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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4장7-13 /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2월19일(토)■


(로마서 14장)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묵상/롬 14:7-13)


◆ 삶의 목적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다.
사람이 거듭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누구나 이 말에 동의하게 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은 자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이 생긴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삶을 오로지 전도나 교회당 봉사에만 국한하면 안 된다.


어떤 선교회에 있던 사람이 쓴 글을 보았다.
그 선교회에서는 직장에 취직하는 목적이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서라고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직장 일이 모두 세상일에 불과한데,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바꾸는 방법은 '전도'였다. 오로지 전도하기 위해서 근무할 때만 의미가 있었다.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직업관일까? 아니다. 직업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도구다.


그 사람이 그런 목적으로 취업을 했지만, 직장을 겉돌게 되고 사람들에게 소외되었다. 그의 친절과 봉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목적이 있는 친절과 봉사를 사람들이 과연 받아주겠는가? 결국 전도는커녕,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이미지만 심어주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자세는 그를 본받아 사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순수하게 친절을 베풀고, 주어진 일은 성실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조차 상을 준다고 하셨다(골 3:23-24). 교회에 온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집 아이를 잘 돌보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다(딤전 5:4). 기쁨으로 하자.


삶의 목적이 주님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용납된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바로 이 목적에 맞추어져 있다면 그에게는 밥을 먹는 일도, 직장 다니는 일도, 운동하는 일도, 심지어 쉬는 일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일이다. 


◆ 우리는 주의 것


(8)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인정하든 말든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남의 것이라고 인정하기 싫어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도 우리 것인 적이 없다. 


우리는 원래 누구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인간의 배반과 타락으로 인간은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 내가 내것이 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었으며,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종이었다(엡 2:1-3).


주님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무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지불하고서 되찾으신 존재다.
하나님은 절대 빼앗기지 않으신다. 아무도 나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존재로서 진정한 자아를 가지게 된 셈이다.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아 6:3 표준새번역)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이런 사랑의 고백이 될 때, 그는 복된 성도다.




◆ 비판하지 말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두세 달마다 만나는 형제가 있다.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교제하는 분인데, 이분은 누구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설사 말을 잘못해도 오해하지 않는다. 이 분과 만나면 긴장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성경의 깨달음을 나누며 풍성한 교제를 한다.


반면에 어떤 형제는 초신자나 미숙한 형제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겸손하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자랑을 하는 것같이 보이면 날카로울 정도로 대적하고, 약간의 허튼소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제하는 것이 무척 불편하다. 저 머릿속에서 일어날 수많은 판단을 생각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사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주님, 형제를 판단하는 나쁜 버릇에서 건져주십시오.


우리는 분별이란 명목으로 수없이 형제를 판단한다.
어떤 것이 판단이고 어떤 것이 분별인가?


청년 시절에 수련회 때 어떤 강사가 왔는데, 그 강사는 신발을 꺾어 신는 사람을 정상적인 신자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신발조차도 제대로 못 신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였다. 신발 꺾어 신는 형제들 등에 식은땀이 났다. 과연 그의 말이 옳을까? 신발 꺾어 신는 것이야 개인의 성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면 그것은 분별이다. 그러나 내가 기준이 되면 그것은 판단이다. 우리는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고 그것으로 형제들을 정죄하고, 상처를 준다.


주님께 나를 용납해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내가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순되고 추한 것이 없다.


형제가 아무리 미숙해보여도 그의 인생의 목적이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를 비판하면 안된다. 그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교만한 태도다. 내가 아무리 그보다 성숙한 듯해도 하늘에서 보면 별 차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판단해서 내가 얻는 이득은 무엇이며, 형제가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지적받고, 회개해야 할 일이다(11절). 
그런데도 열심히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도 자신이 꽤나 잘난 존재인줄로 알기 때문이고,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아, 잘못을 범한 형제보다 그것을 차가운 마음으로 비판이나 하고 있는 내가 더 큰 죄를 범하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자. 그것은 교만한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갖자.


주님,
저를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는 악한 습관에서 건져주십시오.
주님께서 저를 용납하셨듯이 저도 형제들을 용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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