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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여기를 떠나소서(마태복음 8장 28~34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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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떠나소서(마태복음 82834)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한마디로 '예수의 승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을 고치심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이기시는 주의 승리를 말해주는 것이요, 풍랑을 잔잔케 하심은 자연을 이기시고 자연을 다스리심입니다. 또한 두려움을 이기심은 인간의 가장 약한 점, 모든 허물된 것을 이기심입니다. 사망을 이기심은 절망을 이기심이며, 귀신을 이기심은 인간의 세계만이 아닌 영의 세계까지 다스리시고 승리하신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이적은 곧 승리입니다. 승리를 계시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드십(lordship)-그가 만물을 다스리심입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사건을 보았습니다. 자연을 다스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병자에게 말씀하시고, 죽은 자에게 말씀하시고, 자연을 향해서 고요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대상은 특별히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을 향해서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이기에 권세 있게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도 순종하는 능력 그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에 이어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곧 강한 귀신을 이긴, 강한 귀신을 다스리신 사건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은 흔히 난해 구절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겸손한 마음으로, 온유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으면 그 본뜻을 놓치기 쉽습니다. 주변적인 것은 너무 신경을 쓰고 가장 핵심적인 것에 마음을 쓰지 못하여 그만 본뜻을 놓치고 쓸데없는 생각에 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시험이 되기도 하고, 아예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거라사는 이방땅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니요, 유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방사람들이 거기서 돼지를 치고 있습니다. 돼지를 방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돼지를 기르고 있는데,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공동묘지에 귀신들린 사람이 둘 있었습니다. 흉악하게 귀신들려서 얼마나 포악한지 누구도 상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로 지나다니지도 못했습니다. 소리지르고 따라와 해코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곳을 지나가십니다. 두 미치광이가 달려나와 소리지릅니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소리치면서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하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하십니다.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갑니다. 귀신들이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비틀비틀 귀신들린 돼지들이 되어 비탈로 내리닫더니 모조리 물 속으로 들어가 익사하고 맙니다. 사건이 이렇습니다.

돼지 치던 목자들, 큰일났습니다. 동네에 들어가 떠들어댑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니 큰일났습니다. 그렇게 능력 많은 분이니 함부로 할말도 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대들 수도 없습니다. 겁납니다. 손해를 본 분한 마음도 있고 해서 한다는 소리가 그 마을을 떠나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우리가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니 떠나주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 난해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귀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귀신이 존재해서 말썽을 부리느냐, 사람도 미치게 만들고 동물에게 들어가 동물도 미치게 하는 악귀가 있어서 많은 손해를 끼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둘째, 귀신이 예수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쫓아내지 마시고 멸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말고 저 돼지 속에 들어가도록 해달라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귀신은 혼자 존재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들어 붙어야 사는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귀신이 예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귀신의 청인데 예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가라."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악령도 사단도 마귀도 하나님의 능력 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밖에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 못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맞서고 있다, 하나님과 마귀가 맞서 싸우는 가운데서 우리는 이쪽도 못 붙고 저쪽도 못 붙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중간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납득이 되건 안되건 분명한 것은 사단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문제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쳐준 것은 고마우나 왜 남의 생업까지 파괴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보이신 것까지는 좋습니다마는 능력은 언제나 건설적이고 생산적이며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데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이 한 사람을 살리는 대신에 돼지 치는 사람들에게는 손해를 끼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을 때에는 그 은사가 모두에게 이로워야 됩니다. 내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워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이롭고 한 사람에게는 손해가 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대목은 난해한 구절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 의심나는 데가 있거나 이상한 데가 있거든 당장에 해석하고 넘어가겠다며 붙들고 앉아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두 가지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그 말씀은 어려운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당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잘못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해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수준이 아직 그것을 깨달을 만큼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좀더 성숙하면, 좀더 나아가 다른 차원에서 내게 필요할 때에 이 말씀도 알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찬송에도 있지 않습니까?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내게 필요한 만큼 가르쳐 주십니다. 한꺼번에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모르지만 내일은 알 것이요, 지금은 모르지만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뜻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본문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 읽기는 생선 먹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생선을 지져서 먹을 때에 어두일미(魚頭一味)라 하여 대가리서부터 와작와작 씹어먹지 않습니다. 젓가락으로 살만 발라서 먹고 가시는 남기지 않습니까? 목에 걸리는 것은 빼고 먹을 수 있는 것만 먹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서양사람들은 그 뼈와 가시를 모아서 다시 바싹 구워(rebaking) 갈아서 아예 가루로 만들어 국에 넣어 마셔 버립니다.

칼슘이므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방법이 이렇게 조금 다른 것입니다. 성경도 그러합니다. 어떤 구절은 살코기같이 물렁물렁해서 쉽게 이해가 되는가 하면, 사실은 그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처럼 조금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부할 것도 아니요, 불합리하다 모순이다 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의심을 갖지도 말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해가 될 것이다, 오늘은 내게 필요치 않은가 보다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읽고 또 읽고 하느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뜻을 이해할 날이 올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이렇게 대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어려운 말씀입니다 마는 한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먼저 귀신들린 자의 형편을 보십시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대체로 어떻습니까? 귀신들린 사람,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곧 정신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제정신을 제가 가누지 못합니다. 악령이 지배하는 대로 따릅니다. 자기조절 능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라사의 이 사람만 귀신들린 줄 알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귀신들린 사람 참 많습니다. 늘 귀신들려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끔씩 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짱하던 사람도 느닷없이 귀신들린 짓을 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한번 냉정히 물어보실 일입니다. 어느 때에 내가 이런 소리를 했고 저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거친 소리를 하고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단 말인가.' 내 마음으로 였습니까? 내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뭐가 씌어서 그랬던 게 틀림없습니다. 내 속에 나와 전혀 관계없는 또 하나의 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또 하나의 내가 있어 엉뚱한 짓, 스스로도 깜짝 놀랄 행동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감히 내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음이야!'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을 빼앗겨서 제정신을 가눌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판단을 못합니다. 무엇엔가 끌려서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에, 어떤 사람은 자존심에, 어떤 사람은 어떤 사건에 너무 집착합니다.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사람을 미워합니다. 자학합니다. 몸도 약해집니다. 죽어가면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바보 같은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완전히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손해요, 남도 손해요, 하나님께도 영광되지 못하며 교회에도 손해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내 마음을 그로부터 출애굽할 수가 없습니다.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자기제어의 능력이 없습니다. selt-control을 못합니다. 이런 꼴이 바로 귀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대체로 귀신들린 사람은 공포에 쫓깁니다. 여러분도 귀신들린 사람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여러 번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도 무섭고 저 사람도 무섭고, 반가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아무도 만나려들지 않습니다. 그저 자꾸 쫓기는 것입니다. 방이 넓으니 한가운데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도망을 다닙니다. 뭐가 그리도 무서운 게 많은지 사방이 무서운 것 투성이입니다. 물론 영적인 문제입니다. 어쨌든 공포에 쫓깁니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서움에 쫓겨서 자꾸만 뒤로 물러서고 불안에 떱니다. 비사회적으로 됩니다.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합니다. 가정으로부터도 격리합니다.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도 이 사람을 인간 대접하지 않습니다. 이목구비야 멀쩡합니다. 다리 하나를 절든지, 눈 하나가 없든지, 손 하나가 없든지-차라리 그렇다면 우리가 가까이할 수 있겠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사람으로 대할 것입니다 마는 정신이 돌고 귀신들렸다 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뭘 알아들어야 어떻게 해볼 일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판단하는 것이 전혀 틀립니다. 육체로는 사람인데 정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악령에 사로잡혀서 더는 사람이라고 칠 수가 없습니다. 사람 대접을 할 수 없습니다. , 귀신들린 사람 가운데는 아주 과묵해져서 아예 말을 안 하는 벙어리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나워집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파괴적 폭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제 몸을 돌로 찔러서 상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 가운데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보십니까? 속박을 받고 부자유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보셨습니다. 내적인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9장에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인이 나옵니다. 다만 귀신에 붙들려 있을 뿐 그 속에는 아브라함의 딸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겉과 속을 달리 보셨습니다. 지금은 무엇엔가 붙들리어 참으로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브라함의 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귀신이라고 하는 영적인 힘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을 뿐, 그 본심에는,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 아브라함의 딸이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그런 통찰력,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이 미친 증세, 곧 귀신들린 사람의 증세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미친 사람은 한밤중에 돌아다닙니다. 어두움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이야기를 좀 하십시다. 성경에는 계시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 곧 사도 바울이나 요한 같은 분들이 다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 받는 때가 밤이 아니고 낮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오에, 사도 요한은 아침에 요한계시록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낮에 듣습니다. 귀신은 주로 밤을 탑니다. 밤을 좋아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어두움의 권세라고까지 말씀합니다.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생각하는 게 다 어둡고, 행함이 다 어둡고, 그 전부가 다 어둠의 권세라는 말입니다. 빛을 싫어하는 것이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입니다.

둘째, 밤을 무덤에서 보냅니다.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삽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무덤은 대게 굴입니다. 그 굴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 굴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더러운 곳에, 냄새나는 곳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의 모습이요, 악령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은 상징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산 자와 함께 하지 않고 죽은 자와 함께 합니다. 생명과 더불어 살지 않고 사망과 더불어 삽니다. 소망적인 것과 함께 하지 않고 절망적인 곳에 의탁합니다.

셋째, 옷을 찢습니다.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흐트러뜨리고 있습니다.

단정하다든지 아름답다든지 하는 것과는 담을 쌓았습니다. 더럽게 지냅니다. 제가 자랄 때에 동네에 귀신들린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갔다오다 보면 벌거벗고 돌아다닙니다. 온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어떤 때에는 자꾸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니까 붙들어서 매어놓습니다. 그러면 꼼짝 못하고 자꾸만 구슬프게 웁니다. 지나다니면서 그 우는소리를 듣자니 참 마음이 아픕디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저런 귀신들린 사람에게 나가라 하시면 귀신이 싹 나간다는데, 나는 왜 못할까?' 그저 '나가라' 한마디해서 말짱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자신이 없어서 못해 보았습니다.

옷을 찢을 뿐 아니라, 제 몸을 제가 상해서 피를 내는 것이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한가지, 선물받은 것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상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가치, 선물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로 받아도 고맙다는 소리를 할 줄을 모르고 그것을 깨뜨리고 때려부수는 것입니다. 선물을 모르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고마운 것을 고마운 줄 모르고 은혜를 은혜인 줄 모릅니다. 선물을 선물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므로 그것을 때려부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특징이라고탈무드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한번 보십시다. 여기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영적 지식이 있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적어도 귀신이 알아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이 알아볼 수 있어야 성도입니다. 우리가 영적 권위가 없어서 귀신이 못 알아보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귀신이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한마디로 빛이라 생각해보십시다. 어두운 세계에 빛이 나타나면 어두움이 싹 물러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 와서 무릎을 끓습니다. 싹 물러갑니다. 혼잡함이, 영적인 혼돈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귀신은 가능한 한 예수님을 피하려고 합니다. 모름지기 어둠은 빛을 피하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습니까?-이런 말입니다. 저들은 저들이 멸망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한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장차 무저갱(無底坑)으로 빠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멸망의 때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 지금은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멸망을 면하려고만 할 뿐 근본적으로 회개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입니다. 형벌은 면하려 하면서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귀신의 생태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악령의 시험에 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당장에 당한 어려움만을 이렇게 저렇게 변명하고 면해보려고 할 뿐, 근본적으로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귀신의 생태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귀신이 회개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이 귀신들이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당장의 멸망만 어떻게든지 피해보려고 기피적인 말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을 어떻게든 기피하려드는 기회주의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말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는 지금이 심판 받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하루 미룬다.' 지금이 심판의 때입니다.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의 때가 저만치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현재의 어려운 형편만을 모면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간청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허락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돼지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달라'-예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해가 되건 안되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악령의 역사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직접 영광을 돌리고, 악마는 간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경험한 일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딸이 의사인데 결혼을 좀 늦게 했습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목사님 중매해주세요"라며 매달립니다. 그러면 저는 "너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게다가 의사요, 돈도 잘 벌고 하니 어디에 네 신랑감이 있겠느냐, 어느 남자가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느냐"하고 농담을 하는데, 이 아가씨도 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중매하셔야죠"하고 대듭니다. "목사님이 못하시면 누가 저를 중매한단 말입니까? 그렇담 좋아요. 제가 믿지 않는 사람 만나 살더라도 딴말씀 하시면 안돼요!"하고 '협박'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겠지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약혼을 하더군요.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상대는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찾아와 말합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믿지 않는 사람하고 라서 장로님께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께는 교회에 문제가 될까봐 부탁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알았다고 하니 제게 한가지 약속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저 남편을 꼭 예수 믿게 만들 겁니다. 그것만 믿고 기다리세요." 몇 년 지나 그 여의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제가 그 장례식을 인도하러 갔습니다. 물론 그 딸도 오고 사위도 왔습니다.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데 그 사위 되는 사람이 먼저 기도합디다. 그래서 제가 그 딸보고 물었습니다. "네 남편이 언제부터 예수 믿었느냐?" "아이구, 벌써 집사예요." 어떻게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그 얘기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남편은 독일에서 공부하여 박사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할 때에 서로 약속을 했답니다. '신앙은 자유이니 당신이 나더러 예수 믿지 말라 하지도 말며, 나도 당신더러 예수 믿으라 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은 어느 쪽으로든 자유요, 신앙에 관한 한 서로 말하지 않기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상당한 지성인이므로 찬성했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하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혼여행을 부산으로 갔는데 첫날밤 자고 나서 보니 신부가 없습니다. 아홉 시가 다 되어 돌아오는데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새벽기도 갔다 온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첫날부터 무슨 짓이냐고 큰 소리를 냅니다. 여자도 지지 않습니다.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종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 내가 예수 믿는 거, 벌써부터 간섭이냐, 이렇게 말문을 막아놓고는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마침 외아들이어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그 어머니는 미신을 많이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그 꼴을 보자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속이 상합니다. 돈을 잘 벌어서 용돈 주는 재미에 내쫓을 마음은 없습니다. 사람도 서글서글하고 좋아서 그냥 며느리와 함께 살기는 사는데 도무지 뒤틀리는 속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걸 그냥!' 이러다 보니까 병이 생겼습니다. 전처럼 무당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사정이 이렇게 됐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고요.

무당이 말합니다. "보자 하니 당신 집에 아주 쎈 예수무당이 왔구먼. 예수 귀신이 왔으니 안되겠소. 당신이 건강하려면 부득불 당신도 그 예수 믿어야 되겠소." 이리되어서 그 어머니도 예수 믿고 아들도 예수 믿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아이구, 지금은 집사예요!"-저는 이 활기찬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봅시다. 누가 전도했습니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귀신이, 도깨비가 자신은 지옥가면서 전도 많이 합니다. 그런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옛날 어른들의 이야기 가운데도 이런 유의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저도 할머니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악령에 대해서 너무 겁을 많이 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령도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다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역사 할뿐입니다. 악령이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한 가지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 돼지를 몰살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두 사람 구원하는 것이야 좋습니다마는 남의 집 사업은 왜 망쳐놓으십니까? 우리는 부득불 순서적으로 보지 말고 결론부터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한두 사람의 정신이 깨끗해졌습니다. 이 장면을 보았다면 돼지가 좀 죽었어도 상관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야 굉장하다, 저분이 메시야다 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장이 난처합니다. 책망할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영접할 마음도 없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보고 "여기를 떠나소서" 합니다. 이것을 보니 이 사람들, 돼지가 몰살당해도 쌉니다. 한 심령이 구원받는 데는 관심이 없고 내 집돼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로 탕자의 아버지를 보십시다.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습니다 마는 내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왔다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그런데 형은 뭐라고 합니까? "그 많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창기와 더불어 먹어버린 아들인데 왜 영접하는 것입니까?" 그 동안 손해본 것만도 얼마인데 무슨 손해를 또 보려고 그러시느냐. 손해만 생각했지 생명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 하나가 구원받는 여기에 전적으로 마음을 쓰고 기뻐하고 또 충만하였으면 그만이지 돼지 몇 마리 죽었다고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었어야 합니다. 돼지를 손해보았다는 사건으로 두렵기만 합니다. 그 두려움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건으로 바뀌어야 하겠는데, 두려운 마음이 그대로 있습니다. 저들은 무서워서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해버리고 맙니다. 기가 막힌 영생의 기회를,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물질의 손해, 명예의 손해, 지위의 손해 할 것 없이 숱하게 손해를 보고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기분에 집착하다가 그만 중요한 생명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소중한 생명이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그야말로 남은 돼지라도 잡아서 잔치를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무덤에서 소리지르고 가까이 가기가 무섭던 이 사람들의 정신이 온전해졌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동네에 경사 났구나'하고 좋아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돼지 몇 마리 죽었다는 생각만 하고 이 귀하신 분을 내쫓고 말았습니다. '여기를 떠나소서.' 이런 마음가짐, 이런 세계관, 이런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손해보아 마땅합니다. 손해 더 보아야 되겠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오는 손해만 생각하고 내 생명, 동시에 다른 사람이 구원 얻은 바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할 줄 모르는 마음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고, 악령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맑은 정신을 가진 이 사실이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 하나가 구원받은 데에 감격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사양치 않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영접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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