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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평화의 길! (눅 19:41-44)

by 【고동엽】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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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평화의 길! (눅 19:41-44)

 

'허클베리핀의 모험'이라든가 우 리가 잘 아는 '톰소여의 모험', 이런 소설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유머가 남다 르고 또
독설도 구사하는데 아주 재 주가 많고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쓴 작은 기도의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이것은 'War Prayer'라 고 하는 것인데, 전쟁의 기도입니다. '전쟁의 기도'
라는 제목으로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악한 심성을 그대로 노출 시
켜 서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나는 고 하니 성 프랜
시스의 '평화의 기 도', 그거와 정반대의 기도라고 하 는 그런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
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가운데 보면 여러분 아시는 대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총 주제입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또 사랑 받
기보다는 사랑하고 그런 사람으로 살고 나를 평화의 도구로 그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서 내
가 희 생되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 주세요.'하는 그런 내용의 기도요 유명한 평화를
위한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전쟁의 기도는 어떠 냐. 꼭 반대로 이루어지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우리의 포탄이 저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반죽을 만들어 버리
게 해주십시오.' 이게 전쟁에 나가는 모습이요. '웃 음꽃이 피었던 이 들판에 애국자들 의
싸늘한 시체로 꽉꽉 메우게 하여 주십시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과부들
의 심장을 슬픔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그들의 희망을 고갈시켜 주시 고 그들
의 모습을 시들게 하여 주옵 소서.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이런 심정을 가집 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죽 이면 살인죄가 되겠으니 못하지. 아주 자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주변의 귀찮은
사람들 싹 쓸었으면 좋겠다.' 또 어떤 사람들 보니까 우 리 북한을 향해서도 '저 북한의 못
된 놈들 그냥 쾅하고 없어졌으면 좋 겠다.' 또 북한에서는 '남쪽 사람들 도 빨리, 아주 깨끗
하게 말살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어요.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이 내 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역작용 을 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망하 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전쟁철학입니다. 남이 망해야
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 고, 내 눈에 거슬리는 이 사람들이 다 빨리 없어져야 그래야
세상이 바 로 될 거라고, 그리고 평화가 올 거 라고 혹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
것이 오늘 이 시에 나타난 마음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
스라고 하 는 의미의 평화가 있습니다. 영어 의 Peace라는 말이 라틴어의 팍스 에서 온 것
입니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중요합니다. 로마식 평화, 또 하나는 히브리
식 평화! 이것이 다릅니다. 그러면 로마식 평화가 뭐냐하면은 힘의 철 학입니다. 승리가 평
화요, 전쟁과 억압과 수탈과 착취로 다 죽여버려 서 평안해요. 전쟁에 나가서 상대 방을 다
죽여버려야 그래야 평화가 있다. 아니면 전부 죽여버린 상태 에서, 전부 그 신분을 낮추고
죽은 자처럼 만들어요. 세상을 공동묘지 같이 고요하게 만들어요. 그 억압 속에 아무도 말을
못해요. 아무 저 항도 없어요. 이것을 노예적 평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것 같 은데
그건 조용한 게 아니에요. 죽 은 듯이 조용하지요. 그건 조용한 게 아니에요.
가정도 보니까요 어떤 남편은 아 주 이 팍스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저 뭐 쾅쾅
큰소리 쳐 가 지고 그 마누라는 벌벌 기어요. 시 퍼렇게 되어 가지고 아이들까지 도…… 아
무 소리도 못해요. 조용 해요. 물론 이혼도 없어요. 싸움도 없어요. 우리 집은 평안하다. 여
러 분 이게 평화입니까? 이런 식의 팍 스 로마나 타입의 평화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이 많아요. 팍스의, 이 평화의 개념이 문제입니다. 도 대체 무엇을 평화로 생각하느냐 하 는
것이고,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로
마사람들 의 팍스 철학에 이런 말도 있습니 다. '분열시켜 통치하라. 고요하 게 하라. 누구
도 말을 못하게 하 라.' 그래서 옛날에 노예는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말하는 게 귀찮 아
요.
"시끄러!"
그러니까 결국은 듣기만 하지 말을 못해요. 하루 일 년 내내 하루도 말을 못하니까 말을 배
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짐승처럼
"우우우……"
이렇게 했다고 그래 요. 그리고 우리 집은 평안하다. 이게 평화입니까? 이런 사람들 때 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거예요. 이 렇게 믿는 팍스 로마나의 철학을 가 지고 있는 사람 때문에 문
제입니다. 오늘도 조용한 것 같으나 조용한 게 아닙니다. 평화로운 것 같으나 평 화가 아닙
니다. 참 평화의 길이 어 디에 있습니까?
원래 이 히브리식의 평화라는 것 은 '에리레네'라고도 하고 히브리말 로는 '샬롬' 그럽니다.
이 샬롬의 뿌리는 하나님이 평화의 왕이십니 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 로 될 때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 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는 하 나님의 자녀, 그래서 형제가 되
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이웃을 형 제로 그리고 모든
자연과 역사는 하 나님의 품과 같이 넓은 가슴처럼 생 각해요.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 니
까 영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 인 것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통 합해서 이것을 샬롬
이라고 말합니 다. 그야말로 가장 완전한 평화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우리에게 내리시 는 평
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팍스라고 하는 건 인간적 방법이요, 샬롬은 하나님이 이루시 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큰 뿌리가 다른 것입니다. 팍스는 평화인 것 같으나 평화는 아닙니다. 그건 거 짓말입니다.
얼마 전에 러시아의 주교한 사 람, 신학대학 총장 되는 분을 제가 초청을 해서 3부 예배 때
에 여기서 인사를 했는데 2부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못 보셨을 겁니다. 제가 한 번 인사소
개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만찬 을 같이 하면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 습니다. 제가 가벼운 말로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러시아에 갈 때마 다 이상한 게 하
나있다고 우리 서울 에 뭐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은 밤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지붕 위에
빨간 십자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러시아에 가서 여러 도시들을 가보 면요 모스크바를 비
롯해서 어느 도 시에든지 얼마나 교회가 많습니까! 얼마나 또 교회가 굉장합니까! 우 리나
라의 교회는 이건 거기에 대하 면 창고지요. 얼마나 훌륭하게 지 었습니까! 지붕을 금으로,
몇 톤씩 해서 금으로 다 씌어 놓고 그 돌기 둥과 그 화려한 교회 건물들을 볼 때 굉장해요.
도대체 이렇게 해 놓 고 어떻게 공산주의를 했을까, 이렇 게 교회가 많은 이 도시에서 어떻
게 공산주의를 했나! 내 이게 마음이 뭔가 도대체 이상해서 한마디 물어 본다고
"주교 당신 그것 좀 대답해 보시요."
그랬더니 이 분이 뭐라고 하신 지 아십니까? 어떻게 당신 나 라 같은 기독교 국가가 공산주
의를 영접해 가지고 본인들도 고생을 했 고, 온 세계를 뒤흔들어 가지고 시 끄럽게 했느냐?
했더니 그분 하는 말이
"속았지요……"
속았다는 겁 니다. 그런데 속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때는 늦었더래요. 꼼짝 못하 고 70년을
고생했다 그래요. 오늘 까지도…… 그게 뭐냐? 칼 막스와 레닌, 스탈린 이런 사람들이 평화
를 약속했어요. 프롤레타리아의 평화, 무산 대중의 평화, 모든 사람에게 평등과 평화를 준다
는 거죠. 그걸 믿었어요. 믿고 따라가다 보니까 아니더래요. 뭐 잠깐 혁명 좀 해서 몇 사람
죽인 것 같지만 그저 되겠 지 했더니 갈수록 태산이요. 점점 숙청하는데 일년에 백 만 명을
숙청 을 한대요. 끝도 없는 거예요. 결 국은 인간 지옥을 만들었어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오늘도 많 은 사람이 평화를 약속해요. 그 평 화는 가짜예요. 미래가
어떻고 잘 될 거라고 누구의 말도 믿어 볼 것 이 못돼요. 혁명을 통해서 평화는 없어요. 나
의 적을 죽여버린다고 해서 평화가 없어요. 말썽꾸러기를 숙청한다고 해서 거기에 평화는
없 습니다. 다 없애 버리면 될 거라는 그 철학은 팍스 로마나 에요. 폭력 과 억압과 공포의
정치. 대역이라 는 이름으로 숙청을 하고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짤라버리 면
문제가 해결 될 거라고 좋은 평 화가 올 거라고요? 그런 역사가 없 었습니다. 속아서는 안
됩니다. 오 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 온유한 길,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 화평의 길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의 길이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캐나다에 갔을 때 캐나다와 미국 이 이렇게 마주 있는 국경지구를 한 번 가 보았습니다. 하
도 유명하다 고 해서 가보니까 별것도 아니에요. 다른, 우리나라의 국경 같지 않고 그대로
사람들이 그저 차 타고 이리 올라가고 캐나다로 갔다 미국에 갔 다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요. 뭐 패스보드도 없고 비자도 없고 그 냥 왔다 갔다 하면서 두 나라가 다 니는 걸 보
았어요. 그 국경에 큰 아치를 세워 놓고 거기에 쓰여 있는 글자가 제 마음에 너무나 인상적
이 었습니다. 'We have the same mother!' 캐나다와 미국은 조상이 같다는 거죠. 'We
have the same mother!' 어머니가 같다 이말이예 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 싸운다 이 말이에
요. 이 말을 듣고 제가 가슴 이 아픈 것은 우리는 한 동족인데 왜 싸워야 됩니까! 왜 상대
방이 죽 기만 바라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망하기만을 바로 있습니까! 이게 어디서 온 거예
요, 도대체가. 근데 이 사람들은 우리는 조상이 같다. 다 영국 사람들이니까. 자 우리는 조상
이 같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롭 습니다. 우리는 안 싸웁니다. 그 앞에 참 부끄러웠습니다. 왜
우리 는 이렇게도 미련할까, 생각했습니 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다. 오늘의 비참
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고, 평화를 모르는, 평화의 길을 잃어버린 실종된 평화 의 백성
들의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울고 계십니다. 이 울음 끝에 40년 후에 로마가 다시 들어와서
침공할 때 깨끗하게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 그 때에 망하고 무너지고 아직까지 재건을 못하
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침공이었고, 학살이었 고,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아주 몽
땅 죽였어요. 예루살렘을 침공한 다음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200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
했을 때, '사람 20명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기록까 지 있습니다. 이 땅이 도대체가 문 제요,
예루살렘이란 여기가 성지라 고 해 가지고 말썽이라고 그래서 깨 끗이 섬멸해 버리고 다른
곳에다가 다른 도시를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까지 생각을 했어요. 성지이기 때 문에 그래서
예루살렘 성은 이렇게 비참하게 망하게 되는데 그 주후 70 년에 망하는, 바로 그날을 바라
보면 서 예수님은 울었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 거니와 너희가 너의 눈에 숨겨졌도 다."
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평화를 원합니다. 누구나 평화 를 원해요. 다 평화를 원하면서도 가는 길은 평화를 역행하고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지요. 평화를 생 각하면서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해요. 평화의 길을
조금 알아도 그 길로 갈 용기가 없어요. 실천능력이 없 어요. 그걸 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요 어떻게 하 면 될 것이라는 알지요. 조금씩 알 아요. 그러나 그 길로 가
지를 못해 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은 심판하십니다. 재난으로 심판하 시고, 전쟁
으로 심판하시고, 질병으 로 심판하시고 모든 심판이 있으나 심판의 뿌리, 원천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마음을 흐리 게 하십니다. 생각이 흐려집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
본입니다. 이성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고 지혜가 흐려집니다.
"그 사람 그럴 사람 아니에요."
뭐한테 씌웠어요 지금. 심판을 받았어요. 그리고 또 마음 이 완악해집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지 않습 니까! 두 집이 담 하나를 두고 살 았는데 오랫동안 사는데
한 집은 돈 이 많아요. 아주 여유가 있는 집인 데 화목이 없어요. 밤낮 싸워요. 이리 내려치
고 저리 내려치고 쾅쾅 하고 싸우고 편할 날이 없어요. 밖 으로 보기엔 좋은 집이요 으리으
리 한데, 행복할 것 같은데 불행해요. 맨날 싸우는 거예요. 이래선 안 된 다고 생각해요, 공
부도 많이 했어요. 밖에 나가서는 존경받는 사람들인데 안에서는 부단히 싸우고, 생지옥이
라요. 이러지 않아야겠다 하면서도 계속 싸워요. 그런데 바로 옆집에 는 아주 조그마한 집이
요, 가난해요. 나이 많은 부모님도 모시고 있고 아 이들도 많아요. 그런데 화평해 가 지고
너무 즐거워요. 날마다 찬송 이요, 날마다 기쁨이요, 날마다 축제 요. 웃음소리가 끝나질 않
아요. 이 쪽 집에서 이 집을 생각하면서 '저 집은 아니 돈도 없고 참 어려운 일 들이 많은
데 왜 저렇게 즐거울까? 우리는 여러 가지로 행복할 수 있는 데 왜 우리는 불행할까.' 마지
못해 한번 물어 봤다는 거 아닙니까! '자 어떡해서 당신 네는 이렇게 행 복하오. 그 비결이
뭐요?' 나이 많 은 할머니가 그 집 싸우는 걸 좀 연 구했거든요. 연구 검토했던 바가 있거
든요. 그래서 대답을 이렇게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 는요 전부 죄인끼리 모여 삽니다."
무슨 일이라도 잘못되면 다 내 잘못 이요, 그것도 내 잘못이요, 아 그 잘못 그것도 내가 잘
못한 거야. 다 내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다 죄인이 지. 우린 죄인끼리 살고 당신 네는 내가
보니까 의인끼리 살더만요. 전부 자기가 잘했고 자기가 잘못한 거 까지도 남 때문이고, 전부
가 잘 났다는 사람끼리 사니까 이거 구제 불능이다 이거.
여러분 죄인끼리 산다는 말이 얼 마나 중요합니까! 세상에 제일 불 쌍한 사람이 회개 능력
을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희 교회
에도 그런 분이 계셨어요. 대학교수님이에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 예수를 믿어서 3년 후에,
예수 믿은 지 3년 된 다음에 그 부인되시 는 분이 제게 한번 와서 이런 얘기 한일이 있어
요.
"목사님은 참 위대 합니다."

"뭘 위대한데요?"

"제가 결혼생활 20년만에 오늘 남편으로부 터 '여보 그만하오, 미안해.'"
미안 하다는 말 처음 들었대요. 20년만 에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 대요.
"그건 내 잘못이야"라는 말 을 처음 들었대요. 그 동안은 되게 잘 나 가지고요 자기가 잘못
한 것도 너 때문이라고 심판을 했대요. 이 집안이 20년 동안 그야말로 죽지 못 해 살고, 죽
이지 못해 살은 거예요. 이제 와서 한번
"미안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본인 말이요 사흘 동안 울었대요. 감격해서 저 남자 의 입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내 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제 한이 없 다는 거죠. 보세요. 별거 아닌 것 같
지요! 이게 팍스하고 샬롬하고의 차이에요.
회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 다. 제가 늘 얘기하지만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 이 없습니다. 이 미련한 사람이 고 집대로 삽니다. 게다가 교만합니다. 남을 심판
합니다. 이건 지옥입니다. 자기 죽고 남 죽이기. 거기에는 샬 롬이 없어요. 평화가 없어요.
행복 도 없어요. 행복이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위와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행
복은 회개할 수 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 음 그리고 희생하는 마음속에 있습 니
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어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큰 은혜 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건 내 잘못 입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주님 말씀하시는 거 예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보세요. 소 위 제사장 가야바라는 사람도 팍스 문화에 감염되어서 요한복음 11장 49절에 보
면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어 마땅하지 않느
냐!' 이 게 바로 팍스입니다. 그까짓 한사 람 예수라는 사람 누구인지 모릅니 다만은 죽여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버리자 이겁니다. 정치 적 관점에서 말합니다. 예수가 자
꾸 인기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따르 면 로마사람들이 정치문제로 돌려 가지고 언젠가 또 시
끄러워질 테니 까 아예 저거 죽여버리면 된다. 예 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왔습니까? 이걸 알아야 합 니다. 바리새 교인이라는 사람들도 평화를 약속하는 거 같으나
위선에 빠졌어요. 회개할 수가 없었어요. 회개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 었어요. 그들
의 위선적인 인격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국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멸망하게 됩니다.
사건, 재난, 실책, 어리석음이 어 디서 온 겁니까? 왜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게 됐습니까!
숨겨진 것 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도 평안합니다. 주 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 쳐 줍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
십 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평 안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 더면 좋을 것인데'
오늘도 그 눈에 숨겨진 그 숨겨지는 현상을 보며 마 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눈 물
흘린 것처럼 우리 또한 뜨거운 눈물 속에서 평화의 길을 다시 찾아 야 되겠습니다. 우리에
게 큰 평안 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있고 , 우리 민족의 장래의 앞에 있는 평 화가
눈에 환하게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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