내진 존재였습니다.
난 따라갔습니다.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길을 걷자 한 거대한 산이 우리 앞에 높이 치솟은 채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우리 정면에 있는 부분은 거의 수직에 가까웠는데 마치 하나의 산이 반으로 잘라져 한 면이 제거된 듯한 모습이었죠.
이 수직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은 지옥이다.’

나의 guide는(저승사자라고 이해하시면 될겁니다)
이 수직벽면에 이르자 그의 창자루로 세 번의 커다란 긁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한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뒤로 확 열렸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나는 그 때 이 산을 통과했던 것과 같은 존재에 의해 안내되어졌습니다.

얼마동안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갔습니다.

나는 guide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를 쫓을 수 있었죠.
계속 걸으면서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점점 더 걸을수록 이 신음소리들은 많아졌고,
나는 또렷하게 ‘물!’ ‘물!’ ‘물!’ 이라고 울부짖는 외침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입구에 이르러 그 곳을 통과하자
나는 ‘물!’ ‘물!’ 이라고 외쳐되는 실제로 수백만명이나 되는 것 같은 비명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또 다른 거대한 문이 나의 guide가 노크를 하자 열려졌고,
나는 우리가 그 산을 통과하여
지금은 내 앞에 어떤 광활한 벌판이 놓여져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이 곳에서 나의 guide는 다른 ‘읽은자’(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오게된 영혼)들을 어떤 목적지로 데려가기 위해 날 잠시 이 널따란 벌판에 남겨 두었죠.

그 순간 처음 안내자와 다소 비슷한 존재가 내게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 대신에 거대한 검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나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말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영혼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너는 지옥에 있게 된다.’

그가 말했다.

‘널 위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너가 그 산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왔을 때,
너는 잃은자들이 그들의 불타고 있는 혀를 식히기 위해 '물'을 부르짖는 신음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소리들을 들었다.

여기서 좀 더 가게 되면 불못(the lake of fire)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것은 곧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너는 그 고통의 장소로 안내되고 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확 트인 벌판에 잠시 남겨지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너는 모든 잃은자들이 영원히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난 홀로 남겨졌습니다.

난 내가 지나쳐 왔던 무서운 공포의 결과를 아는지 모르는지 난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죠.
지루한 무기력함이 나의 온 전신을 짖눌렸고 내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나의 다리는 나의 육체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어요.
극복하려 했지만 나는 도움이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졸음이 날 제압했고, 반쯤 깨어있고 반쯤 잠이 든채로 꿈같은 것을 보게 되었죠.

내게 있는데서 훨씬 더 위인 아주 먼 거리에서 나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적이 있는 아름다운 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벽옥으로 된 그 벽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그 먼 거리에 있는 것을 향해 손을 내뻗어 휘저으면서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어져 있는 광활한 평원을 봤습니다.
또 나는 생명수강과 유리바다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그 도성의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고, 찬양을 부르고 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그 도성의 시민들 중에서 나는 나의 사랑스런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사악함 때문에 마음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죠.
그녀는 날 쳐다 보았고 자기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나를 밑으로 짖누르는 커다란 중력같은 것을 느꼈죠.

지금도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그 사랑스런 꽃들의 향기를 싣고 풍겨져 오는 것만 같고,
지금도 그때보다 훨씬 더 천사들의 달콤한 노랫가락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아요.

아무튼 난 외쳤습니다.

‘아~ 나도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이 축복의 잔을 들이키려 하자 갑자기 그 것은 내 입에서 내던져졌습니다.
나는 선잠에서 깨어났고 이 어두운 곳에 한 내부자가 그 행복한 꿈같은 곳으로부터 나를 되돌려 놨죠.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내가 나의 미래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길 쫓으라고 명했고 난 발걸음을 되돌리면서 다시 그 어두운 통로로 들어가 얼마동안 그 안내자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그 통로 옆으로 열려져 있는 어떤 문에 이르게 되었고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우리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는데....

아~ 어찌된 일인가!! 내 앞에는 불못(the lake of fire)이 있었습니다.

“내 눈이 볼 수 있는 한 아주 멀리까지 글자 그대로 불과 유황의 못이 있었습니다.
파도같이 거대한 불의 물결이 서로 굽이쳐 흘렀고, 커다란 화염 불길이 서로 부딪쳐 격렬한 폭풍우에 휩싸인 성난 바다의 물결처럼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습니다.
물마루를 타면서 인간들이 올라가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이 섬뜩한 불못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들이 잠깐동안 물마루를 탔을 때에 외쳐되는 하나님에 대한 저주들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고,
'물'에 대한 그들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은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거대한 불못은 읽은 영혼들의 오열과 통곡소리로 메아리 치고 메아리 쳤습니다.

곧바로 나는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있었던 그 문으로 눈길을 돌리자 이런 섬뜩한 구절이 눈에 띄였습니다.

‘이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이다. 그리고 영원은 절대로 끝이 없다.‘

이내 나는 내 발밑의 대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윽고 내가 불못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물'에 대한 갈증이 날 사로잡았고 물을 외치면서 내 눈은 그 병원에서 뜨여졌습니다.

“나는 절대로 이런 나의 경험을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간수가 그 것을 입수해서 날 정신이 나간 놈으로 취급하여 정신병원에 가둘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난 이런 경험이 모두 지나가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성경이 말했던 것처럼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난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내가 다시 한번 지상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그 즉시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나는 크리스챤으로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지옥의 무시무시한 광경들은 나의 기억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내가 봤던 천국의 아름다운 것들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나는 나의 사랑스런 어머니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생명수 강가에 앉는 것이 허락 되어질 것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해 있는 골짜기와 언덕이 있는 그 평원을 가로질러 천사들과 함께 돌아 다닐 것입니다.

또 구원 받은 성도들의 찬양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비록 감옥에 오기 전에 육체적 쾌락을 탐닉했을 지라도 지상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살다가 죽은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도 남을 것입니다.
나는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동료들을 버리고 형기를 마쳐 다시 자유인이 되었을 때는 좋은 사람들과 사귈 것입니다."

이 것은 여태껏 들었던 가장 놀라운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Lennox의 이 메시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길 바란다.
아~ 어떻게 사람들은 실제 그대로 불타고 있는 지옥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단지 48시간이 아닌 영원한 지옥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9.한 집사님의 천국과 지옥의 간증

습관적인 신앙생활 나는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시기에 그것을 받아들여서 4대째 이어오고 있는, 신앙의 연조가 깊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4대째’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 집안은 기독교 분위기였다. 나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일날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습관처럼 교회를 다니는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만 한다. 집사 직분을 받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성경을 교회 갈 때만 들고 다녔다. 하도 성경을 읽지 않아서 계시록이 구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에 무지했다. 교회를 다니며 수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누구인지 바르게 만나지 못했으므로,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지도 못했고 확신도 없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과 판단과 삶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대대로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과 모태신앙, 몇 십 년 된 집사 직분은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고 고백하는 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안락사 문턱에서 살아나다 나는 1999년에, 요즘에는 병도 아닌 병, 결핵에 걸려 병원에 들어가던 중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병원 응급실에서는 다 죽은 시체이니 돌아가 장례 준비나 하라며 내보내려 했으나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더라도 병원에서 해야겠다고 간곡히 사정하여 입원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곧 숨이 끊어질 것 같던 나는 비록 의식은 전혀 없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지만 가느다란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가족들은 의논을 거쳐 안락사 쪽으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이 아들은 내가 몸만 낳았다. 그 영혼,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실 것이니 기도하며 기다리자! 안락사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시며 반대를 하셨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런 의논을 하고 있을 때 나의 영혼은 이미 영적 세계를 보고 다니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내 몸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뭉턱 하고 밖으로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벌써 어딘가로 가서 서 있었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수만 명의 남녀노소가 앞을 향하여 똑바로 줄을 서 있었고, 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그 줄의 정렬은 엄숙하고 정확해서 이탈자 하나 없고 몸은 똑바로 경직되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어떤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앞으로 쭉쭉 미끄러지듯 나가는 모습은, 마치 좋은 과일과 나쁜 과일을 이쪽저쪽으로 척척 갈라 주는 기계 위에 놓아져 있는 물건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데, 왜 내가 그곳에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걱정되지도 않았다. 단지 무슨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오른쪽 귀에 어떤 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 소리는 듣기에도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치는, 각 나라의 언어로 수많은 사람 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기가 질렸고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보니, 마치 바다같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웅덩이가 보이는데, 그 위로 파도보다도 더 높고 큰, 새 빨갛고 새 파란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며 빠른 속력으로 굴러오듯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내가 서 있는 줄이 많이 줄어서 심판하는 곳도 볼 수 있었는데, 키가 2미터는 돼 보이고, 머리는 혐오스럽도록 땋아 묶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양옆으로 갈라 서 있었다.

또한 그 앞에는 전능자 같은 이가 계신데 광채로 빛이 나고 희어서 눈이 부시고, 큰 의자에 사람의 형상 같은 모습으로 손에는 책 같은 것을 들고 계셨다. 그 보좌에서는 소리가 나는데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묻는 것 같았다. 대답을 못하거나 머뭇거리는 자는 심판하시는 자의 왼편으로, 확실하게 대답하는 자는 오른편으로 보내는데 누구 하나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드는 자가 없었다.

왼쪽으로 갈 자들은 전능자 앞에 떨며 서 있고, 그들을 던질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사자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 온 짐승 다루듯 숙달된 솜씨로 두 팔과 두 다리를 번쩍 들어서 짐짝처럼 그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 자들은 달구어진 프라이팬에서 콩이 튀듯, 펄쩍펄쩍 튀어 오르며 경악하는 얼굴로 바로 서 있지를 못하고 더 이상 타지도 않는 상태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곳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떨리고 두려웠지만 도망갈 수도, 꼼짝할 수도 없었다. 방금 내가 보았던 광경은 지옥이었고,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나도 그곳으로 떨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빨리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육신을 떠난 영은 회개할 수도, 과거를 다시 돌이킬 수도 없었다. 복음성가에도 ‘재림 나팔 불면 예비할 수 없다’라는 가사가 있듯이 오직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때만 기회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곳을 피하고 싶었으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자리였다.

나는 두려움으로 ‘이쪽이 지옥이면 혹시 저 반대편은 천국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왼쪽 귀에 아주 평안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천사들의 찬송 소리라고 느껴졌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졌고 그곳을 바라보니 과연 천국이었다.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그곳에는 아주 큰 집이 정금과 보석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그 집 기둥과 문마다 각종 보석이 박혀 있었고 모든 가구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었고 넓은 길은 수정같이 맑은 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은 너무 아름다워 이세상 말로써는 도무지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천국으로 가고 싶었다. 다시 앞을 보니 어느새 몇 백 명만 남아 있었는데 그때 한 명이 천국으로 춤을 추며 들어갔다. 순식간에 내 차례가 왔고 바로 내 앞 여자 한 사람도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좋은지 이 세상 어떤 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춤을 추며 들어갔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 보좌 앞에 서니 보잘것없는 나는 그 위엄에 놀라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분이 내게 무엇인가를 질문하셨고 난 아주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 순간 식물인간이던 내 몸이 펄쩍 뛰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의식이 돌아왔다. 누가복음 8장 55절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내 영이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는 깨어난 후 10개월 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만 명 중에 단 두 사람만 천국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했다. 교회를 다니며 직분을 받고 믿는 자라도 항상 힘써야 될 것은 성경에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하신 말씀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마 19:24; 막 10:25; 눅 18:25)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를 바로 만나고 바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안락사를 당하고 죽어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으나 어머니의 믿음과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무슨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하였는지 그것만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본 이 모든 것이 몇 십 년을 들고만 다녔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전 뜰만 밟고 다녔던 참으로 어리석은 나의 행동과 게으름, 그동안의 쌓인 죄로 인해 가슴이 아프고 원통해 얼마나 많은 회개를 하며 통곡하였는지 모른다.
믿음이 없어 이미 영육이 죽었던 내게 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시고 회개할 기회와 영생을 주셨다. 덤으로 주신 내 생명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님께 온 몸과 영으로 찬송드리며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전도에 힘쓰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 것이다 

 

 

 
 

10.죽음의 문 저 너머에

 

미국의 저명한 한 내과의사 모리스 롤링즈 박사가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한 것을 종합한 『죽음의 문 너머』(Beyond Death's Door)라는 책의 내용이 월간 신동아(新東亞)에 소개되었었는데 좋은 경험을 한 사람과 나쁜 경험을 한 사람의 수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들을 살펴보면...

죽어 가는 사람들은 대개 그 직전에 기절한다. 통증이 없어지는 듯하며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간다. 방안에 있는 가족과 간호원이 분주히 움직이며 의사를 찾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의사의 사망 선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자기는 이미 육체밖에 나와 그들이주고받는 대화 내용도 모두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그가 깨어난 후 그 방안에서 있었던 일과 대화 내용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죽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으며 쾌적한 기분이다. 그 육체는 말하자면 속 빈 껍데기이며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시신 같았다는 것이다. 이런 묘한 상태에 익숙해지면서 자기가 전혀 새로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새로운 몸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는 허상이 아니다. 예전처럼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육체에서의 분리는 어느 터널을 지나는 것 같거나, 우주 로켓이 공중에서 분리되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어느 광명의 존재자, 또는 엄위한 존재자 앞에 서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이 마치 심판에 대비하는 듯 순식간에 모조리 재현된다. 나쁜 경험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불의 바다를 끼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 공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으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 밖에 나가서도 존재하고 있고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신체 감각을 갖고 있는데 육체의 감각보다도 더 예민하다는 것 등 현대의 사후 생 경험은 오래 전부터 전해온 『티베트의 사자(死者)의 책』의 기록과 매우 흡사하다.

영혼은 심판을 받고 그 사람에 합당한 운명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가 생전에 행한 일들과 언동까지도 하나도 남김없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밝혀진다. 대낮처럼 청명한 빛 속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숨기고 감추었던 모든 일들이 사후에 들통 안 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즐거웠던 경험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얼마 전까지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통증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 쾌적한 기분으로 다시는 앓는 것이나 죽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별안간 가슴의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기분이다. 자기의 육체에서 이탈 후 두둥실 떠돌며 잠시 방안에서 머물다가 그 다음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어느 보고에도 공통되는 것 같다. 어떤 환자는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가는 무서운 경험을 호소하지만, 어떤 사람은 빛의 천사 또는 사랑이 넘치는 존재에게 이끌려 황금빌딩과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는 경험을 말한다. 그리고 거룩한 빛의 존재자 앞에 섰다는 것이다.

신앙이 두터운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천상의 빛에 휩싸인 거룩한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D. L. Moody의 경우는 죽음의 상념과 죽음의 경험 그 자체를 동시에 나타내는 예의 하나이다. 그는 기독교 사상 최대의 복음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다.

무디는 1899년 죽음이 임박했다.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그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무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고. 그 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무디는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무디는 의식을 잃어 갔다.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정말 행복하다고 하면서 의식이 끊어 졌다. 주치의가 구명 노력을 하자 다시 살아나 자기가 이 세상 바깥에 갔다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고 했다. 누구를 보았느냐고 묻자 무디는 아이린과 드와이트를 만났다고 말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후 영원한 내세로 갈 신호를 받고,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안에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으로의 기대에 안겨서 숨져 갔다.

Mrs. D는 회복 후 그녀가 죽어 있는 동안에 본 일을 기술했다. 찬란한 밝은 빛에 휩싸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녀의 죽은 남편 등 친지들을 만났다. 그녀는 하늘 나라에 머물고 있고 싶었는데, 예수께서 그녀가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음을 알리도록 보냈노라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의사(롤링즈)를 전화로 불러 자기는 하늘 나라에 가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니 이번에는 내가 다시 살아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번쩍이는 건물과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동화 같은 도시의 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도처에 아름다운 빛이 가득 했다. 그 빛은 불타는 듯 현란했으나 눈을 가려야 할 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11.지옥간증-나는 불의 호수를 보았다.

오레곤의 기적 - 토마스웰치의 경험담

토마스 웰치는 그의 소책자 『오레곤의 놀라운 기적』 속에서 매우 희한한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불의 호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미국 오레곤주(州)의 어느 목재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웰치는 댐 위에 걸쳐있는 교각을 건너가야 했다. 그 앞에 제재소가 있는데 교각은 댐의 수면에서 55 피트(=16.8m)나 높은 곳에 있었다.

나는 별안간 교각에서 발을 헛디뎌 수심 10 피트(=3m) 깊이의 연못 속에 떨어졌다. 벌목장에서 통나무를 운반하여 이 연못에 떨어뜨리는 화물 열차의 운전대에 앉았던 기관사가 삐죽삐죽 나온 나무 끝에 부딪히면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내 시체 수색에 동원되어 한 시간만에 건져 올렸다. 그 동안 나는 이승에서는 이미 죽은 몸이었으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생각나는 것은 교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졌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내가 불의 호수의 기슭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연못』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있던 한 시간 동안에 내가 본 것, 일어난 것을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 육체 속에 살고 있는 동안에 배운 것 이상의 것을 육체에서 유리되어 있던 이 한 시간 동안에 배웠다. 나는 불타는 연못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그곳에서 보았는데 이 몰골 송연한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곤혹과 낭패의 애처로운 표정들이었다. 그곳의 광경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어서 말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도망칠 방법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벗어날 구멍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독백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곳에 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런 곳에 와 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내가 불의 호수 옆에서 절망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 앞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누구인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어온 예수 그분이셨다. 그분이 심판의 사슬에 매인 영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 감옥 속에 오셔서 나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분이 내 쪽을 돌아다보아 주기만 하면 나는 이 무서운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분의 시선을 끌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는 내 곁을 지나갔다.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욱 절망하고 있는데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머리를 돌려 나를 보아주신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후 몇 초 동안에 나는 나의 육체 속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먼 곳에 갔다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같이! 눈뜨기 직전에 나는 내가 기숙하고 있는 브로케 집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이여 토마스 웰치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는 불의 호수가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불의 호수도 보았고 또 예수님도 보았으니까!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기도의 위력이 그렇게 큰 가도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곧 구급차가 도착하여 포틀랜드의 사마리탄 병원으로 나를 실어 갔다. 그곳에서 나는 4일간 성령님과 은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가 본 것,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서 되살아났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 토마스 웰치는 지옥이 있음을 본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지옥 경험을 만화로 그린 소책자를 발행하여 전도하고 있다. 

 

 

 
 

 

12.즉각적인 순종의 축복

현재 국민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역경의 열매 참존화장품 회장 김광석 장로 간증에서 퍼온 글입니다.

사업이 안정을 찾아갈 무렵 서울 성수동 신양교회에 출석하는 정훈 장로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와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어온 사이였다.

"김 사장,내가 어젯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 지금 우리 교회가 새 성전을 건축했잖아. 이제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고. 그런데 어젯밤 꿈에 '김 사장이 십자가를 세워줄 것'이라는 음성이 들렸어. 참 이상하지? 왜 하필 김 사장이냔 말이야. 우리 교인도 아닌 사람을…."

"정 장로가 그런 계시를 받았다면 내가 순종할 수밖에 없잖아.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하겠어."

나는 흔쾌히 신양교회에 50m쯤 되는 십자가를 세워주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사옥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압구정동 둑길 옆에 아주 좋은 건물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건물에 들어가서 한강을 내려다보던 나는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강 건너편에서 웅장한 십자가 하나가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신양교회의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아시고 사옥 맞은편에 십자가를 세우게 하신 것이다. 그 건물은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건물을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연이 없다.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하나님은 먼저 십자가를 세우게 하시고 그 맞은편에 아름다운 사옥을 예비해놓으셨다.이렇게 섬세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데 누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가? 이런 놀라운 기도응답이 있는데 누가 하나님은 침묵하신다고 하는가? 우리는 사옥을 마련하면서 다시 한번 크게 도약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나리오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해외여행을 통해 '클린싱 워터'를 개발한 것에 스스로 고무돼 자꾸 외국에 나가고 싶었다. 외국의 신상품을 확인하는 것은 사업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 드렸다.

"하나님,저는 해외여행 경험이 적어요. 세계일주를 일곱번쯤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내 기도를 '급행'으로 응답하셨다. 한달에 한두번은 반드시 해외출장이 잡혔다. 그 덕분에 전 세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처음에는 외국여행이 재미가 있었으나 점점 힘이 들었다.그래서 요즘은 기도제목을 아예 바꾸었다.

"하나님,이제 제발 해외에는 그만 나가게 해주세요.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은 얼마나 황홀한가. 나는 나중에 약국사건의 밀고자가 누군지를 알게 됐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용서했다. 처음에는 한숨을 쉬면서 괴로워했으나 나중에는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도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 덕분에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13.지옥에서의 48시간

여태껏 나에게 알려진 가장 흥미로운 소생(거의 죽기직전 살아남)의 사건들 중의 하나는 George Lennox의 경우였다.

그는 Jefferson County에서 악명 높은 말 도둑이었다.
그는 두 번째 형기를 복역하고 있었는데 Sedgwick County도 처음 죄목과 같은 말 도둑 범죄자로 그를 투옥시켰다.

1887년과 1888년 사이의 겨울동안 그는 광산에서 근무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장소는 위험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책임소장에게 보고하여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소장은 그 장소가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Lennox에게 돌아가서 일할 것을 명령했다.

순종은 했지만 그 죄수는 1시간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그는 완전히 매몰되었다.
이런 상태가 2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죄수가 오지 않자 수색을 실시했고 곧 장작더미 아래서 그가 발견되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지상으로 옮겨져 교도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지만 의사는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의 유물들이 병원으로 옮겨졌고 몸을 씼기고 옷을 입혀 매장할 준비를 했다.
또 그의 관이 만들어져 병원에 이송 되었고, 목사가 장례식에 앞서 마지막 애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도착했다.
병원집사는 두명의 죄수에게 바닥에 있는 시체를 들어서 그 방을 가로질러 가지고 온 다음, 관속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그 지시를 따라서 한명은 머리를, 다른 한명은 다리를 들어 그 방에서 나와 반쯤 걸어 나왔을 때였다.

머리 쪽을 들고 있던 죄수가 실수로 타구(침이나 소변 따위를 담는 그릇)에 걸려 비틀거렸고, 중심을 잃고 그 시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머리가 마루바닥에 부딪쳤는데, 순간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깊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의 눈이 떠졌고 다시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시 주위에 있던 사람이 의사를 부르러 갔고 약 30분 뒤에야 의사가 도착했다.
그 때는 그 죽었던 죄수가 물 한 컵을 요구해서 마시고 있던 중이였다.
곧바로 관이 치워졌고 후에 다른 죄수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의 장례복장도 치워졌는데 나중에 죄수복으로 대용했다.
검진 중에 그의 다리 중 하나는 부러졌고 다른 하나는 타박상을 입었음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병원에 약 6개월 동안 입원해 있다가 다시 일하러 나가게 되었다.

나는 동료 광부로부터 분명히 죽었지만 다시 소생했다는 그의 특별한 경험을 듣게 되었다.

호기심이 자극되자 나는 Lennox와 아는 사이가 되어 직접 그의 입으로부터 경험담을 듣고 싶어졌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그 광산이 없어지고 난 후, 나는 매년 서류를 보관하는 교도소 사무실 중 하나를 찾아가서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자 어느 한 날에 그 사람의 소생에 관하여 의논이 된 서류가 발견되었다.
때마침 그 사람이 우연하게도 이 사무실을 지나쳤는데 날 지적하는 것이었다.
나는 곧 그 노트를 그에게 쥐어 주었고 내가 일하는 곳으로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부탁을 들어주었고 우린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입으로 놀라운 경험을 말해 주었다.

그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30살 남짓 보였다.
그는 상습범이었지만, 교육은 잘 받았고 천성적으로 매우 영리해 보였다.

그의 경험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가 죽어 있을 동안에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속기사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아침 내내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무서운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죠.
난 정말 감정이 너무 불안해서 나의 광산 사장인 Grason씨에게 달려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말했고, 석탄을 파고 있는 곳에 와서 조사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조사를 한 것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나보고 돌아가서 일을 계속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은 전혀 없다면서 말이죠.
그는 내가 성미가 까다로워졌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나는 돌아가 일을 했고 1시간 가까이 뭔가를 계속 파내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매우 어두워졌어요.
그 때, 거대한 철문이 휙 열리더니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내가 죽었고 다른 세상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어요.
내가 모르는 뭔가에 의해 나는 그 입구로부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먼 거리를 걷고 나자 어떤 넓은 강의 강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이 떠있는 밤 정도의 그런 밝기 정도였죠.
나는 이 강둑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았어요.

곧 바로 물에서 노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룻배에 어떤 사람이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노를 저어 왔죠.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날위해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보트에 타서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 가게 될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곤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가 계속 됬어요.

나는 그에게 그가 누구이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져 있는것 같았죠.
나는 단 한마디조차도 말할 수 없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반대쪽 물가에 다다랐고
난 보트에서 내렸는데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홀로 남겨지게 되었고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내 앞을 바라보자 어두운 계곡으로 통하는 두개의 길을 보게 되었죠.
하나는 넓은 길이었는데 걷기에 잘 닦여진 것 같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좁은 길이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길이 나 있었죠.
나는 본능적으로 잘 닦여진 길을 쫓았습니다.

멀리 가진 않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죠.
가끔 빛이 먼 거리에서 섬광처럼 번뜩였지만
이런 식으로 나는 안내되어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는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불가능한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그가 무시무시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약간의 idea만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다소 닮기는 했지만 내가 보아왔던 인간들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는 키가 최소 3m는 되어 보였고 등에는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팠었던 석탄만큼이나 검었고 완전히 걸친 것이 없는 상태였죠.
그의 손에는 창이 있었는데 창자루가 무려 4.5m나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숯불처럼 빛났고
그의 이는 진주처럼 하얀색이었는데 길이가 1인치나 되는 것 같았어요.
그의 코는(그것을 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우 크고 넓고 납작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매우 거칠고 굵고 길었죠.
그것은 그의 육중한 어깨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동물원에 있는 사자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보다 훨씬 더 컸는데,
실제로 그런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그를 첨 본 것은 섬광의 번쩍임 동안이었죠.
나는 그를 보자마자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습니다.
그는 마치 창으로 날 관통시키려는 것처럼 그것을 들어 올렸습니다.
갑자기 내 몸이 굳어졌습니다.

그는 내가 여태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름끼치는 음성으로 자기를 따라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나의 여정을 인도하려고 보내진 존재였습니다.
난 따라갔습니다.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길을 걷자 한 거대한 산이 우리 앞에 높이 치솟은 채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우리 정면에 있는 부분은 거의 수직에 가까웠는데 마치 하나의 산이 반으로 잘라져 한 면이 제거된 듯한 모습이었죠.
이 수직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은 지옥이다.’

나의 guide는(저승사자라고 이해하시면 될겁니다)
이 수직벽면에 이르자 그의 창자루로 세 번의 커다란 긁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한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뒤로 확 열렸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나는 그 때 이 산을 통과했던 것과 같은 존재에 의해 안내되어졌습니다.

얼마동안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갔습니다.

나는 guide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를 쫓을 수 있었죠.
계속 걸으면서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점점 더 걸을수록 이 신음소리들은 많아졌고,
나는 또렷하게 ‘물!’ ‘물!’ ‘물!’ 이라고 울부짖는 외침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입구에 이르러 그 곳을 통과하자
나는 ‘물!’ ‘물!’ 이라고 외쳐되는 실제로 수백만명이나 되는 것 같은 비명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또 다른 거대한 문이 나의 guide가 노크를 하자 열려졌고,
나는 우리가 그 산을 통과하여
지금은 내 앞에 어떤 광활한 벌판이 놓여져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이 곳에서 나의 guide는 다른 ‘읽은자’(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오게된 영혼)들을 어떤 목적지로 데려가기 위해 날 잠시 이 널따란 벌판에 남겨 두었죠.

그 순간 처음 안내자와 다소 비슷한 존재가 내게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 대신에 거대한 검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나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말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영혼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너는 지옥에 있게 된다.’

그가 말했다.

‘널 위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너가 그 산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왔을 때,
너는 잃은자들이 그들의 불타고 있는 혀를 식히기 위해 '물'을 부르짖는 신음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소리들을 들었다.

여기서 좀 더 가게 되면 불못(the lake of fire)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것은 곧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너는 그 고통의 장소로 안내되고 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확 트인 벌판에 잠시 남겨지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너는 모든 잃은자들이 영원히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난 홀로 남겨졌습니다.

난 내가 지나쳐 왔던 무서운 공포의 결과를 아는지 모르는지 난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죠.
지루한 무기력함이 나의 온 전신을 짖눌렸고 내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나의 다리는 나의 육체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어요.
극복하려 했지만 나는 도움이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졸음이 날 제압했고, 반쯤 깨어있고 반쯤 잠이 든채로 꿈같은 것을 보게 되었죠.

내게 있는데서 훨씬 더 위인 아주 먼 거리에서 나는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적이 있는 아름다운 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벽옥으로 된 그 벽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그 먼 거리에 있는 것을 향해 손을 내뻗어 휘저으면서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어져 있는 광활한 평원을 봤습니다.
또 나는 생명수강과 유리바다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그 도성의 입구를 드나들고 있었고, 찬양을 부르고 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그 도성의 시민들 중에서 나는 나의 사랑스런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사악함 때문에 마음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죠.
그녀는 날 쳐다 보았고 자기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나를 밑으로 짖누르는 커다란 중력같은 것을 느꼈죠.

지금도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그 사랑스런 꽃들의 향기를 싣고 풍겨져 오는 것만 같고,
지금도 그때보다 훨씬 더 천사들의 달콤한 노랫가락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아요.

아무튼 난 외쳤습니다.

‘아~ 나도 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이 축복의 잔을 들이키려 하자 갑자기 그 것은 내 입에서 내던져졌습니다.
나는 선잠에서 깨어났고 이 어두운 곳에 한 내부자가 그 행복한 꿈같은 곳으로부터 나를 되돌려 놨죠.

그는 말하기를, 지금은 내가 나의 미래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길 쫓으라고 명했고 난 발걸음을 되돌리면서 다시 그 어두운 통로로 들어가 얼마동안 그 안내자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그 통로 옆으로 열려져 있는 어떤 문에 이르게 되었고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우리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는데....

아~ 어찌된 일인가!! 내 앞에는 불못(the lake of fire)이 있었습니다.

“내 눈이 볼 수 있는 한 아주 멀리까지 글자 그대로 불과 유황의 못이 있었습니다.
파도같이 거대한 불의 물결이 서로 굽이쳐 흘렀고, 커다란 화염 불길이 서로 부딪쳐 격렬한 폭풍우에 휩싸인 성난 바다의 물결처럼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습니다.
물마루를 타면서 인간들이 올라가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이 섬뜩한 불못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들이 잠깐동안 물마루를 탔을 때에 외쳐되는 하나님에 대한 저주들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고,
'물'에 대한 그들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은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거대한 불못은 읽은 영혼들의 오열과 통곡소리로 메아리 치고 메아리 쳤습니다.

곧바로 나는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있었던 그 문으로 눈길을 돌리자 이런 섬뜩한 구절이 눈에 띄였습니다.

‘이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이다. 그리고 영원은 절대로 끝이 없다.‘

이내 나는 내 발밑의 대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윽고 내가 불못에 잠기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물'에 대한 갈증이 날 사로잡았고 물을 외치면서 내 눈은 그 병원에서 뜨여졌습니다.

“나는 절대로 이런 나의 경험을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간수가 그 것을 입수해서 날 정신이 나간 놈으로 취급하여 정신병원에 가둘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난 이런 경험이 모두 지나가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성경이 말했던 것처럼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난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내가 다시 한번 지상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그 즉시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나는 크리스챤으로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지옥의 무시무시한 광경들은 나의 기억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내가 봤던 천국의 아름다운 것들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나는 나의 사랑스런 어머니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생명수 강가에 앉는 것이 허락 되어질 것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해 있는 골짜기와 언덕이 있는 그 평원을 가로질러 천사들과 함께 돌아 다닐 것입니다.

또 구원 받은 성도들의 찬양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내가 비록 감옥에 오기 전에 육체적 쾌락을 탐닉했을 지라도 지상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살다가 죽은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도 남을 것입니다.
나는 함께 범죄를 저질렀던 동료들을 버리고 형기를 마쳐 다시 자유인이 되었을 때는 좋은 사람들과 사귈 것입니다."

이 것은 여태껏 들었던 가장 놀라운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Lennox의 이 메시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길 바란다.
아~ 어떻게 사람들은 실제 그대로 불타고 있는 지옥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단지 48시간이 아닌 영원한 지옥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14.탕자의 삶 벗고 검은 대륙 선교사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장 위협적인 마사이족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한 안찬호(52) 선교사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모두 21년 동안 연단과 교육을 받았다.

고교를 중퇴한 그는 17세 때 공수부대에 자원입대해 7년 동안 복무하고 강원도 삼척시 경동탄광에서 7년간 광부로 막장 인생을 살았다. 장래가 불투명한 광부 시절에는 갱도에 들어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면서 가끔 주위 사람들과 주먹다짐까지 벌이기도 했다.

건달과 다름 없는 따라지 인생이었던 그가 사모 김정희(50)씨를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싸우다 머리가 터진 그는 경동탄광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간호사 김씨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깡패짓을 하려면 서울이나 부산에 가지,왜 탄광촌에서 행패를 부려.”

안 선교사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펑펑 울었다. 그리고 김씨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씨 주변을 탐문한 결과 동광교회 청년회 부회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길로 안씨는 교회에 출석했다. 김씨가 교회에 남아 있으면 그도 교회에 남아 허드렛일을 하면서 김시위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 선교사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김씨의 눈에 들게 됐다. 성탄절 새벽송을 돌 때 발을 헛디딘 김씨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려는 순간 안 선교사가 몸을 날려 김씨를 구하고 자신은 60m 아래로 곤두박질쳐버린 것. 김씨에게 안 선교사는 ‘흑기사’나 다름 없었다.

김씨는 열심히 기도하고 내조를 잘 하면 안 선교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재목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한 인간을 내조하자고 결심을 굳힌 김씨는 안 선교사에게 청혼을 했다. 둘은 1977년 6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지만 안 선교사의 막장생활과 음주 습관은 여전했다. 김씨는 무릎을 꿇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3년 동안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곤 “검정고시를 보고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돼라”고 안 선교사에게 제안을 했다.

안 선교사는 마침내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7년 동안 공부에 전념했다. 거처도 서울로 옮겼다. 이때 안씨 부부는 강남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에 출석하면서 김국도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안 선교사는 성령의 인도로 김 목사를 만나게 됐다고 단언했다.

감신대를 졸업한 안씨는 임마누엘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91년 3월 케냐로 파송됐다. 임마누엘교회는 안 선교사의 선교비 일체를 지원하고 있다. 마사이족을 전도하기 위해 처음 키비니 지역을 찾아간 안 선교사는 마사이족 전사(모란) 7명에게 붙잡혔다. 모란들은 창과 칼로 안 선교사를 위협하며 심문했다. 이때만 해도 안 선교사는 모란들의 말을 한 마디로 알아듣지 못했다.

“너,여기 들어오면 죽인다. 그래도 들어올래?”

“예스.”

‘노’란 대답을 기대했던 모란들은 ‘얘가 우리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여기 안 들어오겠다는 거지?”

“노.”

모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너,우리와 함께 죽을 때까지 같이 할래?”

안 선교사는 예스도 아니고,노도 아니라면 죽이겠다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발악을 했다.

“오케이. 이 ××들아,한판 붙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란들은 안 선교사의 결박을 풀어주고 마사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을 허락해줬다. 백인 선교사들이 뚫지 못한 선교의 길을 그가 뚫어낸 것이다. 안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안 선교사는 무쿠타니 지역에 첫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항상 유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죽으면 마사이 지역에 묻히겠다고 묘지도 지정해두고 마사이족과 뒹굴며 생활을 같이 했다. 하나둘씩 마사이족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안 선교사의 가르침을 따랐다. 우리의 친구 ‘안찬호’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믿어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2002년 대추장인 무사 올레 세테케리가 죽으면서 “안찬호 선교사는 우리 19개 부족민들의 대소사를 모두 꿰고 있다. 이는 우리 부족에 대한 그의 애정을 반영한 것이다. 앞으로 안 선교사를 잘 따르라”고 유언,안 선교사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엘레라이 선교본부를 중심으로 반경 50㎞ 안의 마사이족을 모두 교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안 선교사의 1차 목표다. 19개 부락에 교회 23곳을 세웠고 앞으로 2곳을 더 세울 예정이다. 교회개척 단계를 마무리하면 2단계로 초·중·고교 신·증축과 기술대학 설립을 통해 교육개혁을 단행할 방침이다. 이스라엘 키브츠 같은 집단농장 운영,주택개량사업,수도사업 등을 통해 신앙공동체 마을로 개선시키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다. 영성훈련을 받은 마사이족 선교사를 다른 지역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도 그의 비전이다.

안 선교사 부부는 풍토병이 종종 선교사의 발목을 잡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 말라리아와 브루셀라 등 풍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는 김 사모는 “해외 오지 선교사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직분”이라며 “자기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선교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선교사 부부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에 대해 무쿠타니 지역 대표 존 마말라이를 비롯한 19개 마을 대표들은 “김국도 목사가 안 선교사를 보내 동물 같은 우리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구원의 반열에 들게 했다”고 고마워했다.

안 선교사는 “김국도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서 “김 목사의 가르침과 후원이 없었다면 케냐 선교는 성공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5.저도 무당이 될 뻔 했어요

박애녹 집사님 간증 잘 보았습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무당집입니다.
할머니가 자식대에 물려줄수 없다고 무당들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산에 가서 묻고 오셨다고 합니다. 어릴적 할머니집에 가면 항상 제일 먼저 신을 모신 당앞에 드리고 저희들한테 주시고 했습니다.
저희 엄마는 결혼하고나서 교회를 다니지 못하고 할머니가 성경책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후 엄마는 예수님을 잊고 살았지요.., 우리 집안이 가면 갈수록 나빠지고 삼촌들은 서로 싸우고 집안이 엉망이되어가고 있었지요.
저희 아버지는 병에 걸려 누워계시고, 저희 엄마도 갑자기 병을 얻게 되었어요.

병원에서 수술해야 된다고 했는데 , 답답한 마음으로 엄마는 무당집에 찾아갔대요. 무당이 하는말이 신이 노하셨다고.., 할머니가 신을 버려 신이 화가 나서 그런다고 굿을 해야된대요... 엄마는 무당이 시키는대로 했고 다시 신을 모셔야된다고 해서 엄마가 내림굿을 받아서요...그것이 엄마에서 끝나야 되는데 저한테 까지 신내림이 와서 17세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계속 귀신들 한테 시달림을 받았고 눈만 감으면 귀신이 나탸나 방울을 잡고 엄아한테 가라고 하는거예요.

(엄마 스승인 무당아줌마가 그 방울은 말문을 열게 하는건데 그 방울을 잡으면 신굿을 안해도 신내림이 저절로 되는거래요.) 전 항상 꿈에 나타나 그방울을 주면 받지 안고 거절하면 도망다녔죠....6년동안 버티다가 결국 신을 받기로 했습니다. 무당이 되는것이 내팔자면 하겠다고 했지요..

그리고 이제 내인생은 끝인지 알았어요. 근대 우리 큰 언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는 교회는 무슨교회... 내가 모시는 신이 제일 높고 큰데,, 뭘 해줄수있다고..., 언니는 나한테 예수 믿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내주위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자꾸 자기네 생각들을 읽고 맞추고 그러니 무섭다고 다 떠나가고 없었습니다. 항상외롭고 힘들었고 어두움을 좋아하고 밤에만 다니고 낮에 자고....5년동안 살아온 인생은 누구도 알수없는 험하고 상처도 만이받고 지칠대로 지쳐있어서요.., 또다시 귀신이 내몸을 점령하고 발작이 일어나고, 이런 모습을 본 친구 한명이 언니한테 알려서 언니가 집에 왔어요. 딱 한번만 목사님을 만나보자고 제안하는거예요.

어차피 네가 무당할건데 한번 목사님 만나도 뭐가 문제가 되냐고 해서 언니말에 수락을 하고 언니가 다니는 교회로 갓지요.. 때마침 목사님이 계시더군요.., 근데 목사님이 깜짝놀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산기도 가서 기도하는데 자꾸 교회로 가라고 하셔서 교회로 왓는ㄷ데 저희언니가 생각나 전화를 할려고 하는데 저희가 찾아왔데요..

,전 그때 목사님의 눈을 맞주치는데 불꼿같은 아주 큰눈 두개가 나의 모든것을 파헤치고 보고있는 거예요.. 이눈이 내 가슴팍을 헤치고 다니는데 고개를 들수가 없어서요.. 너무 무서워서...그리구 심방 날짜잡구 빨리 교회를 빠져 나와습니다. 다음날 심방시간이 다가오는데 도망가야지 하고 생각해도 내 발이 떨어지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정말 이상해지요.

지금생각해보니 주님이 저를 도망못가게 붙잡고 계셔다는 것을 알았지요. 영접기도를 해야된다고 해서 따라하라고 하는데 귀신은 나를 못하게 목을 붙잡고 소리가 안나게 하는거예요..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주시면서 입술로 고백을 해야된다고 안되어도 자꾸하라고 해서 했는데 내입에서 "예수"란 단어가 나올때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 안나간다고 버티며 내몸을 꼬이게 하고 비틀게 하고 내몸이 굳어지고 완전히 말로 다 표현할수 없을 정도록 하고나서 내몸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까지 맛보지 못한 그 평안함과 기쁨은 ...., 느끼지 못한 사람은 모르겁니다. 지금은 무당이 되었던 저희엄마도 예수님을 믿고 있지요.. 대대로 내려오는 무당집은 예수님믿는 집으로 완전히 바꿔져습니다.

집사님과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귀신에게 속아 귀신을 섬기며 무당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만아요. 그들은 예수를 알지못해서 그 길로 갔겠지요.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불쌍합니다. 집사님 만은 분들이 집사님의 간증을 듣고 예수를 알고 믿어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약해질때 저는 항상 귀신들과 싸웁니다. 악한 마귀들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너무 잘알고 있어서 연얀한 자들을 쓰러뜨리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영적으로 무장하며 악한 마귀는 날마다 공격하고 잇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주세요..예배는 비행기의 몸통이고 기도와말씀은 날개라는 말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 말씀으로 무장하여서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버리고 성숙한 강자로 자라나야 합니다.
집사님 간증을 통해 만나뵈어서 너무 좋아요. 저는 33세 주부이고 딸 아이 하나 있지요. 남편집안은 기독교 집안입니다. (3대) 전 정말 행운아 이지요. 집사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확장되길 바라며 많은 분들이 영적 무장하여 악한 마귀한테 속지 안길 바랍니다. 서면으로 만나뵈어서 너무 반갑구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김숙경 성도의 간증> 

 

 

 
 

16.탈북한 김만철씨가 기도원을 세운 이야기

이북에서 넘어온 김 만철과 남해 기도웬에서 하루 밤을 잔 적이 있습니다. 김 만철이 그 곳에 기도원을 세우게 된 동기를 들었습니다.
이북에서 배를 몰고 많은 식구가 나왔기에 정착금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창 인기가 좋아서 오라는 곳에 많아 이 곳 저 곳 강연을 다니다 보니 강사비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덧 7억원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 투자할 가를 물색하고 있는 데 어느 사람이 양어장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조언하여 주었습니다. 군부대 협조를 받아 헤리콥터를 타고 양어장 할 만한 남쪽 바다를 하늘에서 정착하다가 눈에 뜨인 곳에 남해였습니다. 땅을 구입하고 설계를 하고 포크레인 기사가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포크레인 기사, 조카 그리고 자기 세 명이 있는 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을 걸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양어장을 만드는 중입니다>
<허허! 말세가 다가 오는 데 기도원을 만들지>
그리고 30분 가량 이야기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기는 30분을 대화를 나누었는 데 같이 있던 포크레인 기사와 조카는 그 할아버지를 보지 못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날로 기도원으로 바꾸어 공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강의하러 다닐 때마가 그 할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 하였습니다. 지금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김 만철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하시지 말고 천사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하십시오. 그 분은 분명히 천사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조카와 포크레인 기사가 보지 못 하였지 않습니까?>
내 말을 듣고 김 만철은 받아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천사를 보는 영안이 열린 사람이 있습니다. 
 

 

 

 
 

17.피부암에 걸린 목사가 담임목사로 청빙받다

울산 시민 교회에서 부목으로 5년간 일하던 정 순행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종관 담임 목사님을 모시고 5년간 부목으로 일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나도 담임 목사로 나가서 일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기도하던 어느 날 테니스를 치면서 몸을 보았을 때 이상한 부스럼이 생기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동네 조그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보았습니다. 피부암이었습니다. 벌써 온 몸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피부암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굴까지 이제는 완전이 병자인 것을 알아 보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심각하였습니다. 그 때 소마산 교회 목사님이 신학교 동기 동창인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 순행 목사님이 동기인데 성실하게 목회를 잘 할 터이니 한번 모셔다 설교를 들어 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유학을 떠난 후 정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온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며 암이 온 몸에 퍼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임원회가 열렸습니다.

모두가 설교는 좋은 데 암 투병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언제 돌아 가실 지 모르는 저 목사님을 모실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이제 회의가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집사님 한 분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저 목사님을 우리 담임 목사님으로 초빙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미쳤다는 듯이 집사님을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저 목사님을 모시면 우리 모두 비장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시는 목사님이시기에 한 편 한 편 설교가 비장할 것입니다. 단 한번 설교하고 돌아 가신다 하더라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건강하여도 내일 죽을 수 있고, 아파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고쳐 주실 줄 수 있습니다. 저런 암투병하는 목사님을 우리가 모시면 하나님도 너무나 기뻐하실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집사님의 제의는 회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목사님을 담임 목사님으로 초빙하였습니다. 놀란 것은 정 목사님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자기를 담임 목사로 초빙하여 준 교회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는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 잘 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같은 암 환자를 초빙하여 준 저런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좋은 담임 목사님이 오게 하시고, 모두 축복받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아름답게 기도하다가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지금 담임하고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18.가장 귀한 선물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는 동안 또 다른 한 박사가 있었다. 처음에 이들은 넷이 길을 떠났으나 알타반이라고 하는 사람은 일이 생겨서 뒤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느라 어느덧 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도착해 보니 예수님을
경베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 드릴 예물도 점점 없어져 갔다.
자신의 몸마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다보니 쇠약해 졌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가보면 이미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간 뒤 였다.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예물도, 자신의 몸도 모두 써버린 알타반은 이제 예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알타반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나 십자가에 못박힌 뒤였다.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알타반을 들어 올려 따뜻한 품에 안는 손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품이었다. 

 

 

 
 

19.세월이 지나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 (이사야 1 : 18)
암에 걸려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한 남자가 20년전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시효가 이미 지나 형벌은 불가능했다.
시즈오카현 후지시에서 28세의 은행원이 칼에 찔려 숨진채 발견된 것은 지난 78년 8월이었다. 경찰은 은행원의 수금가방이 없어진 점에 미뤄 강도살인으로 추정하고 강도 전과자 등 5천여명을 대상으로 수사를 펼쳤으나 범인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93년 8월 15년 미제 사건으로 처리됐다. 그 5년 뒤인 지난달 23일 48세의 한 남자가 경찰에 찾아와 범행을 자백했다. 남자친구 1명과 여자친구 2명 등 모두 4명이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20년이 지나서야 사실을 밝힌 이유에 대해 그는 "직장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 죽기전에 인생을 정리하고 싶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 20년간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차라리 죄값을 받았으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토록 지음받은 피조물이다. 우리가 윤리나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것을 반증한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만일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죄악이건 하나님 앞에 모든 죄악을 내려놓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20.박상욱 씨.

 

그는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도에 근무하는 군인이다.

그가 얼마나 전 가까운 해변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바다를 향해 낚시를 힘껏 던지다가 그만 손목 시계를 빠뜨리
고 말았다. 아내에게서 받은 결혼 예물이었다. 바다에서 작은 시계를 찾는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만조(滿潮)때였다.
소중한 물건을 바다에 던져버린 그의 마음은 텅빈 어망 같았다.

1년 후 우연히 그 곳으로 다시 낚시를 하러 갔다.
미끼로 쓸 성계를 잡기 위해 바위틈을 뒤지던 그는, 해초 사이에서 노랗게 반짝이는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아, 그가 잃었던 바로 그 시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기쁨은 물고기가 가득한 어망 같았다.
동료들도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시계가 현재의 시각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는 사실
이다. 1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21.탄광사고] 막장서 혼자 살아남은 여종업씨 증언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생각을 하며 버텼습니다."
지난 13일 막장 출수사고로 6백여m 지하막장에 갇혀 91시간 동안 배고픔과 추위, 암흑의 공포와 싸운 끝에 17일 오전 혼자 극적으로 구출된 여종업(32.태백시 연화동 한보3단지 318-101)씨는 "살아나온 것이 꿈만 같다"면서도 함께 살아나오지 못하고 불행을 당한 동료들의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않았다.

사고 순간을 설명해 달라.
13일 낮 12시께 동료들과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먹을 준비를 하는데 누가 "물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동료와 함께 인접한 채탄준비막장으로 대피했다.


동료 광원들이 숨지게 된 과정은. 쏟아져내린 물이 미처 기존 갱도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막장으로 차올라오기 시작하자 우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상태에서 도끼로 막장 갱목에 유언삼아 "우리 들은 모두 죽는다.
가족들에게 2억원을 주라"고 새겨놓기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났나. 물이 머리 위까지 차오르자 우리들은 모두 막장 위쪽의 갱목을 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는데, 나이가 많은 동료들은 힘이 빠져 하나둘 갱목을 놓지고 물속에 빠져들어갔다.
혼자 남은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30분 가량 더 버티니 차츰 물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이 다 빠진뒤 보니 동료들이 모두 숨져 있었다.


그동안 갱내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동료들의 시신을 모두 모아 한구석에 누이고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 누운 채 구조반이 오기를 기다 렸다.
물론 먹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갈증을 견디다 못해 안전모에 오줌 을 받아 목을 축인 것이 전부였다.
암흑 속에서 두려움이 컸을텐데. 아내와 자식 들 얼굴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특히 전에 비슷한 사고로 10시간 동안 갱에 갇혔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큰 도움이 됐다.
사고 뒤 얼마가 지났는 지도 몰랐지만 구조대가 갱도를 뚫는 소리가 희 미하게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구조 될 것을 확신했다.
여씨가 입원해 있는 근로복지공사 장성병원 관계자들은 "여씨가 허기와 추위로 탈진한 상태"라며 "호흡곤란으로 인한 부작용만 없다면 곧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것 "으로 보고 있다.
여씨는 91년 6월10일 통보광업소에 입사한 뒤 줄곧 채탄후산부로 일해 왔다. 

 

 

 

 
 

22.인생을 뒤바꾼 좌우명

 

이 사람은 누구인가.1943년 영국의 빈민가정에서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소년이다. 소년은 무명의 서커스단원이었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극빈한 가운데 지내면서도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소년은 재학중 가난과 열등의식,자격지심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성장해 1979년 헌팅턴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에게는 세가지 좌우명이 있었다.
△ 치우치지 말것
△ 최선을 다할 것
△ 순수할 것등이었다.
그는 이 좌우명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 외무부장관을 거쳐 드디어 대처의 뒤를 이은 영국의 52대 총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존 메이저 총리다. 

 

 

 
 

23.두팔없는 미술학도

두팔이 없는 소녀가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마산 여고 3학년 오 순이 양이 발가락에 붓을 끼워 그린 작품으로 홍익대 주최 제 24회 전국 고교 미술 실기 대회에서 사군자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따낸 것이다.
"잃어버린 팔대신 예술의 날개을 달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오양은 새하얀 구룸밭을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라며 고운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전국의 예비화가 9천여명이 몰려든 전통있는 대회에서 팔없는 소녀가 1등상을 따낸 것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인고의 결실이었다.
3살때 철로에서 놀다가 기차에 치어 두 팔을 잃은 오양은 발을 손으로 바꾸는 투쟁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 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 필기하는 연습에 몰두하여 4학년 부터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굽힐줄 모르는 고집과 불같은 열정은 대만 화단의 거목 리치마오 씨에게 전해져 그의 장학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천부의 재능을 개발했다.
오양은 새벽 6시 20분에 집을 나서 오후 4시에 학교가 파하면 데생학원과 회실에서 밤늦게까지 그림 공부에 몰두해왓다. 학교 성적도 상위그룹을 계속 유지했고 각종 대회에서 화려한 입상 경력도 쌓았다. 국민학교 때의 입상 경력만도 전국대회 특선 1회, 준특선 2회.
"지난 8월에는 비행기 타고 대만에 가서 리치마오 선생님과 공동 전시회도 했어요"
그림 공부를 후원해 주고 수시로 편지로 격려해 주는 이국인의 사랑을 한시도 잊지 못한다고 말하는 소녀 화가이 표정에는 한 점의 티도 없다.
헬렌켈러와 운보 김기창 화백을 존경한다는 오양의 꿈은 물론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다. 자기 보다 더 불우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성공하려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가녀린 입술을 굳게 다문다. 

 

 

 
 

24.배관섭집사 간증

1975년 12월 18일, 저는 율곡로 육교 아래서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와 식물인간이 되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만에 의식을 되찾았읍니다. 제가 눈을 떳을 땐 옆에는 늙으신 어머님과 아내 김필순집사가 저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 병원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산소호흡기를 꼿았던 사람이었다"고 수간호원이 말해 주었다.

지난 밤, 일기장에 "삶이란 희락보다는 고락이 많은 것이다 이럴바엔 차라리..."라고 적은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저는 지난 날의 삶 속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돈과 명성, 자존심에 대한 상실과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 그리고 마음 속에 싹튼 심리적 갈등과 허탈감, 공허감을 메꾸지 못해 우울증에 빠져 급기야는 정신적인 혼란이 와서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무의식 중에 차에 뛰어든게 아닌가 하는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되는 진통과 고통에 제 마음은 다시 포악해져서 이 목숨을 건져낸 어머님과 아내에게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냐?"며 눈을 부릎뜨고 원망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마른 부지깽이 마냥 뻣뻣한 산송장과 같이 되어 미움과 증오에 찬 입술로 악독을 뿜어대는 그 처참한 모습은 마치 지옥문을 찾아가는 죽음의 사자 그대로였습니다.

기독교 방송을 듣고 새 소망 찾아:
...헌신적으로 간호를 하던 아내가 채널을 맞춰 놓은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들려왔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혹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죄 많은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해답이며, 그분 만이 당신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혼란을 바로 잡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데 필요한 자격은 여러분이 죄인이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이 방송이 나오는 동안 나는 지금까지 기독교를 핍박했던 모든 합리적 이유를 열심히 꺼내 보았으며 어떤 큰 힘이 이것을 하나하나 흐물흐물 녹여 보리는듯 평안함이 나의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회개의 순간 치유의 은총이:
"미움의 찌꺼기와 뿌리조차도 모두 제거해 버리고 용서하라"는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서약한 순간, 말 못할 기쁨으로 충만해지면서 제 인생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지며 모든 한과 원한등이 주님의 피땀에 씻기어 깨끗히 잊혀져 치유되는 희열을 맞보았습니다. 그 후 죽은 자를 방불케 했던 마비되었던 제 몸은 서서히 풀려왔고 비록 흔들리는 자세지만 가까스로 걸울 수 있었으며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일망정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떨리는 몸으로 일하면서 전도:
5년여를 아내가 야쿠르트를 배달하며 벌어온 수입으로 근근히 가게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3:19)라고 하신 말씀에 가책이 되어 아직은 불편한 몸이지만 음침한 골방에서 뛰쳐나와 일터로 나갔습니다. 1982년부터 3년간은 신문 배달을 했으며 지금은 4년째 화장지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온 서울 시내를 흔들리고 떨리는 몸과 다리로 걸어서 2-3 층 상가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숨이 차고 힘들지만 저는 항상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는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지 안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때는 화장지 꾸러미를 양손과 어깨에 감고 흔들거리며 두세 시간을 헤매어도 하나도 팔리지 않을 때는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시인하여 능력을 얻습니다. "예수님" 이름만 불러도 기도가 되어, 예수님이 나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아신다고 하신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서 요즘은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호흡의 기도"를 하면서 광림의 강단과 전도지와 함께 화장지를 팔러 다닙니다. 이제는
모든 열등감과 괴로움은 사라지고 판매실적도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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