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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존(롬7:14 ~ 25)
오늘의 본문에는 인간 실존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좀더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사도 바울의 인간 실존 의식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보아온 대로 '우리가'라든가 '우리에게'라는 복수형으로 말씀을 해왔습니다.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5절)"라든가 "우리 지체 중에(5절)"라는 식으로 늘 '우리'라는 표현을 써왔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나의' '내 속사람' '내 지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닌 '나' 곧 1인칭으로 말씀합니다. 좀더 실질적이고 실존적인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게 되는 줄 압니다. 본래 이 점에서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지금 굉장히 고민스러운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의 모습이냐, 예수 믿은 다음의 모습이냐,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이 내용은 어느 쪽을 두고 말씀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인간의 모습인지, 예수 믿은 다음의 인간의 모습인지, 혹은 사도 바울 자신의 모습인지-사명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현장의 이 시간에 어찌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것인지, 어느 바울을 지칭하는 것이지, 어느 때의 바울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은 뒤의 로마서 8장에서 엄청난 은혜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8장 전에 이어진 내용들은 전부가 인간의 죄스러운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간에 있어서 그는 논리적으로, 신학적 논리를 위해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이 같은 신학적 논란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에 우리는 너무 그렇게 이론적으로 보려 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철학적으로 이해하려 할 것도 아닙니다.
성경 그대로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말씀이 다른 말씀과 잘 연결되는 말씀이냐 아니냐, 논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 빠져들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보면서 그대로 이해를 하기로 든다면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좀더 깊은 세계의 진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이 내용은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시간의 자기 모습인 동시에 그리스도인 된 영원한 모습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는 계속해서 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과 함께 그는 계속적으로 은혜의 세계를 찬양하게 됩니다. 고통은 언제나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사실 이상'이라고도 하고 사실을 부정하려고도 합니다. 진실한 자기 모습을 찾을 때까지는 인간은 결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이 진실은 곧 겸손으로 통합니다. 겸손이라고 하지만 뭘 더 낮추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가 사실이니까요. 진실과 겸손이 하나로 만나는 그러한 정직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적 고통이 있습니다. 이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성적 고통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동물적인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 된 고통이 있습니다. 믿기 전에는 믿기 전대로 이겠지만 믿는 사람으로서의 고통이 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일을 생각하려고 할 때에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좀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괴로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신경을 많이 쓰면 병에 걸린다고 해서 흔히 의사들은 환자를 보면 신경을 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이시형 박사가 쓴「신경성 클리닉」이라고 하는 책에 보니, 사람은 대체로 신경을 쓰지 말아야 병을 이길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써야 할 신경은 써야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어느 기업체의 자수성가한 회장님이 칠순 넘어 까지 사업을 계속하면서 회사를 돌아보느라고 얼마나 머리를 많이 썼던지 몸이 좋지 않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절대로 신경 쓰면 안됩니다. 신경 쓰면 죽습니다"해요. 그래 주변사람들이 '신경 다 끄시고 쉬시라'면서 경주 호텔로 휴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경주를 가놓고 비가 오니까 당장에 걱정을 합니다. "창고 단속 잘해야 되는데…"하며 무심결에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다가 "아 참,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하면서 수화기를 도로 놓아버렸어요. 창고가 물에 잠기건 말건 신경 안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꿈에도 그 창고가 마음에 걸려서 도무지 못 견디는 거예요. 그렇게 괴로워하던 이 회장님, 생각다못해 이시형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의사가 나보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도무지 그렇게 안되네요.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박사는 "당신은 예외입니다. 다시 회사에 나가세요"하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래서 회장님이 며칠 후에 나가보니까 회사가 엉망이에요. 그래 사람을 불러놓고 왜 이렇게 했느냐, 하고 실컷 잔소리를 했는데, 그랬더니 어느 결에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신경을 안 써야 된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써야 할 신경은 써야 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멍청하게 생각 안 한다고만 해서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보세요. 인간입니다.
인간 실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민해야 할 것을 열심히 고민해야 됩니다. 그래야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은 신경 쓰지 말되 신경 써야 할 것은 열심히 써야 합니다.
이런 신학적인 이론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죄의식에 민감합니다. 청교도 신학을 보면 저들은 경건주의자이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지적합니다. 이것 하지 말아야 되고, 저것 하지 말아야 되고… 많은 신경을 쓰게 합니다. 그러나 죄의식이 강하다고 해서 병든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건강하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써야 할 신경은 많이 써야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지옥에 갈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돈 잃어버릴까, 창고가 물에 잠길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해야 할 걱정은 많이 해야 되고, 고민해야 될 고민은 많이 해야 됩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은 말입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내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다보면 바울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많은 존경심이 갑니다. 왜냐하면 그 솔직함과 진실함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 싶지만 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순교하고 영영 로마에 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편지로 그의 메시지를 대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사도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직접 가서 교회를 세워야 하겠지만 먼저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로마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은 것은 바울로 인한 것이요, 바울 선생님이 이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렇게 말씀했습니다, 하고 '선전'을 해놓았어요. 그래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을 정말 천사와 같이 위대한 사도로 높이 존경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의 얼굴을 보고 싶어해요. 그 위대한 바울을 만나고 싶어해요. 바로 이 사람들에게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좋은 얘기를 쓸 것인지, 추한 자기 모습을 쓸 것은 무엇입니까? 꼭 이래야만 진실입니까? 이래야만 정직한 것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썼습니다. 자기의 나약한 모습, 자기의 실존적인 모습을 조금도 가감 없이 그대로 다 노출시켰어요. 그대로 편지에 쓰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의 정직함과 그의 솔직함에 대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한, 그리고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고민해야 될 일을 많이 고민하면 고민 안 해야 될 고민은 안 하게 됩니다. 큰 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작은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어요.
간혹 우리가 큰 사고가 터졌고, 얼마가 죽었고, 얼마나 손해나고… 라며 걱정합니다.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 생명에 대한, 내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문제입니다. 실존적 고민입니다. 최대의 고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답니다.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 자꾸 따라다니면서 자기를 괴롭히더랍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데에도 따라와서 괴롭히고, 어디 가서 강연을 하자니 그 앞에 서서 괴롭히고, 일거수일투족마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괴롭힙니다. 마침내는 그의 결혼식장까지 쫓아와서는 신랑 신부 사이에 서 가지고 괴롭힙니다. 너무 기막히고 화가 난 나머지 그는 "넌 누구냐?"하면서 그 괴물이 쓰고 있는 가면을 확 벗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가면 속의 얼굴은 바로 자기 얼굴이더랍니다. 여러분, 나를 괴롭히는 것은 항상 나 자신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그 무엇도 아닙니다. 바로 이 고민을 할 줄 알아야, 이것을 괴로워할 줄 알아야 바른 신앙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마치 책장을 넘기듯이 차례차례 자기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5~20절)." 원하는 나와 행하는 나가 따로 있다 함입니다. 인간 지식의 불 완전성을 말씀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아는 바' '원하는 바' '행하는 바' 그리고 '죄에 팔렸다'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죄에 팔려간 사람이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원하는 바는 행할 수 없다, 함입니다. 자, 내가 무엇엔가 팔려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속에서 이미 지은 죄가 또 죄를 지어요. 그것은 내가 몰라요 그런데 간간이 내 모습을 내가 발견하게 돼요. 그러면 깜짝 놀라요.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어디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고 본즉 원하는 일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일만 계속하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러한 자기 모습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 15절이나 18절에서도 계속 말씀합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모른다. 나는 죄에 팔렸다'-그러니까 몸만 팔린 게 아니예요. 의식도 팔렸어요. 기억력이 팔렸어요. 생각하는 능력도 죄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고로 죄를 죄로 볼 줄도 몰라요.
어떤 때에는 죄를 지어놓고 그 다음에야 알아요. 그리고 깜짝 놀라요.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여러분, 혹 어떤 때에 벌컥 화를 낼 때가 있습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속에 또 하나의 내가 있으니까요. 그런 병리적인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순간에 그런 좋지 못한 자기 모습을 볼 때에 나도 실망하고, 다른 사람도 그것 하나만 딱 보고 사람을 평가해버립니다. 그러한 평가기준은, 그러한 평가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을 보세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내가 죄를 지었다, 그런데 나도 몰랐다, 무의식중에 죄를 지었다, 이제 내가 알았다, 그런데 바로잡으려고 해도 원하는 바는 있는데 행하는 바는 없다 함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죄로 깨닫는 혹은 미리 아는 그런 지혜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이제 깨달았어요, 이게 죄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이 죄에서 빠져 나올 힘이 없어요, 원함은 있는데 생각뿐이고 행함은 없어요, 그 죄의 고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능력이 나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 나약성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주인 없는 행위, 의식 없는 행위, 그냥 끌려가는 자기 모습을 그는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 생각 있게 말한 것입니까? 바로 몇 시간 전에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큰소리 꽝 치지 않았습니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그마한 핍박이 닥쳐오니까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모릅니다' 부인하고, 맹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해버렸어요. 그 순간은 아무 것도 몰랐어요. 다만 살아야겠다고 생각,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아마도 처자식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지요. 어쨌든 베드로는 그 한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까지 해버렸어요. 그 다음 순간에 닭이 '꼬끼오'하고 웁니다. 그제야 깜짝 놀랐어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하시던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머리를 탁 칩니다. 정신이 없어요. 그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통회자복합니다. 보세요. 그가 예수를 모른다고 했을 때, 그것이 자기 의지로 한 것입니까? 결코 자기 마음이 아니었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이제 깨달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후회스럽고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한평생 부끄러운 거예요. 자기도 몰랐어요. 내가 이런 놈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몰랐어요.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알았겠습니까? 깨어 기도했어야 알았지요. 기도하지 않는 자기 자신, 몰라요. 물론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없어요.
또 한 사람, 모세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능력의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붙드신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겠다고 덤벼들 때에 그는 어느 결에 혈기를 부리고 맙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옛날에 애굽사람 때려죽이던 솜씨가 나온 것이라고요. 그것은 부름 받기 전의 모습이에요. 사명을 받기 전에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이라고 지칭을 받으면서 귀족이라고 큰소리 떵떵 치던 모습이에요. 그 때의 그 혈기 있던 모습이 지금 쏙 나오는 거예요. 그래 모세는 그대로 저주를 해버립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언제 자기가 물을 낸 일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반석을 꽝꽝 하고 두 번 치지 않습니까? 이 무슨 경거망동이에요?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 그 다음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마는, 모세가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아마 통회하여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내 속에 이따위 인간이 들어가 있구나, 이런 못된 것이 들어가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몰랐어요.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알아서 잘 다스려야 했는데 40년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니 이만하면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때에 보니까 그 속에 형편없는 못된 것이 들어가 있다가 불쑥 나와서 그만 있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보세요. 이게 스스로 알고 한 일입니까?
또 그 유명한 다윗이 범죄합니다. 범죄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삼하 12:9)"-네가 밧세바를 데려온 것도 잘못이지만 또 그 남편은 왜 죽였느냐, 그것입니다. 그것도 다윗은 간사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완전범죄를 하려고 했어요. 이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었습니까? 얼마나 악한 행동이예요? 그 시간에 그는 정신이 없었어요. 자기 마음이 아니었어요. 나단 선지의 책망을 받고야 그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는 시편에 보면 아주 냉정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제가 다윗의 이 참회를 볼 때마다 크게 느끼는 것인즉 그는 전혀 상황에 대하여 불평하는 법이 없고, 특별히 밧세바를 원망하는 일이 없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할뿐이라는 점입니다. 특별히 "어머니가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나이다"합니다. 어머니가 부정해서 자기를 낳았다는 뜻은 아니예요. 날 때부터 나는 죄인입니다, 본질적으로 나는 죄인이었습니다-이 고백입니다. 이렇게까지 무서운 죄가 내 속에 항상 있을 줄 몰랐어요. 이제 깨달았어요.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지었고 이제야 깨달았지만, 깨닫는 이 순간에도 죄로부터 Exodus, 출애굽할 용기가 없어요. 힘이 없어요.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다-이것이 자기 모습입니다. 진실한 자기 모습입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불가능해요. 이런 깊은 자기의 죄를 그대로 내놓고 있습니다.
병에도 별의별 병이 다 있습니다. '운동 실조'라고, '로코모트라팍시스'라는 긴 이름의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어떠냐 하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반대로 작용한답니다. 어떤 화가가 이 병에 걸렸는데 흰 물감을 칠하려고 하면 검은 물감이 칠해지고, 선을 그으려고 하면 점을 찍게 되고… 자꾸 반대로 되는 거예요. 마음은 있는데 행동은 달리 되는 거예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화가는 그림을 잠시 중단했다고 합니다. 자, 이런 '운동 실조'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마음에 원하는 바가 있는데 원하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고 꼭 반대로만 행동을 해요. 가만히 보면 그런 게 우리 주위에도 많지요.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효도해야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뭐라고 하기만 하면 일부러 꼭 반대로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못됐지요.
가라면 오고 오라면 가고, 꼭 청개구리같아요. 이것이 운동 실조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바는 있는데 어쩌면 꼭 원하는 것과 반대로만 되고, 그렇게만 행동이 가는 거예요. 아주 모순된 인간이지요. 병든 탓이에요. 이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포로된 나, 나는 포로되었다함입니다. 그리고 악이 함께 있다 함입니다. 처방 없는 대책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여섯 가지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먼저는 '알지 못하는 나'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15절)"--아주 행동이 제한됐고, 뿐만 아니라 의식도, 판단의식도 이미 죄에 팔려버렸어요. 죄에 팔려버린, 알지 못하는, 도대체 나도 누구도 모르는 이러한 죄에 노예된 하나의 인간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18절)"-'원하는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한 가닥 정신을 차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아이쿠, 잘못됐구나. 이게 아닌데' 합니다. 그건 누굽니까? 의식 없는 내가 있는가 하면 의식 있는 내가 있어요. 가끔가끔 '이건 잘못됐구나.
내가 바라는 게 본래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소원뿐인 나-그런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있어요.
세 번째 모습은 '모순적인 나'입니다. 원함은 있으면서도 행함은 없는 나-어느 사이에 이것이 체질이 되어버렸어요. 이것이 참 무서운 병입니다. 원하면 행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그냥 둬요. 그리고는 가끔 재미있는 변명을 해요. 무슨 일 하다가 좀 잘못되면 '인간인고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해요. 여러분, '마음에는 원이로되…'하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하신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약하도다(마 26:41)"하신 것은 마음에는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심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복음이요. 은혜요,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베드로가 이 말을 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도 잠시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하실 때에 베드로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요'하고 대답했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라는 것은 할 사람이 따로 있고 들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경우가 달라요. 그 말은 우리가 할 말이 못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어디서 이상한 전화나 기분 나쁜 전화만 받아도 잠이 안 오지요? 돈 몇십만 원만 잃어버려도 그래요. 어떤 사람은 어디 가서 물건을 샀는데 조금 비싸게 샀어요. 그게 억울하고 분해서 도대체 잠이 안 와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와요. 이 모순적인 나를 한번 보세요.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는, 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요. 실천할 생각도 안해요. 늘상 성경은 배워요. 그리고 깨닫는다고는 하지만 그저 '본래 그런 것 아니야? 어떻게 다 하나, 할 수가 없잖나?'해요. 실천해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러한 기형적, 병리적 인간이 있다고 말씀입니다.
네 번째로 생각할 것은 '깨달은 나'입니다. 여기에 인간 실존이 있습니다. 깊이 깨달았어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21절)"-내가 하나의 원리를 깨달았어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합니다. 또 그 다음에 보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싸웠어요. 그런데 내가졌어요. 그래서 그만 노예로 끌려가고 있어요. 그래서 원치 않은 일을 하면서 질질 끌려가고 있어요. 그렇게 후회하고 항상 '그러면 안된다' 하면서 계속 끌려가는 자기 모습, 싸워서, 져서,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끌려가는 자기 모습을 사도 바울은 보고 있어요. 깨달았어요. 이게 내 모습이다, 이것이 나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깨달음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존 파악이에요. '함께 있다' 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내가 의를 행하려고 할 때에 불의가 함께 있고,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에 악이 함께 있어요. 어떤 경우에도 나와 또다른 나의 모습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시고 어떤 의미에서는 경건의 절정에서 마귀를 만납니다. 거기에도 마귀가 있었어요. 겟세마네 동산에도 마귀가 있었어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어요. 언제든지 악이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악과는 관계없는, 아주 싹 끊어진 별스러운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러해야 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자, 악이 함께 있어요. 항상 긴장관계에 있어요. 항상 싸우는 가운데 있어요. 그런 가운데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전쟁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를 의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주께 기도하고, 그렇기 때문에 주 앞에 정직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니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간절하게 말씀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자기 모습을 객관시하는 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뭐니뭐니해도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는 자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헬라어로 '타라이폴로스 에고 안드로프스'라고 합니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에 앞으로 목사 되겠다고 공부하면서도 참 고민도 많았어요. 고학을 하느라 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속에 실존적인 고민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제가 공부하는 책상 앞에 3년 내내 써붙여놓았던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타라이폴로스 에고 안드로프스'-헬라어로 크게 써놓았어요. 가끔 친구들이 왔다가 저게 뭐냐고 물으면 "무식하기는"하고는 안가르쳐줬어요. 아는 사람은 몇 사람 알지만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이 말씀의 뜻은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이에요. 그 처절한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지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무슨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하지 마세요. 넘어져요. 일어섰다 생각하면 넘어져요. 비참한 자기 모습을 똑바로 볼 줄 아는, 바로 거기에 정직함이 있고, 진실이 있고, 겸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로자끼 목사님은 '육의 사람이 마지막 부르짖는 소리다'라고 말했고, 칼 바르트는 '드디어 우리는 종교의 실체를 보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무라다 목사님은 '이는 율법 아래 있는 개인의 고민인 동시에 역사 그 자체의 모습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이 말씀은 인간 실존의 현주소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가장 정직하고 가장 똑똑한 자기 표현입니다. 혹은 자기관입니다. 나는 나를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나, 그 시각을 잊어서는 안돼요. 자기를 객관시하는 의식을 잃어버리면 존재 의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내 비참한 모습은 내가 압니다. 항상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오늘의 성경으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여섯 번째의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입니다.
예수가 있어서 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내 모습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여기에서 돌연 이렇듯 비약을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비참한 모습이 있기 때문에 주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이 은혜를 입고 있어요. 이렇듯 형편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구제불능한 인간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고, 약속을 받고 있어요. 이렇게 자기의 모습을 진실하게 인정할 때에 '감사하리로다. 찬양하리로다'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항상 내 모습을 똑바로 봅시다. 그러면 아무런 할말이 없습니다. 교만할 근거가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인간 실존에 대한 바른 고민을 해봅시다.
깊이 고민해보세요. 그러면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하리로다'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인간 실존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이대로가 내 모습이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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