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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2장 5절~1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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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그가 세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옥중 서신'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위험과 고생 가운데서 써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별명은 그와 대조적으로 '희락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옥중(獄中)에서 써 보낸 서신인데도, 그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애정과 성도로서의 기쁨이 내재되어 있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희락(喜樂)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옥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가 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과 감사로 차 있습니다.

저는 빌립보서를 특별히 사랑합니다. 한때는 빌립보서 전체를 암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많은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를테면 사도 바울의 선교비를 조달하였고, 그가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위문금을 모아 보내면서 잘 돌보아 드리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특징은 퍽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마는, 내부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해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빌립보서 22절에서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라는 간곡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도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하나됨의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까닭을 이로정연(理路整然)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교만이 있으면 하나되지 못합니다. 교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하나됨이 없습니다. 둘째는 자기 우월감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저마다 저 잘났다는데 하나될 리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나됨이 있습니다. 남편인 나보다 아내가 더 낫고, 아내인 나보다 남편이 더 낫고…… 이렇게 상대방을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길 때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어느 사회이든 너도나도 제가 잘났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가정이나 사회는 결코 하나로서 지탱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집약적(自己集約的)이기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내가 자기 일만 생각한다면 남들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이익만 챙기고 나의 의견만 내세운다면 절대로 하나되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2:3-4)"---교만, 우월감,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다 버리라고 한 이 말씀에 이어, 오늘의 본문은 한걸음 나아가 적극적으로 할 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즉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악덕을 모두 버려 자기를 비운 다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헬라말로 '프로네이터'인데, 이것은 단순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가짐' '마음의 자세(attitude)'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말씀을 어떤 성경에서는 'Have this min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마는, 좀더 깊은 뜻으로 해석하여 'Your attitude should be……'라 번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다시 말하면 마음 가짐을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게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행동이나 조직이나 구조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말끝마다 단결을 부르짖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되어야 한다는 말을 요즘처럼 많이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되기 위해 대화를 한다느니 회동(會同)을 한다느니 합니다. 의견을 하나로, 즉 합의(合議)를 보기 위해 만나는 것을 굳이 문자를 써서 '회동'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엇이라고 표현을 하든, 뜻을 하나되게 하자는 것이 목적인데, 그것이 안됩니다. 별의별 소리를 다 주고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고도 먼 사이'라든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30, 40, 아니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 사이도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서로가 남남입니다. 문제는 마음인데 그 마음이 나의 마음이거 나 너의 마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너의 뜻, 나의 의견과 너의 의견을 아무리 좁혀 봐야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이 마음'-----그리스도의 마음이라야 하나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 시무할 때의 일입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온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경찰관들이 가위를 들고 지켜 서서 이른바 '장발족(長髮族)' 단속을 할 때입니다. 이 청년도 장발족인데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에 나와 앉았어요. 보니까 머리를 어깨 밑으로까지 길렀어요.

거기다 수염까지 길렀습니다. 장로님들이 그 꼴 보기 민망했던지 순경한테 얘기해서 잘라 주도록 할까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두세요. 무슨 곡절이 있겠지요 해 놓고, 한번은 그 청년을 당회장실로 불러서 머리를 왜 그렇게 기르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청년은 대답이 없습니다. 다만 벽에 걸린 액자만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입니다. 액자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어서요. 이것이 청년의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손가락을 닮겠다 해도 예수님 닮겠다는 데야 할말이 없지요. 그러나, 긴 머리 닮는다거나 얼굴을 닮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닮습니까? 마음을 닮아야지요. 마음가짐을 예수님의 그것과 같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오늘의 본문이 세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비어(2:7)"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우는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말로 '에케노센'이며, 영어로는 'emptied him-self'라는 뜻인데, 기독론()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용어입니다. 비운 것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인데 어째서 스스로 다 비워 버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다----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권리,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능력, 자기 의견을 다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의 생애를 연구하여 그 전기를 쓴 피어슨 박사가 한번은 조지 뮬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조지 뮬러는 박사님, 뮬러가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언젠가 무슨 계기로 뮬러라고 하는 존재는 땅에 떨어져 완전히 깨어지고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느라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나 아무개는 완전히 깨어져 죽어 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내일 죽는다고 하는 것은 철학입니다. 어제 죽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이미 죽어 버렸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라는 존재는 십자가에 장사지내 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있으나 없는 자처럼, 알아도 모르는 자처럼, 의인이되 죄인인 것처럼, 유능하되 무능한 자처럼, 유명하지만 비천한 자처럼, 그렇게 자기를 비우고 살아갑니다. 결코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마침내 자기를 이렇게 비우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낮추시고(2:8)"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지마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습니다. 이 말씀의 헬라말인 '에타페이노센'은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켰다는 의미로,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 겸손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나 아닌 형체를 스스로 취했다는 말입니다. 이 행위는 능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종의 형체를 가진 상대방의 신분으로, 내가 사랑하는 자의 형체로, 내가 위하는 자의 처지로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체를 가지고 사는 그 모습, 이런 비하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약해지고 죄인 되고 종 되고 비천해지고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낮추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랍비가 제자와 함께 길을 가는데 제자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진리란 길가에 있는 조약돌처럼 널려 있다 하시면서 어디에나 진리는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진리를 터득하지 못할까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진리를 조약돌처럼 많지만 사람들의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그 돌을 주울 수가 없지."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 됩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2:8)"-----복종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후페쿠스'라고 하는 이 '복종' 역시 행동적인 용어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한다는 것은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입니다 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 너희들 각자 돌 하나씩을 가지고 올라가자 하고 산 어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충성스럽게도 아주 큰 돌 하나를 들고 끙끙대면서 올라갔습니다. 요한은 아주 예쁘게 생긴 돌을 골라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야고보는 성미가 급해서 아무 돌이나 마구잡이로 집어들고 올라갔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돌은 왜 가져가자고 하시나? 산 위에도 돌은 많은데…… 하면서 마지못해 하나 들고 가다가, 무거워지면 도중에서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또 가다가 좀더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그것도 또 다른 것으로 바꾸고 해서 어쨌든 산 위에까지 하나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역시 말썽입니다. "그것 참, 돌은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하고 투덜거리더니, 아주 거역할 수는 없고 해서 주워 간 것이 밤톨만한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오르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는데, 제자들이 들고 있는 돌이 모두 떡으로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큰 떡을 가지게 되어 모두에게 나누어주는데, 요한의 돌은 아주 맛있는 떡이 되어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야고보는 마구잡이 덕이요, 도마의 떡은 설었으며, 유다의 떡은 말할 것도 없이 밤톨만한 것이었습니다.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이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곧 복종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어떤 일이든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당신의 뜻이 따로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복종하십니다. 썩 좋지 못한 표현이지마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 욕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복종의 덕을 못 배웠다고 나무라는 소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복종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 살아가는 모양이 다른 법입니다. 복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직장 생활에서나 사회 생활에서나 늘 불평이나 원망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안 되며, 세상 살아가기 힘들어합니다.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가서는 딱 꺾어 버리고 복종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Jesus Christ, Superstar'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추리해서 좀더 길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대사를 가끔 외어 봅니다. "정말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내일 아침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죽고 나면 내게 주시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이렇게 모순되게 이렇게 죽어가고 말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좋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하고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통이요 수치요 모순이요 부조리입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모순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간혹 보면, 어려운 시어머니가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말대꾸를 하면 "어느 앞이라고 또박또박 말대꾸냐!" 하고 시어머니가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며느리는 "말대꾸하는 게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똑바로 쳐다봅니다. 여러분, 이치 따지고 순종할 것입니까?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는 척,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원치 않은 실패 투성이의 과거 경험 따위는 더 이상 내놓지 맙시다. 뚝뚝 잘라 버리고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로부터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만왕의 왕으로 높이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주되심(Lordship)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주되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왕권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사람, 자기를 비하(卑下)시킬 줄 아는 사람,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은 왕되지 못합니다.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은 높아지지 못합니다.

복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화합이 없는가? 왜 하나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비굴하게 살아야 되는가?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갈 때에,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높여 주실 것입니다. 왕권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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