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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좋은 편을 택한 여인! (눅 10:38-42)

by 【고동엽】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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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편을 택한 여인! (눅 10:38-42)


여러분, 인생을 3등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등급을 좀 나누어 볼 터인데 여러분 자신은 몇등급에 속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 결과나 성과,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고 동기와 자세에 의해서 사람을 나누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3등급부터 시작합니다.  과거에 매여 현재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행한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만부득이 살고싶지 않은 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것을 업보(業報)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 안에서 무엇인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진다' 생각하고 살지만은 이 불가에서는 아주 전생까지 올라가서 '그때에 한 행위에 의해서 오늘 그 값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게 바로 업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과거에 의해서 삽니다.  과거에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싶지요.  고치고 싶지요.  아예 그저 고무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지요.  그렇다고 지워집니까?  호적을 바꿔도 안지워지는 게 과거입니다.  이 과거를 어찌하겠습니까?  그대로 이어가며 오늘을 살아야지요.  과거에 쫓기면서, 후회하며 뉘우치며 반성하며 만부득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피곤한 생을 삽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마치는, 참으로 유감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2등급은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미래만, 앞에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는 것이올시다.  마치 무지개와 같은 것입니다.  확실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미래를 놓고 거기에다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현재도 문제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도 문제입니다.  '그저 앞날을 위해서 오늘은 고생해야 한다.  고진감래다.  와신상담'을 합니다.  그래 앞에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이렇게 전제해 놓고 막연하게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아주 어려운 고난을 참고참고 견뎌나가는 그러한 것입니다.  이 또한 참 어지간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1등급은 뭐냐.  현재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보면 예수께서 어떤 날 변화산에 올라가셨어요.  용모를 변화하시는 순간 세 제자는 예수님의 그 영광된 모습을 정면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머무르게 해주세요."  이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하니까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이대로, 이대로 살게 해주세요.'  심지어는 가족 생각도 안하는 것 같아요.  "여기가 이대로 좋습니다" 하고 만족해하는 순간을 봅니다.  그것이 바로 1등급 인간입니다.

여러분, 한평생 살아온 가운데 오늘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이 가장 만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오늘을 위하여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1등급이요.  거기다 하나 더 합시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특등급입니다.  안그렇습니까?  더 바랄 것도 없고 더 기대할 것도 없어요.  모든 소원, 아니 그보다 더 큰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대로 좋아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게 특등급이올시다.

여러분,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거기다 한 번 비유해 보십시다.  여기 지금 자녀 몇을 낳아서 키우면서 학비를 대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수고를 합니다.  이제 3등급 인간은 말이에요 '낳았으니 키워야지 어떡하나?  그거 하나 안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어쩌다가 실수로 그것까지 태어나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낳아 놓았으니 키워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게 준 십자가다' 이러고 그 고난을 겪어나가는 거예요.  과거에 매인 사람이에요.  그런가 하면 자녀를 낳으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자라서 그래도 내 소원을 이루어주겠지.  또 어느 때 가서는 효자도 되겠지.  내 말년에 의지도 되겠지' 어쨌든 자녀에다가 인생을 걸고 오늘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2등급 인간입니다.  자, 이제 1등급을 보십시다.  과거는 과거대로 좋고, 미래는 하나님께 있어요.  현재, 너무너무 예뻐요.  미칠 정도로  예뻐요.  너무 아름답고 예뻐요.  그들을 볼 때, 그와 이야기 할 때, 또 그들을 위해 수고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에요.  그런고로 감사합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예요.  그저 결혼했으니 사는 겁니까?  '뭐, 이왕 살았으니 마저 살아야지' 그겁니까?  이 얼마나 힘든 얘기입니까?  우스운 얘기입니다만은 얼마전에 아침마당 TV프로에 96세 할아버지, 그 부인이 92세요.  결혼 70주년 해로했는데 자녀가 40여명인데 자기 앞에서 자녀가 세상 떠나는 것을 하나도 본 일이 없대요.  참 다복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나운서가 짓궂게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 죽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래도 이 마누라하고 살겠습니까?" 그랬어요.  아, 그러면 선뜻 그렇다고 하면 좋겠는데 안그래요.  가만히 있더니 "신중히 생각해봐야겠는데요" 그래요.  살기는 살았지만 아니더라고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살았다고 산 겁니까?  오늘 당신을 만나도 나는 당신에게 프로포즈하겠습니다.  그 마음이래야 되요.  사랑은 항상 현재적이어야 되는 거예요.  과거 때문에 살고 미래 때문에 살고…….  아니요.  오늘 이대로, 현재로.  자, 오늘 집에 돌아가서 쳐다보다가 한마디하세요.  '나는 오늘의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것이 아니면 비참합니다.  2등, 3등으로 떨어집니다.

동기란, 형벌이 무서워서 행하는 동기가 있고요.  보상을 바라고 하는 동기가 있고, 존경과 사랑이 동기가 되는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두자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중세 수도원에서는 이 두 인간상을 수도 생활에 모델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도원 벽화의 그림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대표하는고 하니 마리아는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마치 백합화와 같이 생각하고, 마르다는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개미와 같이 그렇게 개미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노동' 이 두 이미지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기도 없는 노동도 문제고, 노동 없는 기도도 문제다.'  그래서 '기도만 하게 되면 태만하게 되고, 노동만 하게되면 교만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기도와 노동을 함께 병행해야만 수도생활이 된다' 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U.S.C. 대학에 샤론 코넬리(Sharon L. Connelly) 라고 하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가 쓴 책에서는요 직업정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워크 스피릿(Work Spirit) 그는 이 직업적으로 바로 선 사람들, 일과 기도를 바로 하는 사람들의 이미지에 대해서 세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는 일에서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일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살아간다.  두 번째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확인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역사하고 나를 통해 역사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나와 하나가 됨을 일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소명의식을 통해서 흘러나는 이 엄청난 에너지, 초인간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사는 것이 직업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적인 생활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현재적으로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제 다같이 두 여자가, 이 자매가 분명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거룩하신 은혜 앞에 보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신앙고백과 믿음의 자세가 여기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마르다라고 하는 언니는 예수님을 맞으면서 아마 때가 식사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해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합니다.  물질로써 예수님께 대합니다.  그 동생은 예수님 앞에 딱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여인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주를 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이 평가기준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때때로 물질로 대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을 물질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물질로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나타나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이 있고 가시적으로 주님의 은혜 앞에 보답을 하려고 듭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마리아는 물질로 대접한 것은 없어요.  그러나 무릎앞에 앉아서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 예수님을 더 기쁘게 했느냐는 겁니다.  이건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마르다는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받고 있습니다.  드리는 것과 받는 것, 어느 쪽이 사랑이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초보적으로 생각하면 드리는 편이 사랑인 것 같아요.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참 사랑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내 일평생 받은 물질에 있어서 거기다 이자를 더해서 드릴까요?  여러분 진정한 효자는 자기가 효자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효도를 하고 있다는 순간 벌써 효자가 아닙니다.  효가 아닙니다.  그 많은 눈물과 기도와 정성을 어떻게 돈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고로 갚을 수 없는 은혜예요.  내 일생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걸 어떻게 물질로 갚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물질로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이만하면 효도한다고 생각해요  아니죠.  효를 다하는 사람은 생각합니다.  '어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나는 항상 불효자입니다.'  그 마음이 효도라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사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는 것이다.  받되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그말이에요.

그리고 드리는 사람의 마음에는 꼭 불평이 있습니다.  오늘도 보니까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면서 꼭 불평을 하더라고요.  '왜요?  왜 나만 일하나?  왜 마리아는 일을 안하는가?  왜 나만 봉사하나?  다른 사람은 왜 안하나?'  이런 마음이 오늘도 있어요.  이 교회봉사라는 것, 사실 이게 물리적인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어느 순간에는 다른 사람을 비평하게 되더라고요.  '왜 저사람은 안하나?  저 사람은 왜 나와 같지 않은가?'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교만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마르다는 너무 서둘렀어요.  오늘 본문에 분명히 서두르는 가운데서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에르 상소 라고 하는 분이 요새 베스트 셀러로 나도는 책이 하나 있는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책이 돌아가는데 한번쯤 볼만합니다.  특별히 성급한 사람들은 더더욱 한 번 보셔야 됩니다.  오늘 이 세대에 있어서는 신속한 동작이나 빠른 반응이나 아주 생동감 있는 속도감이 있는 생을 좋아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엄청난 실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분은 생각합니다.  차라리 느리게 살겠다.  차라리 조용하게, 느리게 사는 것이 좋겠다.  시간의 재촉, 여기에 밀려서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좀더 깊이 생각하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 이 세대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느라고 서둘렀어요.  서둘러 재촉하는 중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어요.  또한 마르다는 분주하였고 불만이 있어요.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행복합니다.  듣는 자세로 임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좋은 옷을, 좋은 음식을, 좋은 여건을…….  그게 아니죠.  그 앞에 앉아서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한번 엄격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밤에 자다가 한숨을 쉬었어요.  '으흠∼'하고.  아버지께서 문을 '땅땅땅땅' 두드려요.  "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무슨 일이 있어서 한숨을 쉬냐?"  아, 내가 지금 중학생이 무슨 일이 있겠어요?  아무 일도 없죠.  그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는 것이 막중한 불효인 것을 모르느냐?"  여러분, 부모 앞에서 한숨 쉬어서는 안되요.  근심된 빛을 보여서는 안되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행복해야 되요.

탈무드에 보면 현명한 사람이 가지는 일곱가지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현명한 사람을 만나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말씀을 경청해서 듣는다.  찾아가서 듣는 거예요.  두번째는 남의 이야기를 가로채지 않는다.  가로채서 말하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셋째는 대답하기 전에 깊이 생각한다.  설사 부부 사이라도 깊이 생각하고 대답해야 됩니다.  말 한마디가 아주 중요하니까요.  넷째는 화제와 관계있는 질문을 하고 논리에 맞는 대답을 한다.  다섯째는 할 일은 반드시 순서대로 한다.  우선 순위가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죠.  여섯째는, 이 말이 매력이 있어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  일곱번째는 진실을 존중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간단한 말 같지만 그대로 실천해 나가기가 어렵고, 이걸 실천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에요.

마르다는 음식을 대접하느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마리아는 다른 일은 뒤에 두고,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예요.  참 사랑은 조용히 듣는 것이요 받은 바에 감사하는 것이요 이대로 만남의 관계를 통해서 최고의 행복을 확인하는 시간이에요.  여기에는 비난도 있었어요.  그러나 마리아는 이것을 다 극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좋은 것' 마리아가 택한 '이 좋은 것' 말씀과 믿음과 존경과 사랑과 만남과 행복, 이 극치적인 행복의 순간, "이 좋은 것을 택했으니 너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전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자,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 앞에서 듣기만 하잖아요.  이 언니가 좀 화가 났어요.  오늘 성경에 없지만은 분명히 몇 번 불렀을 거예요.  "마리아야, 마리아야." 끄떡도 하지않아요.  들은 척도 안해요.  마침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오늘 성경에 있잖아요.  "예수님, 저 마리아가 나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왜 보기만 하십니까?" 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야, 마리아야, 너 언니 좀 도와줘라" 그래야 되겠는데 오히려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리아 편을 들었어요.  마르다가 이제 화가 났어요.  화가 나면 그릇소리가 커져요.  부엌에서 '쟁그렁 쟁그렁' 그릇 몇 개 깼어요.  막 이러고 돌아가는데 거지가 왔어요.  문을 두드렸어요.  '똑똑' 두드려서 열어보니까 남루한 거지가 배가 고파 '좀 먹을 것을 주시면 좋겠다'고.  마르다가 화가 난 김에 지금 거지 동정하게 생겼어요?  예수님 대접하느라고 음식 준비하는데 불결하게 이게 왜 찾아온 거냐고 한바탕 퍼부으면서 그랬어요.  못준다고.  그러니까 '그렇습니까?'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가요.  좀 마음이 이상하게 생각되서 문을 열고 보아하니까 저 만큼 가는데 예수님의 뒷모습이더랍니다.  마르다가 땅에 엎드려 울면서 뉘우쳤다고 합니다.  이건 전설이에요.  '절대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거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1등 인생의 길이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를 섬깁니다만은 때로 소중한 것을 뒤로하고 그리 소중치 않은 것에 서둘러 행하면서 오히려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할 때가 많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주여, 마르다의 믿음도 주시고 또 마리아의 믿음도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봉사하고 말씀을 들으며 또 일하게 하사 주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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