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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누가복음 3장 7절~14절)
오늘은 먼저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이 일하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문화, 도덕, 종교에 이르기까지 혼란과 혼돈이 극심하여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했어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악을 행해도 나라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정당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또는 갖가지 거짓과 죄악이 당시의 부패한 종교적인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그러한 혼돈의 시대에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오시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관심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혼란이 아니라, 벌써 4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에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오늘날은 어디에 계시는가 말입니다. 모세를 보내시고 다윗과 솔로몬을 보내어 나라를 주관하시고 여호수아를 보내어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시던 하나님이 오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이나 심지어는 바벨론 포로로 어려운 수난을 겪는 현장에서도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 있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동안 그래도 기대를 걸고 그 말씀이 예언하는 바에 꿈을 걸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지난 4백 년 간은 선지자가 뚝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암담하고 막연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광야에 세례 요한이 나타납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팡이를 든 거친 모습으로 나타나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소리지르자 사람들은 그 뜻을 다 알지 못하지만 이제야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권고하시어 구원하시는가보다 하고, 많은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 회개를 하고 메시야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때에 좋은 마음으로 나온 사람도 있지만 구경삼아 나온 사람도 있고, 남이 가니 따라나간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세례 요한을 시험하러 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물밀듯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은 무서운 책망과 심판을 가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무섭게 외치며 참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삶입니다. 그는 이방 땅에 살면서도 믿음과 약속을 지켜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아브라함을 닮은 데가 하나도 없으면서 전통적으로, 또는 혈통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책망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을 모독하지 말고 내적으로, 즉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의 후손답게 행동해야 진정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그들이 나온 동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저주받지 않기 위하여, 망하지 않기 위하여, 병고침 받기 위하여, 이 무서운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 도피하려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기 자체를 불순하게 보고, 순수한 동기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 맺기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사실 저들이 세례 요한 앞에 와서 무릎 꿇고 회개하며 세례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회개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여기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는 돌아가서 죄지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겸손과 생활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우리 생활의 모든 현장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면 사람 앞에서도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회개한 자를 받아들이며, 또한 회개한 자로서의 진실을 가지고 인간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즉 긍정적이요 생산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성전의 영역이 온 세계로, 온 우주로 넓어질 수 있도록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저들은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본문에서 세 번이나 나타나는 질문입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저작가로 조지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정신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신조를 세웠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다. 둘째, 이러한 사람을 지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무이다. 셋째,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 하면 이제는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그는 이상의 생활 신조를 세우고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 신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물음이 있어야 하고 해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있어야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버려지고 아름다운 신앙 자세가 확립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니 뭐니 해서 자기 고집, 자기 편견이 아주 강합니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부모님과 의논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주장하여 타협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조금만 옆에서 충고해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가니 걱정 말라는 투입니다. 신앙의 제일보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주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찬송가 중에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찬송은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인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동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뜻을 먼저 깨닫고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물음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하여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에는 오해가 많습니다. 첫째,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신앙, 또는 관념적인 신앙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둘째,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게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력이 좋아 저는 설교를 하면서도 2층 저 뒤에 앉은 분들의 표정까지도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설교 도중에 서로 옆에 앉은 사람끼리 쿡 찌르며 눈짓하고 때로는 귓속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받는지 들을 수는 없지만 대략은 눈치를 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부부라면 서로 당신이 잘 들어 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만은 옆자리에 누가 앉았거나 상관하지 맙시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를 묻는 시간입니다. 잠깐 동안만 자녀나 남편을 잊어버리시고 아내인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자는 것입니다. 좋은 남편으로서, 좋은 아버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십시다. 요즘 우리들은 나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데, 그러다가는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를 할 때도 "저 사람을 감동해서 나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또는 "저 사람 마음을 움직여서 돈 좀 꾸어 주게 해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남의 이야기뿐입니다. 이제부터 남의 이야기는 잠깐 접어두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의무만 묻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하나님이 하실 일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께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좀 망해야겠고, 이런 사람은 복받아야겠는데,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십니까?"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께 편지를 쓰게 했는데, 한 아이는 "하나님 힘내세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기도문을 썼다고 합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고를 하고 주먹질을 하며 심지어는 고문 노릇까지 하겠다고 나서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하나님이 하실 일만 기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할 일을 묻지 않는 여기에 우리의 원망과 불평과 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많으셔서, 그 지혜의 결과로 오늘 현실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현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 말씀이 있고 섭리가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물으십시다. "하나님, 나는 무엇을 하리이까?"---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며 실존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세례 요한에게 질문한 사람들은 세 계층의 삶으로, 일반 백성과 세리와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오리까'라는 질문은 모두가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 가지 답은 우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량적인 변화나 구조적인 변화나 개혁, 또는 외적인 혁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 성질이 급하고 극단주의적인 사람이라면 그의 대답에서 큰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좀 화끈하게 때려부수라든지, 혁명을 일으켜라, 또는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겠다고 대답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직업을 바꾸라든가 세상의 구조, 권력의 구조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의 질서가 바로잡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회개의 열매가 있어지기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세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답한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일반 사람들에게 대답하기를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이것이 근본이요,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라"---이것은 결코 가진 자의 도덕성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부가 죄라든지 혹은 권력이 죄라는 이야기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의(義)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두라는 뜻입니다. 좀더 설명하면 평등을 생각하여 소유의 개념을 분명히 하며 이기심을 버리고 공동체 의식을 바로 가지자는 것입니다. 정말 요새처럼 공동체 의식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돈을 가진 재벌은 편안한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노동자가 살아야 재벌도 삽니다. 권력이 있다고 그들만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아프면 함께 아프고, 한 사람이 헐벗으면 함께 헐벗게 됨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몇 년 동안 가뭄이 심해지면 수리 시설도 없고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하나님도 몰랐으니 그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여러 가지 미신적인 행위를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보면 몇 가지 잘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한발이 심하면 혹시나 억울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지나 않나 해서 죄수들을 풀어 주는 일을 했고 빈민 구제를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이조 초기에 있었던 일로서, 궁궐에 있는 궁녀들을 궐밖으로 보내어 시집을 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궁녀들이란 이름만 좋았지 얼마나 불쌍한 여 자들입니까? 그래서 비가 오지 않으면 혹시나 그들의 한이 맺혔나 해서 결혼들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는데 먹을 것이 많지 않아 늘 서로 싸웠다고 압니다. 서로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싸웠는데, 어느 날 정말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는 이제 자기 혼자서 먹고 즐기겠다고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못 가서 먼저 죽은 물고기가 썩어 물이 오염되어서 남은 물고기도 죽고 말았답니다. 웃어넘길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두 청년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무서운 곰 한 마리를 만났답니다. 재빠르게 한 청년은 나무 위로 도망가고, 도망가지 못한 청년은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렸습니다. 곰이 땅에 엎드린 청년에게 와서 그 얼굴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냄새를 맡더니 죽은 것 같자 그냥 가버리더랍니다. 곰이 멀리 간 다음, 나무 위에서 내려온 청년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곰이 자네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린가?" 이 친구는 시치미를 떼고, 위험할 때 혼자 도망가는 친구와는 다시 만나지 말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고 말했답니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해도 결국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세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벌 옷을 가졌거든 그 한 벌을 나누어주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열매를 통해서만 문제의 해결이 있다고 세례 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세리들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에 대답하고 있습 니다.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세리들은 대표적인 죄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정한 세 외에 더 받지 말라, 즉 공의를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군인들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군인들은 로마 군인으로 곧 헤롯의 군인들입니다. 그 당시 그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사람에게 강포(强暴)하지 말며, 무소(誣訴)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언젠가 입학철에 한 여집사님이 가난한 고등학생에게 등록금을 보태었으면 좋겠다고 약간의 돈을 가져왔습니다. 그분도 생활이 어려운 분임을 제가 알기에 어째서 이런 돈을 가져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당신 아들이 이번에 고등학교 3학년인데,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입학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내 아들만 입학하게 해 달라고 조르지 말고, 남의 아들 합격하고도 돈 없어 입학 못하는 사정에 눈을 좀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의 재림을 기다립니까? 아니, 민주화된 조국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복지 국가를 기다리느냐 말입니다. 잠깐만 멈추어 생각합시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거나 누구에게 특별히 기대하지도 말고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합니까?"----현실 이대로 평등을 생각하고 민주의식을 지니며 공동체 의식과 소유 의식을 바로해서 공의와 자유를 구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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