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2:1-8갈2:19-21
찬송가 505장 1절은 이렇습니다.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예수님을 닮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사랑하면 닮는다.
첫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닮습니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부부를 보면 많이 닮았습니다. 젊은이들도 사랑하면 금방 두 사람이 분위기가 비슷해지고 닮아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당신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피조물 중에서 아주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의사소통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단지 우리와 말을 좀 통하게 하실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의 종으로 우리를 부리시기 위해서 일까요? 능력 많으신 주님이 우리의 노동을 필요로 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라 함은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편으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 모양으로 만드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를 예수님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입기까지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닮기를 원하십니다.
2. 바라보면 닮는다.
둘째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닮습니다.
우리는 보면서 배웁니다. 보고 배우면 닮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견문을 넓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견문을 넓힐 때, 선진국을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기회가 되면 그 사회에서 오래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사회의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에서 조금 못한 사람이 후진국에서 가장 앞선 사람보다 더 나을 때가 많습니다. 서양 음악에 있어서는 서양의 국가들이 아무래도 선진국입니다. 태권도에서는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선진국입니다.
그렇다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선진국 사람들과 후진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능력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타고난 머리가 좋고 나쁨의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어릴 때부터 보고 듣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사람들은 그 사회에 쌓여온 문화를 보면서 자랍니다. 역사적 축적물들을 보고 자랍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안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진국은 올바른 질서를 보고 자랍니다. 그래서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세련되고 품위있는 문화를 보고 자랍니다. 그래서 문화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보느냐가 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은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따라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닮아갑니다. 부모의 아름다운 가정을 보고, 자신도 아름다운 가정을 가꿉니다. 부모의 직업을 보고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습니다. 지휘자 금난새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십시오. 좋은 자연환경을 보여주십시오. 아름다운 산천을 보여주십시오. 누구나 자연보호의 첨병으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아이에게 나라 사랑을 보여주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이에게 효도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효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보여주십시오. 진실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보여주십시오. 신실한 경배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을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입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사람의 관심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아서 복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아름다운 것을 보는 복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보는 것’은 ‘깊이 생각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의상 디자인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사람의 옷이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보여지는 것을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능동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처음 교회에 나왔어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 금방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랜 기간 교회를 떠난 중년의 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 몇십년 만에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예배 참석한 첫날, 남 욕하는 소리, 싸우는 욕설 등을 듣고 보았습니다. 이 딸은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이게 뭡니까? 나 다시는 교회에 안 나갈래요.”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 나와서 다른 것을 많이도 봤구나.”
보고 자라는 것이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만약 내 눈에 낮은 수준만 보이면, 내 수준이 낮은 것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엉겅퀴를 보면서 줄기와 잎의 가시만 봅니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엉겅퀴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봅니다. 위를 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보게 만드는 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자기 혼자만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나누어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복을 나누어 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복 받은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찬송가 518장 3절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것입니까?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둘째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닮으면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를 지면 닮는다.
셋째로 십자가를 지면 닮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바라보며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닮아야 합니까?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많은 것 중에서 반드시 본 받아야 할 것 한 가지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장 먼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 지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만 예수님께 맡기는 사람은 여전히 또 죄짓고 또 용서 받고 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죄과만 예수님께 넘겨주고 여전히 죄짓고 다시 똑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내가 지은 죄 몇 가지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죄에서 내가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죄’만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내’가 용서받고, 죄인된 ‘내’가 십자가에서 통째로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내 죄 때문만이 아니라, ‘죽어야 할 나’를 위해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내 죄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 ‘율법주의’, ‘업적주의’, ‘도덕주의’, ‘자기 의’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과 살아가는 방법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아주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자유가 있습니다. 죽으면 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종신형을 받아도 죽으면 그 형벌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교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길은 그것들로부터 죽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박해와 같은 고난은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 십자가의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십자가는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정과 욕심을 못박아라. 정과 욕심을 죽여라’ 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압박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죽은 사람도 힘을 잃지만, 세상의 권세도 죽은 사람에 대해서 힘을 잃습니다. 죽은 사람은 권력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상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 받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에 대해서 아직 죽지 않으면 칭찬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격려와 칭찬과 인정이 없으면 일을 못합니다. 세상의 원리와 너무나 똑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 없이 일할 수는 없겠습니까? 격려와 칭찬이 없고, 비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른 길을 걸을 수는 없겠습니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고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내려와 보라. 내려와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유혹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를 동원할 능력이 있지만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복수의 마음도 십자가에 모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 말없이 죽는 모습 앞에서 세상은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승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4. 주님과 함께 다시 살면 닮는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야 닮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과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분명히 죽음의 장소입니다. 죽음의 장소이므로 모든 것의 끝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시작의 장소입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장소에서 주님이 당신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나를 통해서 당신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때 십자가에서 죽는것만 보지말고, 다시 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옛 습관을 완전히 바꾸는 방법은 그 습관에 죽는 것입니다. 점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옛 사고 방식을 바꾸는 방법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야 거룩한 새로운 습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 우리는 길만 보지 말고 길의 끝, 목적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복 받지 못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은 안되는 길을 가고, 망할 길을 선택합니다. 왜 원하는 것과 실제의 행동이 서로 다른 것입니까? 왜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길을 걷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람들은 생명이 좋은 줄은 압니다. 천국이 좋은 줄도 압니다. 복이 좋은 줄도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받는 길이 복 받을 것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 받는 길은 좁아서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썰렁합니다. 그런데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길이 크고 넓고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길이 붐비고 활기가 넘치게 보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성찰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을 지지하고,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은 생각한 바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실제로 자신이 걷는 길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 천국, 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복을 받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신앙이란 시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멀리 보게 만들고, 불신앙은 가까이 있는 것에만 매달리게 만듭니다. 멀리 보지 않으면, 지금 제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목적을 보는 눈이 신앙입니다. 목적을 보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정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좋은 길을 찾지 말고, 좋은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 목적에 이르는 좋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 모든 것을 못박는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내가 사는 길이고, 새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은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더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란 더 많이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세상의 폭력을 하나님의 힘으로 더 강력하게 무너뜨려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힘으로 변화되지 않고, 십자가로 변화됩니다. 세상은 지배함으로써 변화되지 않고 섬김으로써 변화됩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모든 계절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죄인된 나를 위해,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성탄절, 죄인된 내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사순절,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고난 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좀 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좀 더 변화된 삶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부분적인 수정으로는 안됩니다.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합시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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