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잠언 24:9-22)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미국의 야구 역사상 베이브 루스(Babe Ruth)만큼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홈런 왕' 베이브 루스는 그의 선수생활을 통해 통산 714개의 홈런을 쳐냄으로 홈런 부문에서 단연 세계 제일의 자리에 올랐고, 이것은 1976년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홈런왕 베이브 루스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숱한 고난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트럭 아웃을 당하는 데에도 세계 최고의 기록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714개의 홈런을 쳐내기까지는 1330번이나 삼진을 당하는 쓰디쓴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홈런을 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삼진 기록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만을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사형통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무사태평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무사태평을 어떻게 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을 바라는 잘못된 꿈을 이제는 버리십시오. 그 생각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망조입니다. 태평함으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여러분, 만사형통은 바랄 것이 못됩니다. 사실, 만사형통이란 세상에 있지도 않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으니, 그것을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실패 없는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그런 꿈을 가졌다는 데에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망조가 있습니다. 성공이란 많은 실패 끝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출발한다면 아무 어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가 겪었을 실패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야기를 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의 성공을 위하여 그 많은 실패를, 그 많은 역경을, 그 많은 쓰라림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패 끝에 성공이 있고, 역경 끝에 성공이 있다는 것을 거듭 확실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모든 사람에게는 실패와 역경이 따른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모든 사람은 실패와 역경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의로운 자는 만사형통하고, 악한 자는 절대로 성공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마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시적인 성공도 있고, 일시적인 실패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의인과 악인은 공존하기도 하고 똑같은 모양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악인에게 형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잠깐이요 그 끝은 멸망이라고 말입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잠 24:1)"-----악인의 형통은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부러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질투하지도 분해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자란 시골에 좋지 못한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그다지 격언답지는 못한 격언으로 가끔 동네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천하에 아주 못된 사람이 세도를 부리거나 일이 잘 풀리거나 하면 속이 상해 돌아서서 '앞산의 호랑이는 무엇을 먹고 사나?'하고 욕을 합니다. 겉보기에는 점잖은 말 같지만, 그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앞산의 호랑이는 저런 사람 좀 잡아먹지 않고 뭘 하나 하는 무서운 내심이 담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악한 사람이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저런 사람에게 벼락 좀 치시지 않나?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같이 선한 사람을 왜 몰라주시나?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 말라, 잠간만 기다려라, 악인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다보면 어느 사이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비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투하지도 시기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고 기다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힘주어 말씀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16절)"-----여기서 '의인'은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절대적인 의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의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법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런 의미의 신앙적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완전무결한 의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성과 도덕성을 지닌 의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인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신다는 말 씀입니다. 그가 노력했기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일어날 때가 되었기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심으로 일어난다고 말씀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실패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실패를 일시적인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큰일이 아닌 작은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심판이 아닙니다. 시련일 뿐입니다. 내가 당하는 이 어려움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 있는 시련이다-----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둘째로, 이 실패 속에 하나님의 경륜하시는 뜻이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패의 원인이 내게 있습니다.
내게 고쳐야 할 것이 있고, 내게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자신의 태도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 사건을 억지로 성공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다시 하겠다고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을 정비합니다. 나의 자세를 바꿉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그 책임을 물으면서 나의 태도를 바꾸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셋째로, 실패 속에서 반드시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13, 14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잃었지만 지혜를 얻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지만 믿음을 얻었습니다. 사업을 잃었지만 친구를 얻었습니다.
지위를 잃었지만 겸손을 얻었습니다. 진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실패함으로 얻은 것이 많습니다.
언젠가 읽은 경영에 관한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디다. '성공한 사람에게 가서 배우려 하지 마라. 그는 제 자랑만 늘어놓을 것이다. 네가 진정 경영을 배우고 지혜를 얻으려거든, 실패한 사람을 만나라. 그가 지혜를 말해줄 것이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실패와 역경 속에서 보다 큰 것을 얻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로 적자평가를 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결산에서 흑자입니다. 늘 흑자결산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은 앞에 있을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믿기에, 실패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시련 끝에 보다 더 완전한 복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의'라고 하는 긍지를 잃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고, 비참한 일, 형편없는 일을 하다가 실패한다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는 했으나 떳떳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긍지가 있습니다. '나는 진리로 살았노라'라는 교만하지 않은 자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의인이 실패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모두가 내 진심을 몰라준다 해도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이러한 긍지를 가진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어떻습니까? 악인은 성공하면 교만해집니다.
전부가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와 자기 지혜로 된 것인 양 교만합니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귀족화합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의 볼품없는 모습입니다.
또한 악한 사람이 실패하면 시끄럽습니다.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때문이요, 세상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이렇듯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이 실패하면 말이 많습니다. 변명이 많습니다. 성명서가 많습니다. 뭐가 그리도 복잡합니까? 보십시오. '모든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비하여 악한 사람은 실패함으로 몹시도 시끄러워집니다. 책임 전가, 원인 전가 하느라고 바쁩니다. 남에게 비난을 퍼붓느라고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모릅니다. 점점 더 마음이 굳어져갑니다. 그 태도에도 변화가 없습니다. 완악해집니다.
결국은 뚝 부러져 절망, 패망하고 맙니다. 이것이 악인의 모습입니다. 한번 넘어짐으로써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파멸지향적인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문제를 영구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처한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요 일시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깨지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하나의 사건을 극대화하여 자기의 실패와 성공이 우주적인 문제인 양 착각을 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의 사건에 전 인생을 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도박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행히 저는 도박을 할 줄 모릅니다만, 보십시오. 도박하는 사람들은 얼마씩 돈을 걸면서 판을 돌려나가다가 맨마지막 판에 가서는 가진 재산 모두를 한꺼번에 걸어버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예 집문서까지 다 D똕TXT틮갖다놓고 화투 한 장에 온 인생을 걸어버립니다. 여기서 이기면 성공이요 지면 망하는 것이다----한 장의 화툿장에 온 인생을 내맡겨버립니다. 이렇듯 하나의 사건에 자신의 온 운명을 내맡기는 것이 바로 악한 사람의 체질이요 특징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건이요 부분적인 일일 뿐입니다. 일시적인 일에 전 인생 전 운명을 거는 자세, 바로 이런 것이 악한 사람이 가진 파멸지향적 체질인 것입니다.
입시 철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는 요즘도 보니 대학입시에 떨어져서 자살하는 학생이 있습디다. 대학입시 가지고 왜 죽습니까? 아까운 청춘을 왜 버립니까?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어버렸느냐 말입니다. 사업에 부도가 나도 그렇습니다. 부도가 난 아픔은 알겠습니다마는, 왜 그것 때문에 자살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안타까운 나머지 드리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우리 교포들 가운데 강간을 당하는 젊은 여성들이 더러 있습니다. 정조를 유린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이 어수선하다보니 요즘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기는 합디다. 어쨌든 이 경우에 가만히 보면 미국사람들은 일주일 정도 울고 나서는 툭툭 털고 일어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하고는 자살을 하고 맙니다. 어째서 이것이 끝난 것입니까? 물론 정조는 소중한 것입니다 마는, 생명과 비길 것은 못됩니다. 그런데 왜 끝나야 합니까? 만일 잃어버린 정조 때문에 결혼을 못한다면 하지 마십시오. 결혼 안하고도 할일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웨딩마치를 울리며 화려한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이렇게 못 살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내 인생의 많은 것 가운데 결혼 하나만 포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도 복잡합니까?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그 고귀한 생을 그렇게 끝낸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사소한 일 하나에 온 운명을, 온 생명을 다 걸고 왜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 고민합니까? 그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는 아무도 가부를 말하지 말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련을 통해서 더욱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파멸지향적인 사람들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 자신을 세계와 대등하게 본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망하면 세계도 망하고, 내가 잘되면 세계도 잘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작은 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의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먼저, 의인은 지혜가 세상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지혜가 송이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압니다. 다 잃었어도 지혜를 얻었으면 된 것이요, 믿음을 얻었으면 된 것입니다. 다 잃었어도 진실을 얻었다면 결국은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가 아닙니다. 절대 실패일 수 없습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의 손에서 교육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건들은 배움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사건 속에서 성장하고 깨달아가고 고치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못도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치도록 해주십니다. 내가 못 끊는 것은 하나님께서 끊게 하십니다.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이나 피우던 분이 담배를 끊었다기에 하도 신기해서 그 부인에게 물었더니 "안 끊을 수 있나요? 간이 나빠졌거든요" 하더군요. 보십시오. 내가 못 끊는 것은 하나님께서 끊게 하십니다. 비상수단을 써서라도 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건들----모든 실패와 역경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머니가 자신을 무릎에 뉘고 읽어주시던 이 귀한 성경구절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대통령이 된 링컨만을 생각하십니까?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역경을 겪었는지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링컨은 그 많은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낙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희극적으로 삽니다. 여러분, 인생을 믿는 사람은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을 먼저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리 생각한다고 성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목숨걸고 그렇게 발악하듯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악착같이 취하려 해서 얻어지는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에게, 선한 사람에게, 진실한 사람에게,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이 성공입니다.
여러분, 일곱 번 넘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실패를 통하여 우리에게 최종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2장 5절~11절) (0) | 2024.03.19 |
---|---|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누가복음 3장 7절~14절) (0) | 2024.03.19 |
은혜를 받은 자(누가복음 1:26-38) (0) | 2024.03.19 |
은혜로 주어진 선물(에베소서 2:1-10) (0) | 2024.03.19 |
오직 긍휼의 뜻(마태복음 9:9-13)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