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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설교 6편

by 【고동엽】 2022.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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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설교 6편

설교자들은 절기설교(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준비가 힘든 일 중 하나라고 한다. ‘뻔~한 주제’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정의 달 설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녀를 향해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과 부모를 향해 ‘자녀들을 사랑하라’는 주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배들의 설교 몇 편을 준비해 봤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는 데 도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① 제목: 아이들아
성구: 잠언 22:4-6, 에베소서 5:1-4

행복한 인생을 위한 절대적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졌었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네 개의 계명이 기록되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는 여섯 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관계를 중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은 내가 소유한 재산이나 성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또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웃 중에 첫째는 부모님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갖게 되는 인간관계는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입니다. 십계명 중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1. 가장 기본이 되는 계명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어떤 이유를 붙여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 앞에는 순종이 있을 따름입니다. 성경에는 이 명령을 순종치 않는 자의 신앙생활은 가증하기까지 하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가정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셨고, 잠언 30:17에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의 빚을 진 분이 있다면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악으로 선을 갚는다면 안 될 일입니다. 잠언 17:13에는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불행은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불효는 바로 선을 악으로 갚은 것입니다. 부모가 할 일을 못했다고 공경은커녕 부모를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2.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에베소서 5:1에서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은 절대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낳아주셨고, 사랑하셨고, 헌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의 생활에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얼마나 편한가’, 둘째 ‘얼마나 즐거운가’, 셋째로 ‘얼마나 이로운가’입니다. 즉,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도 이런 원칙으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산을 주면 좋고, 늙고 실속이 없으면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입니다. 예전에는 엽전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돈이 앞을 가려도 그 구멍으로 부모가 보이고 형제가 보였는데, 요즈음은 돈이 앞을 가리면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에서 벗어나려면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추리적 사고와 계시적 사고입니다. 추리적 사고는 이것저것 따져보아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계시적 사고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우리도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알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요즈음 자녀교육을 위해서 얼마나 주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부는 많이 시키는데, 인간으로 바로 키우지는 못합니다. 아주 못쓰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20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대어 번역에 보면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되었습니다. 부모 순종이나 공경은 단순히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나의 부모님을 정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모님을 거절한다면 부모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3.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되고 장수합니다. 잘 된다는 것은 만사가 기쁨 속에서 원만하게 진행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약속을 겸한 계명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면 오랫동안 그 땅에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슬프게 하고 자식이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하십니다.

효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룻기에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과부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고 갔지만 룻은 끝까지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룻은 결국 다윗의 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90세가 넘도록 살았습니다. 그가 맡았던 일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신 것입니다. 친부모도 아닌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섬겼던 그를 하나님은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자녀가 보모님께 공경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초반기에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고 그 권위를 보모님께 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성경은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이란 말의 어근은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받는 삶이 곧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입니다.

잠언 23:24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불의하게 사는 자식을 둔 부모는 평생 고통스럽게 살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어리석게 살면 그것은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지혜로운 자식이 되는 것, 그것이 효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성실하게 감당하고 좋은 이름을 부모님께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보모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보모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첫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② 제목: 아비들아
성구: 신명기 6:4-9, 에베소서 6:1-4

인간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이 바르게 될 때만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고 사회적으로 출세하여도 가정이 건강하기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돌아가야 할 가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가장 큰 위기는 정쟁이나 사회의 혼란보다도 가정의 위기입니다. 위로와 안식과 행복을 누려야 할 가정이 불행과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비결 중에 하나님의 자녀양육에 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1.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에베소서 6:4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양육의 책임을 아버지에게 두었습니다. 이 말이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 어머니의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보면 아버지가 그 가정이나 가족 중에서 일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대표로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서만이 아니라 자녀들을 교육하기위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며 교육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화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부모들이 자기중심적일 때 노엽게 합니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삶과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부모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절대적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인생을 실현하도록 돕는 자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부모들은 다른 자녀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는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자녀들이 열등감을 갖지 않게 하려면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많이 역려하고 인정하고 작은 일에도 칭찬하는 것입니다. “너만 보면 마음이 기쁘다. 너를 생각하면 참 자랑스럽다. 넌 정말 멋있다.” 라는 표현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중에 말썽을 부리고, 가출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가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더욱 사랑하며 기도하십시오.

부모들은 자녀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현대의 가장 큰 위기는 대화의 단절입니다. 함께 살고 있으나 부모와 자녀들이 극단의 고독과 소외감 때문에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일주일에 아버지가 자녀를 만나는 시간이 7분 30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만나면 사랑으로 격려하기보다는 행동이나 점수에 대해 꾸짖을 때가 많습니다. 또 많은 부모들이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자녀들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혹독하게 때리고, 관심을 두지 낳고, 제대로 양육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같아야 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는데 그 앞에 ‘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반드시 물려받아야 할 유산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녀들을 믿음으로 강하게 양육하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양육하여야 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들에게 훈계한 중심은 여호와에 대한 경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이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쉐마를 배우게 됩니다.

쉐마란 신명기 6:4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의 뜻은 ‘듣는다’ 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가 신앙의 중심이요, 교육의 중심이요, 사람이 지킬 본분입니다.

오늘날 교육의 문제점은 이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육의 목표는 철저히 기능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존경할 인간이 없고, 이상이 없는 교육을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일등을 하라 하며, 그러다 보니 선한 사람보다 유능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유능한사람이 되어도 인격 형성이 안 되어서 돈을 벌면 타락하고, 부유해지면 동물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학교에서 지식을 많이 배우기만 하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하게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하나님경외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지금도 자녀들이 침대에 잠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려주어서 마음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밝은 길을 걷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의 미래를 바르게 인도할 것입니다.

3.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들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행 청소년은 없습니다. 다만 비행 부모가 있을 뿐입니다. 문제아의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삶을 본받습니다. 부모들이 좋은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그것을 그대로 본받게 됩니다. 자녀는 귀로 배우지 않고 눈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모든 가치관과 기준이 부모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십 년 뒤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심고 있는 것의 종류에 따라서 십 년 뒤에 열매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이 영원한 철칙입니다. 이것을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교육의 할아버지라고 하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교육가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며,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사랑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녀들이 부모 안에 있는 기쁨과, 믿음을 보고 나도 저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소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노엽게 하지 않고 본이 되는 부모를 둔 자녀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③ 제목: 아내들아
성구: 에베소서 1:17~22, 골로새서 3:18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행복한 가정이 필요합니다. 가정이 불행하면 인생 전체가 불행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가정이 평안하면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가장 먼저 세운 기관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인생의 출발점이요, 안식처입니다. 인격과 습관이 형성되고 인간관계를 처음 배우는 곳입니다. 가정이 잘 되면 사회와 국가가 잘 됩니다. 그러나 가정이 파괴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가정의 핵심은 부부 관계입니다. 부부가 화목하고 두 사람이 행복하면 아이들이 행복하고 그들이 다니는 직장이 행복하고 교회가 행복하게 됩니다. 반대로 가정에 긴장과 갈등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그것이 부부관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정에서 무엇이 제일 싫은가?” 라고 물었습니다. 첫 번째가 부모가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이것은 아이들이 가출하는 첫째 원인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면 이웃과 주변이 행복합니다.

1. 가정 문제의 근원
원래 하나님께서 창초하신 가정에서 아담과 하와는 아무 갈등도 없이 행복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평등했고, 사랑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가정은 수직적 관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는 남편을 사모하고 아담은 아내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부는 서로 다스리고 사모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한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남편에게 학대당하고 지배당하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의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가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평등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주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덴의 질서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의 부부의 질서는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그렇지 못한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가정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전의 가정은 전통적인 가정이었습니다. 권위가 남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남편이 잘나서가 아니고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이전 모든 세대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교도 여성들은 얼굴을 감고 다닙니다. 회교권, 아프리카, 남미가 다 그렇습니다. 이제 1970년,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남성에게 집중된 권위가 여자에게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권위를 함께 나누는 동반자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방적 권위에서 상호적 권위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들과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아내들도 함께 버는 맞벌이를 합니다. 남녀 역할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아기를 보고, 여자가 돈을 벌기도 합니다. 이제 가정이 위기를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이혼이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온 세상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제 가정들을 그대로 놔두면 흔들리고 위험합니다.

2. 남편에게 복종하라.
바울은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해 먼저 아내에게 권면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부부에게 주시는 명령을 바로 알려면 인간의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근본적 욕구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둘째, 자신과 다른 사람 앞에서 가치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과 존경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인정의 욕구가 훨씬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자는 가정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 있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심지어 에베소서5:33에 보면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예상태 혹은 종으로서의 복종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남자보다 여자가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등한 인격 사이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은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사람의 법칙을 바로 알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3. 사랑의 법칙
사랑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받는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칭찬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님이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사랑과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자라셨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후에 그것이 당연하구나 이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사랑은 봄으로써 생깁니다. 부모가 서로 사랑하며 대화하는 가정에서 자라면 거의 이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혼하고 외도하는 가정에서 자라면 그대로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술 먹는 가정에서 자라면 그대로 따라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부모가 보여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은 연구하여 배웁니다. 사랑에 대한 강의, 책, 설교 등을 통해서 사랑의 특성과 방법을 배우면 됩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고 의지요, 책임이 따름을 배워야 합니다. 넷째, 배운 대로 행하고 실천함으로 사랑이 생깁니다. 아는 것을 향하여 배웁니다. 사랑에 관하여 많이 배워서 실천하고 반복하면 습관이 되어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존경받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신뢰하고 감사하고 칭찬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면 자녀들이 그대로 본받아 사랑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어떤 신앙인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을 돕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각각 고유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이 이 시대의 병을 치유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처방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는 언제나 안정된 분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만나고 대화하며 사랑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며 하나 되기 위해서 대화하며 마음도 뜻도 하나가 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내를 향하여 먼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네 아내들은 복된 가정을 이루는 원리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④ 제목: 남편들아
성구: 창세기24:61~66, 골로새서3:19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높은 산악의 최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산악인들이 정상 바로 밑에 치는 베이스캠프와 같습니다. 산악인들은 베이스캠프에서 피로를 씻고 쉼을 갖고 음식으로 힘을 비축하고 정상 정복의 전략을 세웁니다. 베이스캠프가 없는 등반의 정복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삶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가정은 필수적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가정은 인간이 찾고 있는 인생의 최고봉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가정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의 불행은 잘못된 가정관에 있습니다. 즉, 지극히 인간중심의 가정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이룬 나의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 가정관은 내가 싫으면 얼마든지 헤어지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생명은 부모님을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이 홀로 사시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하나님이 배우자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함께 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가정 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원리가 나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창2:24). 부모를 떠남은 정신적, 인격적, 환경적, 경제적인 독립을 말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육에서 떠나 둘이 홀로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완전한 연합을 이루며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2. 부부 사랑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듯 가족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7에 보면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지를 따라 동거하는 부부가 많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아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 상대방의 성장 배경과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이해가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아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질과 성격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차이가 대단히 많습니다. 급한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습니다. 충동적인 사람이 있고, 심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있고, 조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냥 다른 것입니다. 셋째, 습관의 차이가 있습니다. 적어도 20년 내지 30년 다른 가정에서 지냈으므로 적응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 사역자는 치약을 끝에서 짜는 것과 중간에서 꾹 눌러 짜는 것 때문에 평생 심각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넷째, 남녀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외모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직관력이 뛰어나고 전체적으로 사물을 봅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은 이상해요.”라고 말합니다. 지나고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또 일을 하는 동기도 다릅니다. 남자는 일과 성공에 관심이 많습니다. 성취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관계 지향적입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정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는 데서 만족을 느낍니다. 대화를 할 때도 다릅니다. 여자는 “말하는 재미로 산다”고 합니다. 대화가 중요합니다. 매일 남편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남편이 말을 들어주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대화 없이는 친밀한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여자는 대화를 나눌 때 감정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정치, 경제, 공적인 일 등 큰일에 관심이 많고, 결론 지향적입니다. 여자들은 세세한 것, 관계 중심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차이점을 알고 나면 아내에게 어떻게 하여야 사랑하는 것인 줄을 배우게 됩니다.

3.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아내를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먼저 경청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말할 때 끝까지 듣고, 공감하고, 끄덕거리고, 중단시키지 말고, 눈을 마주보고, 재미있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어난 일을 결론만 이야기하지 말고 아내에 맞춰서 자세하게 보고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아내에 대한 최고의 사랑입니다. 집에 와서 남편이 말이 없으면 아무리 돈을 벌어 와도, 아무리 건강해도 필요 없습니다.

이런 지식을 따라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나 남편을 자기 좋아하는 대로 맞추려고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대화 기술과 부부간의 갈등해결에 대한 지식과 방법을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골로새서3:19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내에게 사랑받는 욕구가 더 크게 하셨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사랑하며’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절대적 사랑, 자신을 전부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여자도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사랑의 욕구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복종 이것이 부부관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욕구가 가정에서 충족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욕구가 가정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가정의 증세는 무엇엔가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은 벌어오는데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면 일에 중독이 되든지, 섹스에 중독이 됩니다. 남편도 진정으로 존경 받지 못하면 같은 중독현상에 빠집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애인 신드롬은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사랑으로 추만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현상입니다.

갈등이 없는 부부는 없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열정이 식어져도 좌절하지 말고, 이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부부는 위기를 극복한 다음에 참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부부는 갈등을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극복해 갑니다. 행복한 부부관계에 필요한 사랑은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요,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알아서 채워 주고, 서로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고전13:5)이라고 했습니다. 부부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을 이룰 것인가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 목회와 설교자료 2002,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년, pp.143-158

 

 



⑤ 제목: 부모에게 순종하라
성구: 에베소서 6:1-3

어버이 주일이다. 어버이주일은 1913년 미국의 안나 자비스 부인이 시작한 행사이고, 그의 딸 미스나 자비스 부인의 활동으로 어머니날 주최 협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어머니날에 카네이션을 달게 된 것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카네이션 한 아름을 교회에 가지고 와 어머니를 추모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주일로 정한 것이 차츰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키게 되었고 1974년부터 ‘어버이날’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다.

오늘 본문은 가정생활 가운데 특히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다.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비결로 제시된 것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순종할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제사하게 설명함으로써 설득력을 주고 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해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순종하라는 말은 ‘휘파쿠오’이다. 본래 이 말은 동사 ‘아쿠오(듣다)’에서 유래된 복합어이다. 언제나 부모의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모울은 이 말을 “주저 없는 마음으로 주의하여 듣는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지혜의 시작도 알고 보면 듣는 데서 시작한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구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레브쉬메’이다. ‘레브’는 ‘마음’이고 ‘쉬메’는 ‘듣는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hearing heart’라 번역을 했다. 즉 ‘듣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서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다. 듣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다. 보모 효도의 시작도 듣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라는 것은 ‘헤티스’로서 ‘바로 그것이’라는 강조의 의미가 있다. ‘옳으니라’는 것은 ‘디카이온’으로서 ‘의로운’이라는 뜻이다. 무엇에 대하여 의롭게 옳은 일인가? 이에 대해서 칼빈은 “율법이나 성서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한다. 빈센트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했다. 에디는 “자녀라는 이름 자체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사의 모든 의로운 일 중의 의로운 일은 바로 효도에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번역을 했다. 자식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을 효도라는 것이다.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앞서 나온 ‘순종하라’는 것이 정신적인 면에 속한다면 ‘공경하라’는 물질적인 면에서의 효를 말씀하고 있다. 본래 ‘공경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키베트’이다. 동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무겁다’라는 의미이고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는 ‘간장’이라는 뜻이다. 결국은 같은 의미에 속하는 말이다. 사람의 몸에서 간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즉, 부모를 간장처럼 귀중히 여기고, 무겁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헬라어로는 ‘티마’이다. 이 말에는 ‘값을 치른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식이 보모의 은공을 생각하면서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계명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은 벌써 십계명 제 2계명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니”(출 20:6)이다. 이것은 제 5계명보다 앞서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전통적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의 둘째 돌판의 첫 계명이다. (2)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첫 계명이다. (3) 제 2계명은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 것에 비해 제 5계명의 약속은 실제적인 약속이 된다.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마지막 해석을 지지하나 마지막 설이 유력하다. 의미상으로나 그 중요성에서 으뜸이라는 것이다.

마치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첫째’라는 말의 뜻은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을 때에 순서상을 보면 분명 세 번째에 속하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사랑이 첫째라는 것이다.

서론
에베소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교리(1-3잘)와 실천(4-6장)이다. 실천 편에서도 교회 생활에 이어서 가정생활이 소개되고 있다. 가정 윤리 가운데 먼저는 부부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그 뒤에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먼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며 순종한다면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를 원리적인 면에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본론
1. 왜 순종해야 하는가?(순종의 이유)
여기 ‘옳다’는 것과 ‘의롭다’는 뜻이다. ‘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부모와 바르게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요일 4:20-21). 우리는 흔히 더 큰 일을 해야 하겠기에 시간이 없다면서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는 싶지만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하겠기에,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사람을 만나야 하겠기에, 나라와 세계를 생각해야 하겠기에 다음에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 중의 일은, 의로운 일 중의 의로운 일은 바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부모에게 효행하는 것이다. 표는 결코 선행도, 공로도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외국 관광이나 보내드리는 것이 마치 무슨 큰일이나 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식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코 그럴 성질의 일이 아니다. 자식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2)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이다(2절).
여기서 ‘첫 계명’이 순서상을 의미하는 것이냐 아니면 중요성을 지적하는 말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계명은 두 가지고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4계명은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계명, 즉 인간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5-10계명은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이다. 대인 관계에서의 첫 계명은 바로 부모 공경이다. 그러니까 대인 관계의 가장 기초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모와의 관계라는 뜻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첫째부터 다섯째 계명까지는 ‘엘로힘’ 곧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나오지만 여섯째 계명부터는 ‘엘로힘’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효에 대한 다섯째 계명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맥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부모 공경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언 1장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라”와 “부모를 공경하라”함이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결과와도 같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을 담고 있기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계명은 이런 확실한 약속이 있는가 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도 담고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죄는 그 다음에 나오는 살인이며, 간음이며, 도적질이며, 이웃 탐내는 것이며, 거짓 증거하는 죄보다도 더 무거운 죄를 짓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3)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5:4).
골로새서 3:20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너의 아비와 어미를 공경하라. 그것은 너의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나로서는 자식된 도리를 다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되었다.

4)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이다(1, 2절).
본문은 부모 공경의 첫째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그것은 나에게 주시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부모와 관련된 교훈은 모두 명령형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유념하라. ‘순종하라’, ‘공경하라’, ‘청종하라’, ‘기쁘게 하라’, ‘여기라’는 식이다.

부모 순종은 계명이다. 특히, 신명기 5:16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명령한 대로 공경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왜요?’가 없다. 오로지 순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 대표가 아브라함이었다. 그는 이식을 바치라는 말씀에 ‘예’하고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말씀에 대꾸를 했다고 한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너 말끝마다 말대꾸 할거냐”하자 며느리 하는 말이 “어머님, 이것은 말대꾸가 아닌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치 따져 가면서 언제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의 절대 명령으로 알고 순종할 것이다.

2.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순종의 방법)

1) 주안에서(1절)
“주 안에서”라는 말에 대하여 메이어는 ‘순종의 특색’으로, 살몬드는 ‘순종의 질과 자세’문제로 보고 있다. 즉 전자는 주께 대한 순종이 선행된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하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의 순종이라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듯ㅇ리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것이다. 가령, 믿지 않는 부모가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 안에서’를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모님보다는 하나님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과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갈등을 일으킬 경우 성경은 하나님께 우선권을 둘 것을 말씀하신다.

2) 공경하면서(2절)
사람들은 흔히 세 가지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한다. 나와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사랑을 ‘우정’ 또는 ‘형제간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보다 높은 이를 사랑하는 것을 ‘공경’이라고 한다. 공경이란 ‘우러러 존경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부모는 긍휼의 대상이 아닌 존경의 대상임을 명심할 것이다. 공경 없이 순종하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사랑이다. 히브리어로 ‘공경’이란 ‘키베드’로서 ‘무겁다’라는 뜻이다. 부모를 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분들의 삶, 인격, 경험, 지혜를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한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전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2,30대가 되면 부모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가 다르고 부모는 배우지 못한 세대라는 것이다. 40대에 이르러서는 조금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 생각 중에는 더러 맞는 것도 있구나. 옳은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5, 60대가 되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 옳구나”사람이 철들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를 인정하고 공경하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이다. 철이 들어서야 부모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높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모 공경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다. ‘공경’에는 ‘값을 치르다’라는 뜻이 있다. 구체적으로 때를 따라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공급해 드리는 것이다.

3. 순종에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순종의 결과)

1) 잘 되리라(3절)
“잘 되리라”이것은 신명기적인 축복이다. 번영하고 형통하고 번성하고 평탄케 하는 축복이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다. 영육간의 복을 분명하게 약속했다. 부모께 순종해서 잘 된 대표적인 경우는 ‘룻’이라고 생각한다. 룻기 1:16, 17에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지는 곳에 나도 가도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기 전에는 결코 떠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다.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도 시모에 대한 그의 효도는 감동적이다. 결국 그의 후손을 통하여 다윗이 태어나고 메시야가 태어나는 축복을 입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잘 된 사람들을 살펴보라.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

2) 장수하리라(3절)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보상만도 아니다. 본문에서는 ‘땅에서’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장수를 복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65:20에는 100세에 죽는 자가 아이 같겠다고 하면서 복된 날에는 모두가 장수하게 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생에 대한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도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장수한다는 장수촌에 가 보면 거기에는 효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성경에서 효도하여 장수의 복을 받은 사람의 대표는 요나답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순종을 했다. 부모의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렘 35:20). 하나님이 친히 보상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불효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불효하고도 오래 산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 욕이요, 화임을 명심하자.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의 길로 효도를 말씀하셨다. 축복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부모를 주셨다.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하는 것도, 번영하는 것도, 그리고 장수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시끄러운 것도 알고 보면 원인이 가정 문제에 있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효가 붕괴되었기에 이 세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효를 다시 세워 성경에 약속된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굳이 오래 살겠다고 발악을 할 것이 아니라, 부모를 바로 섬길 것이다. 다른 곳에서 번영이나 장수를 찾고 구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⑥ 제목: 자녀를 양육하라(어린이 주일)
성구: 에베소서 6:4

어린이 주일이다. 어린이 주일은 1855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첼 시의 제일 유니버살리스트교회의 레오나드 목사에 의해 6월 둘째 주일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후에는 5월에 지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의 지도 아래 5월 1일이 어린이 날로 제정되었다. 1946년에는 국가의 법령으로 5월 5일이 어린이 날로 제정되었다. 교회에서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본문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부모들에게 주시는 귀중한 말씀이다. 비록 한 절밖에 안 되는 짧은 본문이지만 자식 양육의 모든 원리가 들어 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노엽게 하지 말라”이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현대 부모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고 가슴속에 새겨야 할 교훈이다.

본문 해설
아비들아: 자녀 교육에 관하여 아비들만 지적한 것은 자녀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이 주로 아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들은 대표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아담이 개인이면서도 모든 일류의 대표가 되듯이 아비들은 모든 아비들의 대표일 뿐 아니라 부모를 대표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JB에서는 ‘parents’로 번역했다. 벵겔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머니에게는 천성적인 인내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대단히 노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골로새서 3:21에서 여전히 이런 호칭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학자 요아힘 그닐카는 “유대교에서 모든 교육의 중심과 종교 교육은 전적으로 아비의 책임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은 ‘파이데이아’이다. 이것은 ‘파이데이스’(아이)에서 온 낱말로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서 온 말이다. 교육은 교육인데 행위를 통한 교육을 의미했다. NIV에서는 ‘training’으로 번역했고, 또 다른 성경에서는 ‘disciple’로 번역을 했다. 신약에서는 훈련, 교훈(딤후 3:16), 징계(히 12:5-6)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훈계’라는 말은 ‘누데시아’로서 이것은 ‘누스(마음)’와 ‘티세미(세우다)’의 합성오로 ‘마음을 세우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NIV에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했다. 전자가 행위를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는 말씀을 통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과 행위, 이것이야 말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이것은 마치 두 날개 또는 두 바퀴와 같다.

서론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자녀 교육열이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라고 한다. 학교 수업 외에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이 초등학교의 경우 93%, 중학교의 경우 96%로 나타나고 있다.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금액이 공교육비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르고 있다. 일선에서 지도하는 교육 전문가들도 과거에 비하면 학력도, 지식도, 경험도 많은 분들이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 청소년들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가 둘이 있다고 한다. 가정과 교회이다. 어느 것이 우선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시대에 따라 주장을 달리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당연 우선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가정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오늘의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가정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더불어 가정 치유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 사역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것이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해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도 한다. 성경에서 천국을 소개할 때에는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애와도 같은 보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정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가정이 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가정을 통하여 온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어떠한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가정에 미움과 갈등, 분노와 다툼, 무관심과 원망, 불안과 실망이 점점 깊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급기야 가정 붕괴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를 보라.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섭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학원 폭력이 무서워 자살한 학생이 1997년 7월 현재 20명이 넘는다. 게다가 여학생들까지 여기에 뒤질세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들의 성적인 타락상이 극심하다. 십대들의 음란 비디오 사건의주인공은 15살짜리 여중 2학년생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벌거벗고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로 번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들인데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마약 사용이며 자살 그리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녀 교육의 원리는 무엇이며 그 지침은 무엇인가?

본론
1. 양육의 주체
“아비들아”라는 말씀에서 주체가 드러난다. 즉 자녀들을 가르칠 사람은 학교의 선생님이 아닌 부모들이다. 그런데 우리네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녀들의 교육은 모두 학원 아니면 학교에 위임해 버린 상태이다. 성경은 교사 중에도 부모만한 교사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포로기 전까지는 학교가 없었다. 가정교육이 정부였다. 부모가 교사요, 성경과 전승과 부모의 삶 자체가 교과서였다. 그러던 것이 포로 후기를 지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회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선다싱은 “어머니의 가슴은 나의 신학교였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고, 선에 대한 씨를 뿌려주셨다”고 했고, 허버트는 “백 명의 교사보다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낫다”고 했고, 스펄전은 “가정에서 성경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그치는 자는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했고, 링컨은 대통령 취임시에 낡은 성경을 들고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했고,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을 위한 학교”라고 했다. 이 모두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자녀들을 가르고 교육하는 주체는 회당도, 학교도, 사회도 아닌 가정이요, 그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2. 양육의 대상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양육의 대상을 밝혀낸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자녀관을 정립해야 한다. 어디서 잘못되는가 하면 자녀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성경적인 자녀관은 이렇다. 먼저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 127:3)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녀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창 33:5)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서 기르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시 127:3,4, 삿 13:2). 결코 내 물건, 내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녀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교육 내용이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3. 양육의 방법
본문에서 양육의 방법으로는 부정적인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다.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을 동시에 가르쳐 주고 있다. 세 가지로 가르쳐 준다.

1) 노엽게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징계와 분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를 한다(잠 13:24, 19:18).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노함’에 대하여 공동 번역에서는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로 번역을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라”로 번역을 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감정이 상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핸드릭슨은 6가지를 지적한다. (1) 과잉 보호 (2) 편애 (3) 낙심케 하는 일 (4) 의견의 불일치 (5) 자녀들에 대한 소홀함 (6) 가혹한 처벌이 주어질 때라고 했다. 바클레이는 세 가지로 지적했다. (1)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때이다. 즉 ‘내가 너 만할 때는 그런 일을 안 했다’는 식의 꾸지람이다. (2) 지나친 통제 때문이다. (3) 격려에 인색할 때이다. 그래 루터는 이런 말을 한다. “아끼면 자식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놓아 두어 자식이 잘 했을 때에는 그 사과를 주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 자녀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로는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을 들 수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도화지와 크레용을 나누어 주면서 어머니를 그려보라고 했다고 한다. 한 어린아이가 특이하게 어머니를 그렸다. 그것은 입과 손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기형적이리만큼 크게 말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우리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나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손으로 때려요”라고 대답하더란다.

도대체 아이들의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이들은 상처를 입는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같이 느껴 보려는 경험을 갖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교육은 어렵게 될 뿐이다.

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가. 그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골로새서 3:21에서 “자녀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주의 교양으로 하라.
여기 ‘교양’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training’ 또는 ‘disciple’로 번역한다. 이것은 ‘행동을 통한 교육’을 의미한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들에게는 산교육이 된다.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을 통하여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들은 항상 옳은 말만 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해야 할 상황에서는 스스로 한 말을 부정해 버린다. 정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도 자기 실속 챙기기에 바쁜 모습이다.

어느 부모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고 한다. 매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6세 이하는 무료’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물어보면 여섯 살이라고 해라”로 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버지에게 반문했다. “나보고는 거짓말 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거짓말을 하라고요?”하더란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이것을 따로국밥이라고 하던가. 그러고도 그 자식이 정직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이런 예들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전화가 걸려오면 “나 없다고 해라”고 아이에게 일러준다. 부모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식들은 들어가 공부하라고 한다. 부모들은 밥상에 앉기만 하면 입맛이 없다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때마다 밥 안 먹는다고 타박이다. 부모들은 자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싸우지 말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여기서부터 교육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부모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그대로 흉내 내게 되어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이제는 말 가지고 교육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행동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때다. 원만한 부부관계, 부모들의 신앙인격, 안정된 가정, 교회생활의 헌신과 봉사, 이런 것들이 모두 산 교육의 내용이 됨을 알자. 자녀들은 귀로 배우고 눈으로 배우는 자들이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된다. 그래서 본문은 “주의 교양으로 교육하라”고 말씀한다.

3)주의 훈계로 하라.
여기 ‘훈계’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는 ‘instruction’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말씀을 통한 훈련’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한다. 특히 디모데후서 3:16,17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구세군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캐서린 부스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훌륭한 자식들로 성장했다. 교육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언제나 악마보다 한 걸음 빨랐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악마가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나쁜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람들은 대개가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부모들은 어떤가. 기독교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자녀 때문에 실망했을 때가 언제냐”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2위는 결혼 생활에 실패했을 때, 3위는 대학졸업 후 취직이 안 됐을 때, 4위는 자식이 입원했을 때, 5위는 부모에게 반항할 때, 6위는 무단가출했을 때, 7위는 신앙생활 잘못할 때였다. 순서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분명히 신앙인이면서 신앙교육에는 별로 무관심한 상태인 것이다. 자식들이 학교 한 번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면서도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예사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녀들에 대한 말씀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가 크다. 사람의 뇌는 만 4세까지 95%가 발육되고 나머지 5%는 성인이 되기까지 발육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 성격은 만 4세 이전에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씀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사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의 말씀 훈련 때문이다.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어려서부터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이다.

결론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1%가 유대인이고 약 70만 명의 변호사 가운데 20%가 유대인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 가운데 35%가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각계를 주름 잡는 실질적인 세력들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적인 교육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 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를 힘쓰며 기도할 것이다. 훌륭한 인물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있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 김종렬, 98 예배와 강단, 1998년, pp.198-218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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