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찾으시는 하나님// 20001203 주일 낮예배
2001-12-08 17:55:55 read : 417
누가복음 15장 1-7절
어떤 목사님이 한 사진 전시회에 초청되어 갔습니다.
그 전시회에 전시된 사진에는 도시민들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진은 사람들이 복권을 동전으로 긁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었지만 복권을 긁는 그때만은 표정이 환했는데,
그 환한 표정에 오히려 절망감이 있음을 느끼고 목사님 마음이 착잡해지면서,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개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은 마음이 허전하고 어딘가 기댈 곳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따스함을 전해주는 좋은 손님처럼
주님이 우리의 외로운 마음을 구유 삼아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니까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우리의 연말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연말을 풍성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마음이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제일 정감이 가고 사귀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성공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불안과 불평이 없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도 나의 죄에 비하면 과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겸손한 사람들이 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이 비유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나 한 사람도 깊은 관심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목자는 100마리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99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99마리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1마리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우리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2시에 은혜를 잃어버린 꿈을 꾸었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열심히 은혜를 찾으러 다녔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에 나오는 뒷동산을 찾아보라는 영감을 주셨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은혜를 찾아 꼭 껴안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런 심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우리를 찾아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처럼 성육신에는 사람을 좋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정말로 깊이 알려면 사람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을수록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하면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어떤 분은 사람을 편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육신의 정신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자는 어떤 배우자일까요?
배우자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편하게 해 주는 배우자가 최고입니다.
어떤 분이 남편을 내조하면서 수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난 얼굴로 남편을 대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여러분! 화난 얼굴로 배우자를 대하지 마시고, 자녀를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야단 맞았다고 가정에 와서 인상쓰면 되겠습니까?
직장에서 사장한테 야단맞아도 집에 와서는 미소지을 수 있는 분이
믿음대로, 그리고 하늘의 이치대로 살고자 하는 소중한 분입니다.
이런 화목의 원리로 살면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행복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우리는 사람과 잘 지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뭘까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뭘까요? 역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것이 뭘까요? 역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면 귀함, 아름다움, 위대함을 다 잃게 됩니다.
자세히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합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고, 인간관계를 하면서 결론을 내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나쁘다"고 하도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만나보면 듣던 것보다 그 사람은 훨씬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떤 분은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예의 없고, 인상 나쁘고, 말투가 거칠고...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나보니 성격은 강했지만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분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듣던 것 이상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면서 점차 사람은 행복을 느낍니다.
천하를 얻고도 사람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사람을 무시하면 절대로 인간의 가치가 없습니다.
무슨 인격, 무슨 인격 해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 이상의 인격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이치이고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진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관심 중의 관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쉰들러 리스트를 보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유대인 대표가 쉰들러에게 반지를 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잘 믿는 사람들이고,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2. 참 사랑이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본문의 목자는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쯤이야."라고 생각하지 않고 찾습니다.
이 양이 100마리 중에서 이탈한 것을 보니까 순하지 않은 양일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찾습니다. 남을 시켜 찾을 수도 있지만 본인이 직접 찾아다닙니다.
이처럼 참 사랑은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목자는 찾고 또 찾습니다. 찾는 열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찾습니까?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우리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 행사나 교회 행사에서 제일 즐거운 때가 언제입니까?
보물찾기를 할 때입니다. 그 시간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보물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찾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말 잘 찾습니다.
눈이 좋아서 잘 찾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열정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찾는 것에 보물찾기와 같은 열정을 가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태국 산악지역에 바나나를 숭배하는 한 종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싱싱한 바나나 잎을 이용해 있을 곳을 마련해 사는데,
잎사귀가 마르면 새로운 거처를 찾아 매번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선교사가 그 종족을 전도할 목표를 세우고 그들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그들이 거처를 찾았는데 그들은 어느새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찾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그들이 있었던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곳에서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 종족을 찾아 한 선교사가 40년간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그 종족을 발견해서 그 곳에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종족의 이름이 피똥누아 족속이라고 합니다.
전도나 목회를 하다 보면 이 피똥누아 족속같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너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추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영적인 의미로 그의 처지와 입장을 살피고 끝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야 그 사랑이 오래 갑니다.
어떤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새벽에 설교를 하는데
부목사가 앞에서 인상을 찡그리면서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합니다.
그리고 옆을 쳐다보기도 하고 하니까 담임목사님이 설교를 못하겠습니다.
어린애가 떠들고 예배를 방해를 해도 까딱하지 않던 목사님이고,
웬만한 사람이 다리를 꼬고 비웃듯이 설교를 평가하는 것 같아도
눈 하나 까딱 하지 않고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던 목사님인데
부목사가 예배 중에 정자세로 있지 않고 신경을 거슬리는 행동을 하니까
자꾸 말씀의 초점이 흐려지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더 설교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약이 오르고, 강단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어디 두고 보자!"는 생각을 하며 설교를 죽쑤고 끝냈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내려가서 부목사를 만나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그래도 마지막 소리 지르기 전에 엄청난 절제력으로 한번만 참고 묻습니다.
"김 목사님!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러면서 막 퍼부으려고 하는데
"예! 목사님! 어제 저녁 11시에 저의 여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밤새워 일을 처리하다가 한숨도 못 잤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그 순간 담임목사님은 속으로 부목사님에게 아주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화를 내지 않은 자신에 대해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고,
부목사님의 예배 자세에 대해서 오해했던 모든 오해가 순식간에 풀렸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그 담임목사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항상 남의 입장을 한번 더 들어보고 한번 더 이해해 보자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란 단순히 예수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
그처럼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포기하지 않고 찾는 것이 전도입니다.
3. 사람을 찾는 길로 가고 잃는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어렵게 하나님을 품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사람을 찾는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잃게 하는 길로 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면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아직 전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의 심각함을 모릅니다.
단순히 교회부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전도의 어려움도 겪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품을 찾은 영혼인데 그 품에서 밀어냅니까?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 줄 모르고 너무 자연스럽게 밀어냅니다.
어떤 홀로 된 권사님이 외아들과 함께 사는데 아들이 고 3이 되자
"대학에 가서 두 배로 교회를 다녀도 되니까 그냥 공부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할 일입니까? 그 죄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찾았는데, 어떻게 그를 그렇게 실족시킵니까?
자기 외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를 그렇게 실족시킵니까?
결국 이 아들이 교회를 잘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공부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하니까 공부가 더 안되고 결국 낙방했습니다.
마음이 힘드니까 술을 마셨는데,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욕을 해댔습니다.
듣기 싫다고 집을 뛰쳐나와 술 먹고 무단횡단 하다가 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장례식 날 이 권사님은 자기가 아들을 죽였다고 목사님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면 아들에게 그게 할 일입니까?
우리는 사람이 진짜로 사는 길과 가짜로 사는 길을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영혼이 사는 길, 남의 영혼을 살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 이전에 오늘날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으로 그것은 전도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너무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서 주위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별일 아닌 것으로 너무 잘 실족당해서 사람을 실망시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옳은 말씀인데도 쉽게 그 말씀에 실족하면 됩니까?
하나님 말씀과 진리까지 자신의 감정의 판단력과 수준보다 낮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실족시키지도 말고, 너무 쉽게 실족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점을 찾기보다 장점을 찾아 잃은 자를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서로의 연약함을 알고 서로 축복기도를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풀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래서 약점을 찾으면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연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상처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약점을 덮어주고 감정을 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여자분이 부부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부가 대화가 너무 부족하다. 남편과 장단점을 다 나누어라."
그분이 집에 와서 남편에게 서로 부족한 점을 다 나눠보자고 했습니다.
남편이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아내 입에서 남편의 단점이 쏜살같이 나옵니다.
"당신은 먹을 때 호르륵 호르륵 소리를 내고 먹는데
이제 주위 사람도 생각해서 앞으로는 좀 교양 있게 좀 드세요."
그렇게 한방 먹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손을 턱에 대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한참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얼굴을 보는데 남편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옛날 연애하던 시절의 멋있는 남편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참 있다가 남편이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누가 이긴 것입니까? 사실상 남편이 케이오로 이긴 것입니다.
지적하려면 한두 개 있겠어요? 한도 끝도 없습니다.
백화점 가서 바가지 쓴 것, 가스 안 잠그는 것, 집 열쇠 잃어버리는 것,
어디서 자동차 들이받고 온 것, 자동차 안에 열쇠를 놓고 잠근 것
지적할 것이 많지만 말을 안합니다.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
이런 자세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랑이 넘치는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실족시키는 길, 잃게 하는 길, 무너뜨리는 길을 외면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 찾는 길, 세워 주는 길, 덮어주는 길로 가야 합니다.
4.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목자가 즐거워하면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십시오.
양 한 마리 찾았다고 양 몇 마리 값이 드는 잔치를 벌입니다.
이 장면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기쁨을 잘 표현합니다.
아마 죄인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도전을 받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서 기쁘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 간판, 지위, 일 모든 것이 복음 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의 필요만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큰 뜻을 생각하고 전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성전 하나 짓는 것보다 낫다."
그렇다면 전도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유행하는 그런 물량적인 전도 말고, 정말 영혼 구하는 것!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영혼 구원에 삶의 최우선의 목적을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지금도 찾으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구원의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우리가 성공하려는 것도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기 위한 성공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스탈린 시대의 보리스 콘펠트라는 젊은 유대 의사가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용되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보조 의사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전도 받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증거자로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용소에 한 죄수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차마 볼 수 없어서 수용소 법을 어기고 그를 수술해 살립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처형당하기 전날 간수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후회가 없는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펼친 삶과 사랑은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이 유명한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런 사랑의 전파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힘과 기술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나를 써 주소서!"라고 말하면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의미 있게 사용되어야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며 살 때 그 의미가 주어집니다.
미우라 아야꼬라는 유명한 일본 여류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척추에 결핵균이 침투하는 병에 걸린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항상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주요 기도제목도 "하나님! 저를 고쳐주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 병약한 몸이지만 그래도 저를 써 주옵소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요 기도도 "나를 써 주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힘과 우리의 삶의 의미가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소중하게 부각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원에 합당한 삶이 되기를 바라고,
특히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최선의 관심을 두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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