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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자와 모르는 자(요 7:25~36)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저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야 믿어집니다. 아니 사랑하기 시작하면 때로는 지나쳐서, 믿지 말아야 할 사실까지도 믿어 버립니다. 이토록 사랑은 믿음을 줍니다. 사랑 외에 그 어떤 것으로 믿음을 갖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신앙 사건과 역사적 사건으로 나누어서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사실적인 의미에서의 사건이고, 신앙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믿는다는 의미의 사건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났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로서 사건이고, 또 하나는 불났다는 그 말을 믿는다는 사건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건이 곧 신앙 사건입니다. 만약 불이 났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불났다는 것이 사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불이 나지 않았어도 불이 났다고 믿는다면 깜짝 놀라 뛰어내리는 사건을 다시 만들어 내므로 결국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분명하고 생생한 것이라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긴 시간 동안 증거가 충족하게 채워진다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지만 어쨌든 믿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도 믿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믿어지는 것은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을 듯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요 7:25-27).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다고 할 때 그 믿는 근거가 어디에 있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본문에서 드러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적인 신앙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설명을 하면, 조금 애매모호하던 것도 믿음이 생깁니다. 바꿔 말하면, 설명을 듣고 나면 논리적으로 이해되어 믿음이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설명하는 말의 내용이 분명치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좋은 설명을 듣고 말의 이치가 맞으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지식과 내가 생각하는 이해의 척도가 있는데, 그 척도대로 맞아들어가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주 권세있고 놀라운 말씀이어서 듣는 자가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하기를,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있는 자와 같았으며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의 말과는 달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는 장황한 설명은 있었으나 내용없이 말만 잘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말씀이요 분명한 내용이었기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들이 합리적으로 이해하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해서 그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둘째로,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담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상황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기만 하면 당장 잡아서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공중 앞에 나서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일반 사람들도 정치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용기와 담력에 믿음이 갔던 것입니다. 가령, 의사가 환자에게 진찰을 하고 나서 담대하게 "걱정마세요"라고 한 마디만 해 주면 환자의 병은 그 자리에서 이미 절반은 낫는 것 같습니다. 담대한 말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도 드러내놓고 담대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 모르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감정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정도였고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셋째는 표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표적은 충분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고, 바다까지 복종하게 하셨으며,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아주 충분한 표적이었음을 본문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요7 :31) 표적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병자는 만나는 대로 고치실 것이고, 권세 있게 담대하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기적을 여러 가지로 그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믿게 할 무엇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은, 누구에게든지 믿음을 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간추려 보면, 우선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 다음은 그 말에 담대함과 분명한 것이 있나를 살피고, 그리고 표적, 즉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이 세 가지를 근거로 해서 어느 정도 믿음을 갖게 되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지식적인 인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시인했다 할지라도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예화를 소개하면,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어느 짖궂은 사람이 그 깊은 계곡에 쇠줄을 매어놓고 곡예사들이 하는 줄타기를 해서 아슬아슬하게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건너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박수를 칩니다. 다음에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더욱더 아슬아슬하게 줄을 건넜습니다. 사람들은 경탄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했습니다. 정말 재주 있고 실력 있는 곡예사라고 격찬을 했습니다. 이번에 그는 다시 바퀴 하나에 손잡이만 달려있는 지게같이 생긴 수레를 올려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이 손잡이를 붙잡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실력으로 봐서 갈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좋습니다. 그럼 여기에 누구 한 사람 올라타세요. 믿으면 타십시오" 라고 말하니, 아무도 올라오지 않더랍니다. 자, 진정으로 그를 믿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온전하게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지적인 이해일 뿐, 믿음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아멘"이라고 천번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멘 했다고 이상한 외바퀴 수레를 타고 폭포를 건너갈 수가 있습니까? 아멘이라고 말했고 분명히 믿었지만 가슴이 따르지를 못했습니다. 가슴으로 믿지 못했기에 내 몸이 움직여지지 못하며 내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적으로 수락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합리적인 이해나 동의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전적인 위탁이며 헌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를 한두 가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내가 아는 지식 때문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기가 어렵습니다. 41절에 보면 그들이 시비하기를 당국자들은 예수를 잘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또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누구이며 직업까지 알고 있다고 다투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보다 깊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가까운 친구의 위대함을 몰라주게 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마음을 주고 존경하면서 가깝게 잘 아는 사람은 존경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갖고 있는 적은 지식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디시미레이션(di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즉, 가까운 사람과는 사이가 멀고, 멀리 있는 사람과는 가까운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와 일본은 가까이 있지만 서로 마음이 멀고, 미국과는 멀리 있지만 가까이 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다 그렇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라는 이해관계가 있으니 자연히 멀어지고 먼 나라와는 친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면, 사실 예수님과 한 고향이므로 더 잘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지식만으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내가 알고 있는 적은 지식으로 믿음에 방해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필자가 잘 아는 모 대학 윤리학 교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교수님의 아드님은 목사이고 온 식구들이 다 직분을 맡고 있는 착실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글을 많이 쓰시는 편이었는데 예수님에 대하여, 바울에 대하여 아주 좋은 글들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번 권해보았더니 "나는 책을 좀 읽은 이유로 예수를 믿지 못하는 불행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변명을 했습니다. 자기가 공부한 것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할 것 같다고 본인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무식만 못합니다. 본문에서도 그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외적인 사항이었지 예수님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볼 때 그의 외모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출신이 중요하고, 학벌이 중요하고, 직업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짜르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모짜르트가 길을 가다가 "모짜르트 연구회"라는 광고를 보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모짜르트의 곡을 들어가며 열심히 해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짜르트가 듣다가 보니 내용이 엉터리여서 일어나 한마디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곡은 모짜르트가 연애를 했거나 시련을 당해서 작곡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잘못된 해설을 고쳐주자, 지금까지 해설을 맡아 하던 사람이 "모짜르트라면 내가 잘 아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모짜르트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 당신 말이 옳소이다"하고 물러섰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때문에 정말 알아야 할 다른 사실들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척했습니다만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사실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의 것만 생각하여 땅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요 7:33-34)는 말씀을 하셨고, 그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을 듣고, 헬라 사람들에게 가서 가르치실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들에게로 가실 것인가 하고 서로 묻고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이 통하지를 못했습니다. 땅의 것에 기준을 두고 있으니 들려질 것도 없었고 보여질 것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가치관은 항상 높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즉 천국의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야 어떻게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땅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복을 받는다 하면 돈만 생각하고, 고난을 당한다 하면 무엇이 잘못된 줄로만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나 높은 수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에서 보면, 29절에 예수께서 "나는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또한 3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확실하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도 보면 자신만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 : 1-3). 얼마나 분명합니까? 또 마태복음에 보면, "조금 있으면 안 보이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 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3년 동안을 가르침을 받았지만 알아듣지 못하여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헤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이 베드로 자신이나 어느 혈육이나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도록 하셨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갑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도 왔다가 갑니다. 그러므로, 한 시간 시간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은 원래 없었던 것인데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또 없어질 것입니다. 본래 없었던 것이 지금 내 손에 들어왔으므로 손에 있는 동안 바로 써야 합니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도 마찬가지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자를 걱정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건강을 돌보지 않고 왜 그렇게 바삐 돌아가느냐고 저의 건강을 염려합니다. 제 대답은 언제나 간단합니다. "부를 때 가야지요" 사실 항상 오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금 지나 나이가 들면 오라 하지도 않을 것이고 더 지나면 갈 수도 없을 때가 올 것이니 말입니다. 할 수 있고 갈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왔다가 갑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의 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예수를 체포하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체포를 못하고 있음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체포를 하러 왔다가도 말씀에 감동이 되고, 또한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해 체포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요한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웠으므로 때가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7:6에서 본대로 "너의 때는 항상 있지만 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때"라는 말씀을 하셨고, 또 누가복음 9:51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환란도 있고, 핍박도 있고, 순교도 있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때가 아니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빌라도가 한 것 같고 가야바의 결정인 것 같고, 저들이 음모를 꾸며서 체포하는 것 같아도 때가 아니면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부조리 가운데서 일이 전개된다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가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상당히 배웠었고 신앙이 좋았으므로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의 마지막에 확고한 신앙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겠다는 결의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는 확실한 신앙이 있고 그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저들은 계속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오순절 성령 강림한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할 때 마음 문이 열려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만나 잠깐 이야기했는데 당장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시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당장 자기 집을 열어놓고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씩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역시 믿음은 선물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신령한 은혜 가운데서 주를 알고, 주안에 있는 나를 알고,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아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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