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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눅 13:22-30)
현대인을 아주 병들게 하는 근본적인 병든 철학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안일
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편리주의입니다. 너무 편하게 편하게 살려고 하는 그러한 철학이
인간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명의 이기라는 것은 대체로 우리를
편리하게 합니다. 멀리 갈려면은 며칠씩 걸리는 거 요새는 몇 분이면 갈 수 있고, 오래오래
만들던 거 지금은 쉽게 만들 수 있고, 기다려서 기다려서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뭐
그저 이렇게 간이 식품으로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거 라면이라는 거 말입니다. 저는 유학
시절에 라면을 무척 많이 먹었습니다. 그것을 박스로 사다가 침대 밑에 넣어놓고 간간이 먹
을 때가 있었는데 그거 끓여먹는 시간 그것도 싫어서 보니까 뭐 1분 라면, 컵라면, 사실 그
게 좋은 게 아닌데요. 그 잠깐의 시간마저 보낼 수가 없어서 더 빨리 더 빨리 되는 거 뭐
없을까. 그래서 이 퀵 서비스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주 옛날 얘기입니다. 그저 저 혼자서나 생각할 얘기입니다 마는 제가 말씀을 드
립니다. 제 어머니가 여름에 목화씨를 땅에다 심고 목화나무를 잘 가꾸어 가지고 가을에 목
화 솜을 따서 그걸 틀어 가지고 실을 뽑아서 그리고 밤새 그걸 베를 짜 가지고 그거 시원치
않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또 본인이 직접 재봉을 돌리면서 이렇게 해서 옷을 만들어 주었습
니다. 그거 시원치 않은 옷이지만 그 옷은 아주 값비싼 겁니다. 그 속에 사랑과 정성과 마음
진실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입고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건 천하를 얻은 것 같은 행복
이 있는 것인데 요새 아무리 좋은 옷을 몇 푼 주고 사 입고 홀딱 벗어 내 버리고 이거 이거
인간미,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그만 다 사라지고 말아요. 그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보세
요.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모든 것은 쉽게쉽게, 빨리빨리, 나 하나만이라도, 지금 당장, 그리
고 우선 무엇부터, 이런 식으로 우린 몰아칩니다. 그 중에서 소중한 정성, 사랑, 고귀한 인간
미는 다 잃어버렸어요.
두 번째 철학이 뭐냐하면 렐러티비즘(Relativisism)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입니다.
요새 장사하는 분이든 정치하는 분이든 뭐 교육이든 간에 모든 면에서 들려지는 하나의 좌
우명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만 생존한다." 변화하는 것만 생존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
는다 이겁니다. 큰 개혁을 촉구하는 슬로건입니다마는 이 얼마나 무서운 소리입니까? 모든
것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고 궁극도 없습니다. 목적도 없는 변화, 방향을 알 수 없는 이러한 방향 실종된 변화, 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래서 절대적 진리는 없고 기준은 없고 중심을 잃어버린 그런 세
상을 우리가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구요.
세 번째는 실리주의입니다. 요새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실리를 추구합니다. 수십년동안 수
백년동안 내려오던 이념이라고 하는 것,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실리를 추구하는 그런 세상이
됐습니다. 결국은 실리, 즉 결과만 생각합니다. 방법과 과정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과 의
미도 상관이 없습니다. 실리적으로 대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상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여러분, 공부를 잘한다 합시다. 공부에 지름길이 없습
니다. 인생에 요행 길은 없는 겁니다. 보세요. 공부 잘 하도록 좋은 책상도 마련하고 좋은
램프도 켜 놓고 좋은 음식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공부방, 뭐 학비, 다 해 줄 수 있어도 공
부는 자기가 해야되는 겁니다. 분위기 만들어줬다고 공부가 되는 건 아니에요. 공부는 자기
가 해야되는 겁니다. 어느 잡지에 보니까 공부를 잘하는 다섯가지 비결을 말했더라구요. 그
래서 다섯가지가 갖추어져야 된다. 심력, 체력, 지력, 자기 관리 능력, 인간관리 능력, 다섯가
지를 말합니다. 체력도 없는데 공부하라 그러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죠. 자기 관리 능력
이 없어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해요.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이 놈을 놓고 공부하라 그러면
죽는 거예요. 자기 관리 능력이 있어야죠. 또 인간관리, 친구들을 관리할 줄 알아야죠. 만약
이것이 안되면 우울증 환자가 되는 거예요. 공부하다가 사람 병신되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이 다섯가지는 어디서 오느냐? 많은 시련 속에서 얻은 거예요. 긴 시간이 흘러가면서 깨닫
고 훈련받고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공부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러므로 빨리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빨리 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전 제 할아버
지로부터 늘 가르쳐주신 교훈 중에 여러 번 같은 말을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할아
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도끼자루를 쓸만한 나무를 찍으러 가자" 하고 등산을 했다는 겁
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이 도끼라는 것은 도끼날이 있고 거기에 자루가 있는데 이건 나
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주 튼튼한 나무라야 합니다. 보통 우리가 보는 이런 나무는 거기에
꽂아놓아 봤댔자 한번 치면 부러져 나갑니다. 쇠처럼 단단한 나무가 있어야 되는데 이걸 구
하기 위해서 이제 산 속으로 올라가는데 거기 산밑에 바위 밑에 곧게 자란 참나무가 있어
요. "할아버지. 저거 찍읍시다" 그러니까 "안 된다" 그래요. "또 올라가자." 한참 올라가다 또
이쁘게 자란, 곧게 자란 게 있어요. "저거 찍읍시다" "안 된다." 그냥 숨을 몰아쉬며 산꼭대
기까지 올라갔어요. "비바람이 치는 거기, 거기에 있는 나무를 찍어라." "할아버지, 저런 나
무는 저 산밑에도 얼마든지 있었는데요." "아니다. 그건 바위 밑에 그늘에서 자란 것이고 이
산꼭대기에서 비바람을 많이 맞고 자란 저거래야 도끼 자루가 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인격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전기 스위치를 키는 것처럼 끄는 것처럼 그렇게 번
쩍번쩍 변하고 컴퓨터 스위치를 누르고 여러분 클릭 하면은 반짝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게 아니에요.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거든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적이 없어요.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에 훌륭한 인격으
로 키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근데 요새는 전부 이렇게 급하게 그대로 오토매틱하게 자동적
으로 모든 것이 되기만 바라는데 급하게 되기만 바랍니다. 이 조급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
요. 미국사람들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차선은 최선의 원수다." 그렇습니다. 최선은
최선인데 우리는 최선을 버린 지 오랬어요. 차선만 찾아요. 그것도 삼선 사선을 찾아요. 최
선이 아니면 아니어야 하는데 이런 고집이 그만 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볼 수가 없게 되
었단 말입니다. 본 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젊은 신학자의 유명한 그의 신학의 명제가 있습니
다. "값싼 은혜가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원수입니다. 우리는 오늘 값비싼 은혜를 위하여 싸
우고 있습니다." 그 신학의 총 주제입니다. 여러분 값싼 은혜, 은혜를 생각할 때에도 때로
보면은요 예수 없는 은혜를 생각해요. 복을 달라고 비는데 그 속에 예수가 없어요. 왜요? 예
수님은 이미 복된 길을 가르쳐 주었어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좁은 길로 가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길을 복된
길을 다 가르쳐 주었는데 이건 마다하고 그대로 손바닥을 내놓고 복만 달라는 거예요. 그리
고 몸부림을 치는 거에요. 이게 믿음입니까? 그게 잘못된 신앙이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 없는 예수, 생각해 보세요. 예수께서는 모든 일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없
는 그런 안일한 예수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Discipline이 없는 은혜, 훈련과정을 무시한
은혜를 생각합니다.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
을 주실 때 책장을 넘기듯이 벌떡 하루아침에 주신 게 아니에요. 사십 년이라고 하는 긴
Discipline 코스요. 이 교과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신 거예요.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잃어버립니다. 훈련과정, 이 기나긴 훈련, 이 시련,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에요. 이
것을 통하여 우리를 복 주시고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때 기적을 바랬
고 축복을 바랬고 형통을 바랬고 출세를 바랬고 예수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 같은 축복이 있
어지기를 바라고 따랐어요.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을 잘 들어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그 마
음에 깨달음이 오는데 예수님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
가기보다 어렵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이런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아 이게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생각해서 물어본 겁니다.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께서 뭐 10%다
20%다 그렇게 프로테이지를 말씀하지 않고 딱 한마디 대답하시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를 힘써라"라고 말합니다. 자, 적다는 말입니까 많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느만요.
지금 이렇게 남북이 서로 만나는데 "목사님, 언제 통일이 될까요? 언제 통일이 될까요?" 그
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저는 항상 똑같이 대답합니다. "우리하기 탓이지요."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있는데 이거는 하지 않고 누가 해주길 바라고 그대로 통일만 기다리는 겁니까?
우리가 하기 탓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지요. 언제 됩니까? 뭘 바라는 거예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님 말
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얼마나 좁은가 보십시다. "힘써 구하여도 들
어가지 못할 자가 많으니라." 많은 사람이 결심을 해요. 그러나 중도에 도중에 하차해요. 모
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다가도 못하는 사람이 많으
니라. 참 유감스러운 말씀이에요.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특별한 은혜
가운데만 가능합니다. 우리 인간 의지 한계를 넘어서는 얘기예요. 내 결심 가지고 내 의지
가지고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실 때에 이것이 가능합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참 대단한 말씀이에요. 이거는 마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
요. 인격적으로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옛날 이 배경으로 돌아가서 보면은 옛
날에 예루살렘 성에 성문이 있었어요. 큰 성문이 있고 이건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닫아버
려요. 그러면은 밤중에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성안에 들어와야겠는데 못 들어오지 않습
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비상구를 만들었어요. 성문 옆에 조그마한 개구멍 같은 문을 만들어
놓고 이렇게 늦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이게 이름하여서 "바늘구
멍"이라는 이름입니다. 바늘구멍이라고, 너무 작아서, 그런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좁은
문입니다.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짐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도 안
됩니다. 오직 겸손한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 오직 영혼만을 생각하는 사람, 오직 생명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들어올 수가 있어요. 다 버리고. 버릴 게 많아요. 교만도 자존심도 물질도
욕심도 명예도 다 버리고 오직 순수한 생명 위주의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올 수
가 있어요. 좁은 문이요. 아주 좁은 문이에요. 모든 것을 버리고야 들어올 수 있어요.
또 한가지는 이 좁은 문은 아주 좁아요. 시간적으로 좁아요. 딱 문이 닫히면 다시 열 수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 앞에 잠깐 잠깐씩 문이 열립니다. 열렸을 때 들어가야 됩니다. 그 다음
에 닫히고 나면 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할 때, 할 수 있을 때 해야합니다. 일 할 수 있
을 때 일해야 됩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일 할 수 없구요 특별히 회개하는 것 회개할 기
회를 하나님이 주실 때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가슴을 쳐도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문이 닫쳐 버려요. 셔터가 내려 버렸다 이거요. 여러분, 이 문은 항상 열려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구원의 문이 닫칠 때가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종말론적인 기
회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열렸을 때 들어가야 된다.
시간적으로 좁은 문이라 말씀하셨구요.
또 한가지 오늘 여기 비사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이름만 가진 교인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
지요. 피상적인 교인, 헌신이 없는 교인은 안 된다고. 그래서 여기 보니까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이 우리 길거리서 가르쳤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예요. 천국 문이 닫친 다음
에 가서 두드리면서 "열어 주소서" 그러니깐 "나는 너희를 모른다" 그러니까 "아 모르다니
요.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구요. 주님과 함께 음식 나누었고 또 주님이 우리 길거리서
가르쳤는데요." 그 다음 얘기가 없습니다마는 주인이 이럴 겁니다. "그래, so what? 그래 어
떻다는 얘기냐? 너와 함께 나가 음식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래 어떻고 그래 너희 길거리서
가르치는 것을 네가 들었다고 하자. 들었으면 어떻고 보았으면 어떠냐. 먹었으면 어떠냐. 그
게 구원의 조건이냐" 이말이에요. 보아도 먹어도 배워도, 아니요. 중생해야 돼요. 내 십자가
를 내가 져야 돼요.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Total Commitment가 있어야 돼요. 이것
이 없이 듣고 배우고 먹고 같이 교제하고 내가 예수님 전도하는 것 보았는데요. 이거 웃기
는 얘기 아닙니까? 믿어야지. 주와 함께 헌신 했어야지요. 그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요새 보니까 사람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많이들 노력하데요. 제가 이
집 저 집 다녀 보니깐요 집집마다 건강운동기구 없는 집이 없더만요. 다 하나씩은 갔다 놓
았드만. 근데 내가 궁금한 건 며칠이나 했는가 궁금해요. 여러분의 집에 건강 기구를 쌓아
놓았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겁니까? 운동을 해야 되는 거지. 가끔 누가 물을 때에 "목사님
뭐 어떻게 여행하실 때 운동을 하십니까?" "아 그 줄넘기하지"그랬더니 "아 그 줄 가지고
다니십니까?" "줄이 무슨 필요가 있어? 맨 손으로 해도 되는 거지." 아, 줄 가지고 줄넘기
합니까 줄 없어서 줄넘기 못 합니까? 운동기구 없어서 운동 못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 장
사하는 사람들 잘 팔아먹었지. 쓸데없는 짓들이에요. 운동은 내가 해야 되는 거지. 그래야
건강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자 보세요. 결국은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해서 그 속에서
내가 은혜를 받는 거 아니겠어요? 듣기만 하고 보기 만하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이요.
심플마인드요.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구원의 절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아주 단순한 마음이요. 또 중
생하지 못하면 천국을 보지 못하리라. 그건 또 뭡니까?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어린아이와
같이 태어나는 마음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내 몫에 대인 내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소위 성공했
다는 사람이 누굽니까? 존경받는 분들, 하나같이 한 평생 외길을 간 사람입니다. 휘청휘청하
고 넓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좁게 산 사람이에요. 먹을 수 있다고 다 먹고 갈 수 있다고 다
가고 그런 거 아닙니다. 이 넓은 길이 있지마는 내가 가야 할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은 세
상이지만 내가 생각해야될 것은 좁은 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넓은 세상을 좁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좁히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것도 그렇지 않아
요? 한달에 한번 나오는 건 넓은 거죠? 일주일에 한 번도 넓은 거죠? 새벽기도까지 매일
나오는 건 좁은 길이죠? 좁게 사세요. 편하게 넓게 그건 아닙니다요.
유명한 미국에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그의 고향인 메사츄세츠 주에서 상원의원들에게 연
설한 1961년 연설문이 하도 유명합니다. "우리가 먼 훗날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서 다음
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용감했습니까?' '당신은 총명했습니까?' '당신은
성실했습니까?' '당신은 헌신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불의 앞에 용감했습니까? 얼마나 성
실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넓게 산 사람은 유구
무언(有口無言)이요. 좁은 길로 간 사람만이 대답할 말이 있는 거예요. 좁은 문 뒤에 영생이
있어요. 넓은 문 뒤에 사망이 있어요. 그런 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좁혀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자기 노력으로 오히려 좁혀 가며 좁혀 가며 살아라. 그것이 영
생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구원의 길을 위하여 출발했습니다만은 우리는 다시 안일하기를 원하고 편하
기를 원하고 내 수고를 바치기를 꺼려하는 저희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께서
좁은 길, 험악한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셨건만 우리는 제자된 도리에서 그 길을 같이 가지 아
니하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번영과 자유와 평화와 복만 누리려고 하는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긍휼히 여기시사 주님과 함께 좁은 길로 가게 하사 영생으로 통하는 그 위대
한 길을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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